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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계1:17-7)

주하인 2006. 7. 26. 09:04

(계1:17-7)

 

 

17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자(Living one)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

    를 가졌노니

 

 

 조금 전 커피 자판기에 넣을 동전을 바꾸러 가운을 입은 채 다녀왔다.

 

 

접수대에 다가가니 환자 한분이 데리고 온 딸 아이가 엄마곁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빛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마구 꼬집어 주었다.

 눈빛이 이런 눈빛이었다.

'한번 알아주었으면..

 한번 칭찬 받았으면..

 흰까운이 무서워..

 너무 훌륭해 보여...'

 병원에 찾아오는 순하고 이쁜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 눈빛.

그러면서 마구 까불던 몸동작이 스르르 줄어들고

몸이 조금은 위축되면서

비비 틀고

고개를 아래로 약간 떨구고

손가락 하나를 꼼지락 꼼지락하며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는 듯한 자세로

눈 만 위로 치켜뜨는 자세를 취하는 ....

 동전을 바꾸고 나오면서 흘끗 뒤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손에 힘을 주면서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는데

 그 눈빛은 빛이 나며 틀림없이 이랬다.

' 아..  자랑스러워.

 저분이 날 이쁘데...

 그런데 수줍어'

하는 듯한...

 

 오늘 예수님을 만난 사도 요한이 죽은 것 처럼 엎드러진 마음이 그런 마음이 몇배 컸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아기를 보는 나의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 마음의 증폭된 것은 아닐지?

 

사도요한이나 그 아이의 바람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면...

보는 것 만으로도 그리 기쁘고 좋은데,

그 분의 , 그 존경스럽고 인생을 다 걸 수있는 그 분이

말씀으로 확신까지 주신다면...

내 볼을 꼬집어서 흔들면서 귀하다..하시면..

 주님 예수님이 지금이라도 내 곁에 나타나셔서

그분의 귀한 오른 손을 들어 나에게 얹고

'두려워 마라 얘야.

 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란다.

 시종일관 나로 인하여 모든일이 진행이 되고 있단다.

 

난 비록 죽었었지만 살아 있다.

죽음과 음부의 열쇠까지도 내가 가졌단다..'

라고 .. 하시면...

얼마나 좋을 까?

인내하자 .. 주하인 !!  주님 뵐때까지 ~   )

 

연단 중에서도 가장 큰 연단은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안개 속 같은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것인 것 같다.

 너무 어려우면 오히려 더 기도하고 주님께 매달리는데...

우리가 그렇다.

주님 안에서 열심히 묵상하고 기도하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세상 돌아가는 것에 잠시 눈돌리면

그들처럼 세상에 욕심 부릴 자신도 없고 재미도 없으며

그렇다고 앞으로 남은 여생을 주님께서 강력히 잡아주시지 않으면

어찌할꼬?

하는 답답함...

( 삶이란 너무 힘든 과정이다... 주님이 아니시면.. 어찌 견딜꼬? )

 

 주님 제발 산자로서 제 곁에서 모습을 보이소서...

입신이라도 시키소서..하고

기도하기도 한다.

 

 요한의 밧모섬 유배는 

주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산 자'로서 모습을 보이시고 말씀을 하시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직원 한 분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내 방에 찾아와서

사촌동생이 분만하다 사망했다면서

침울해 했다.

 

 아...

산자 하나님이 그 가족을 위로 해주셔야 할 때이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에게 '첫사랑'

회복하라고 강하게 권고하신다.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알고 있지만

저와 제 가족에게도

급히 필요한 자들에게 주님이시여.

살아있는 당신을 보이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 은혜의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다.

- 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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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섬김으로 공동체를 세우라


 공동체는 마음으로 소원한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만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공유성(commonality)의 연약한 선물인 공동체는 행동에 토대를 둡니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생겨납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공통의 목표와 목적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함께 여행할 충분한 이유들을 계속 발견할 수 있을 때 공동체는 자랍니다.

그리고 연합 안에서 다양성을 장려할 때 공동체는 풍성해져 갑니다.


 헨리 나우웬은, '라르쉬' 같은 장애 공동체는 '말이 아니라 몸에 토대를 두고 세워진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는 라르쉬에 있으면서 '먹여 주기, 청소하기, 만지기, 붙잡아 주기 등,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를 세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이 관찰은 어느 공동체에나 해당하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실제적인 돌봄과 섬김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부심, 우선권, 그리고 지위를 한편에 내려놓고 겸손이라는 옷을 입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비밀은 그 자체의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발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축제와 계시의 위대한 순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워하며 신실하게 섬기는 일상에 있습니다.


- 「헨리 나우웬과 떠나는 길」/ 찰스 링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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