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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다[요18:1- 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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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다[요18:1- 11]

주하인 2013. 3. 24. 09:04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동산에 들어가셨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자유의지' 선택하신곳.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그런데 그곳 조차 '유다'가 아는 곳이다.

다 아시며 들어가신 것이시다.

유다가 제자로 따라다니던 시절 ,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이곳에 그를 데리고 다니셨다.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세상에 주님이 모르실 것이 있는가?

나에게 펼쳐진 오늘의 어이없는 일조차

주님이 다 허락하셔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 인생에서

난 무엇을 찾는가?
누구를 찾고

왜 찾는가?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내가 그니라' 하신다.

 

내가 그니라.. 는 말씀에 다양한 의미가 함축이 되어 있다.

병사들이 찾으러 오는 대상으로서의 '그'

유다의 헛된 대상으로서의 '그' ...

병사들은 단지 명령 수행 대상으로서 '예수'님을 '그'로 보았을 지도 모르고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어쩌면 수없이 많은 기적을 베푸는 놀라운 자로서의 그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내가 그'라 하실때에

그들은 그 갈등의 표현을 땅에 엎드림으로 격하게 반응한 것이 아니던가?

 

 유다는 '사단'이 들어가서

당연히도 '부'의 대상으로만 예수님을 '그'로 보았을 것이고..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내가 그니라..시는 말씀에는

그런 다양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속에 규정된 모든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

다시 '누구를 찾느냐'시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찾는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 살던가?

무엇을 찾으며 사는가?

사람마다 다 찾는 '그'가 다른데,

보려는 그가 다르고...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누구'를 찾느냐 직접물으시면서도

그 사람마다 찾는 다양한 '그'에 대하여

한마디로 '내가 그'다라고 한마디로 대답하시는 것이시다.

그것은 무엇인가?
어찌 예수께서 그들이 찾는 그 많은 '그'에 대한 기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시는가?

솔직히 주님께서는

그들의 찾는 '그'에 대한 형상,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으신 분이 아니시던가?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이시지

어찌 그 분이 유다에게 돈을 벌게하실 대상으로서의 '그'이며

어찌 그분이 병사들의 명령수행 대상자이신 '죄인'으로서의 '그'이고

또 어찌 그들의 뇌리 속에 자리 잡힌 '기적'을 베푸는 신기한 사람으로서의 '그'이고

질투하는 자들의 '사형당할 죄인'으로서의 '그 '.. 이던가?

하나님께서... 겨우...어찌?....

 

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그'라는 표현에는

그 모든 표현이 함축되어 있다는 말씀이던가?

오늘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와 '내가 그'라는 말씀에

주시고자 하시는 '레마'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는 말씀에 중심이 있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다양한 외부적 표현이고

그 정체성의 근본이유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는 확고 부동한 자기 인식이 있으시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땅을 산다'시다.

그게 확고 부동한 자기 인식이시다.

당연히 진리시고..

그러한 자기 정체성이 확고 부동하면

외부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군인들이 보려는 모습도 '그'이시고

유다와 바리새인들이 보려는 그도 그이신 것이시다.

 어찌 그게 가능한가?

하나님이 그러한 장치를 통하여

당신이 프로그램하신 대로

오늘의 이 부족한 주하인까지도 구원하게 하신 그 엄청난

'십자가 사건'을 이루게 하신 키(key)로 예수님을 들어 쓰시게 하신

그 '키'로서의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로 비치게 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

나는  Sefl Identity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스러운 나' 지만

나는 외부적으로 비치는 'Professional Identity'로서 다양한 모습이 있다.

'나'이지만 '그'인 나.

남들에게 비추이는 나.

의사.

남편

아버지

아들

사회인

나이든 중년 남자

찬양하는 자

덩치 크고 나름 생긴 것은 듬직한 자.

신앙인

제자

친구

형제

오빠

동생

친척

오늘은 특히 '집사' .

믿는 자로서의 나.

...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모른다.

나에게서 그들과 마주친 '나' 만을 보기를 원한다 .

문제는 내가 '나'에 대하여 '적절히 인정'하는 가, '과도히 ' 인정하는가, 부족히 인정하는가.. 에 따라

외부적으로 '나'를 자기 나름의 '그',  프로페셔날한 나로 인정하고 다가오는 자들 사이에

역학관계에 의하여

나와 다가오는 그들 사이에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어지는 가 결정지어진다.

건강한 사람일 수록 당연히도 본래의 자기 자아를 건강하게 적절히 인정하고

외부적으로 '가면'을 쓰고 프로로서 적절히 행동하겠지만

건강치 못한 실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진 자 중에

자기를 너무 과도히 크게 보면 '오버'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고

자기를 너무 작게 보면 사회적으로 후퇴하여 자존감이 낮아져 위축될 수 밖에 없으며

당연히도 타인과 마주하는 '그'로서의 가면쓴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이 오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신다.

난..오늘 세상에 집사로 나간다.

교우로 나간다.

그들이 나의 모습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예수님 믿는 좋은 신앙인을 찾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대로 잘 반응하길 기대한다.

말씀대로 '겸손'하게 그리하리라.

고개 숙이고 조용하리라.

엄숙하리라.

비판을 제하고 부족한 자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주님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 더 나를 낮추리라.

그 모든 것이 '그들이 나에게 그 모습을 찾을 것이기에' 그렇다.

혹시 그들 모습에서 난 '교인 답지 못한 모습'으로서의 그들의 '그'를 볼때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신 잔'을 먹은 그 아픔을 이해하고 꿀꺽 넘어가리라.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고 확신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시기에 한점 흐트러짐 없이

그들의 포학하고 배반하는 행동을 참아 내셨다.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이해하시고

기쁨으로 순종하여 받아 드리니

저리 되신 것이시다.

 

그렇다.

나는 나를 잘알아 간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확실히 알고

이 인생을 통하여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런 성장을 하고 여기까지 와 있고

그러그러한 죄가운데 지내다가

주님의 전적인 선택 가운데

나이 38살에 같이 계시던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 들이게 되고

10몇년의 과정을 허락하시어 이제 눈을 뜨게 하시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를 나의 환경 가운데 허락하셔서

내 영혼의 죄를 벗어내고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시기 위하심을 알았기에

이제 오늘 말씀대로

그러한 나도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주신 잔이시기에

기뻐하는 마음으로 나의 고통과 아직 남아 있는 어려움들을

오래 참음으로 옷입고

다시 외부의 내가 원치 않지만

내가 그로써 뵈일 것을 기뻐 받아 들이며

내게 주어진 다양한 모습을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여러 그를 볼 것이다.

난 그러한 다양한 '나'를 이해하고

그들의 '나'를 기뻐함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다.

더 기뻐하고

더 고개 숙이고

더 인자한 웃음을 보이리라

더 겸손하게 하겠고

더 목소리를 낮추겠다

더 자제하여 버거운 모습들을 받아 들이고

더 그들의 나아짐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오늘은 주일이고

주님의 날이기에

주님의 뜻을 위하여

내 Self Identy의 내가 ..아니라.. 소리치려해도

주님의 뜻이란다..하고 받아들여 성숙한 '나'를 도모할 것이다.

 

 

 

 

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어찌 닮을 수 있을 수 있겠나이까?

그 모진 고통,

그 놀라운 인내.

그 엄청난 자기 인식과

그 어마어마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요...

하지만 주님이 보이신 것은 모두 모본이심을 기억하여

하나하나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 만을 기억하겠습니다.

여러 장애들을 물리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제 성장이고 성화임 만을 기억하여

어려움을 참겠습니다.

그들의 그에 대한 기대대로 행동하려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쑥스럼이 아니고 자연스러움으로 받겠습니다.

주님.

자연스러운 제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로

남편으로

동료로서

집사로서

동행자로서

위로자로서

의사로서

바라보는 자들을 받겠습니다.

그대로 순종하여 돕겠습니다.

그들의 뜻과 맞추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성령으로 굳게 잡으소서.

은혜 더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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