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사랑없는 믿음은 망상이다 (마 9:1-13 ) 본문
제 9 장 ( Chapter 9, Matthew )
후배 결혼식
신부측 지인들의
특송 연습 장면.
후배야
예수님 영접하고
오래 행복하거라 ^^*
믿음 만이
너희 부부가 오래 해로할
유일한 기둥이다. ^^*
부부간의 믿음
예수님 믿음.
알지 ?
나이 들어 결혼하니
더더욱 행복해야 한다.
ㅎㅎ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어
고향에 이르자 마자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들고 나타난다.
아마도 네 귀퉁이의 침상을 네명이 들지는 않았을까?
독특한 장면이긴 하다.
고향에 도착하시자 마자
그 소식을 듣고 각 개인이 좇아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네명이 동시에 침상째로 중풍병자를 들고 온다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주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 하실 정도로
특별한 현상이었다.
왜 그리 보였을까?
일단은 네 명과 중풍병자의 우정이 그것이다.
주님 예수께서 타고 오시는 배가 도착하자 마자
침상채로 왔다는 것은
사전에 충분한 약속이 되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약속이 설령 되어 있더라도
예수께서 오시는 스케쥴이나 그분의 행로를
확실히 미리 파악하지 않고는
그리되기는 힘들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근처로 오신다는 것은
다 오신 후에야 알수 있을 터인데
그제야 알아서는 저리 단합된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그들은 늘 대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기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존재를 '중풍병자'의 '하인'으로 가정할 수 있다.
하인들이라면 주님께서 'their' 즉, '그들'의 믿음이라시면서
믿음에 대하여 감탄하실 일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하인이었다면
하인을 혹사시키는 게걸스러운 중풍걸린 주인의
마지막 지독한 매달림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볼때
처음 가정한 것처럼 그들의 '우정'에 의하여
아마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 분의 기적을 의지하여 보자.
그래서 이 친구를 옛날 처럼 돌려 보자'라는
결의에 찬 사전 묵계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런 그들의 친목은
예수께서 근처 어디에선가 기적을 보이셨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자의 집에 모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주하인이 산모대기하듯이
그들은 생업을 제쳐 두고서라도
모든 촉각을 예수님의 행로에 맞추어 두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배를 타고 근처에 도달하시고 계시다는
어떠한 전령 - 어쩌면 다른 친구 하나가
예수님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소식을 전했을지도 모른다 - 이 소식을 전해오자 마자
모든 일을 다 멈추고 중풍친구 집에 모여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을 지 모른다.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들이 침상채로 끌고갈 결심은 어찌했을까?
백부장처럼 직접가서 말로만 고해도 될 것 아니었던가?
그들의 그 행태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한적 없던 행동이다.
그러기에 유별나고 특별하여 보일 것이며
그것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쉽상일 것임을
그들도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그처럼 자신의 모든 정성을 바쳐
이런 행동을 결심하고 생업을 뒤로 미루며
친구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친구를 위한 놀라운 '사랑'의 희생에 더불어
확실한 어떤 믿음이 없다면 안될 것이다.
그 믿음이 무엇이었을까?
그 믿음은 바로
'예수께서는 반드시 고치실 것이다. '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들을 그리 기발하게 행동하도록 하였고
그것은 예수님의 감탄에 어린 칭찬을 유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어떠했을까?
젊은 시절.
고등학교 때 '우리들 세계'라는 고등학생 대담 프로그램에
친구 몇명과 그룹을 결성하여
'다정한 연인'이란 노래로 TV를 탄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들과 오랜 친구로 우정을 다졌다.
친구들과는 만나기만해도 기뻤다.
방학 때면 집보다는 친구들과 모여
많은 곳을 놀러 다니며 추억을 쌓았다.
그런 몇명의 친구들.
하루라도 안보면 보고 싶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같은 우정의 친구 중 하나가
중풍 병으로 앓고 있었더라면
그들 중 누구도 안타까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의 간이라도 빼줄 수 있을 것 만 같은 자가
당시의 , 아니 지금이라도 중풍이라면
치료가 불가능한 질환인 바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없던 차
풍운아 처럼 나타나신 '예수님'의 소문은
그들 우정의 마지막 신호처럼 느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한 친구의 호출에
중풍병자 친구의 집에 모여 들었고
그들은 다각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중 예수님이란 분의
많은 기적을 들었을 것이고
그 우정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간절함은
예수님의 신화 같은 신기한 이야기들을 듣고
흥분을 금치 못했을 것이며
그들의 친구의 회복이 불가능한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했을 것이기에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께서 친구를 고치실 것'이란 사실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마음의 합함이 이루어져 갔을 것이다.
' 예수께서 고치실 것이다'
' 예수님 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 그들의 한 마음은 이제 행동양식을 짜게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어쩌면 전령을 대동하고
예수님의 행적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네 사람은 멀리 가지 않고
늘 중풍 친구 집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가
예수 께서 도착하시면
수백명 이상의 군중을 뚫고 침상을 밀고 들어갈
행동대원 몇 친구들을 포섭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들.
이런 상상이 맞다면 그들의 행동을
이처럼 절박히 하게 했던 그 중풍으로 들어 누운 친구의
평상시 행동이 어떠했을까?
그 친구는 아마도
참으로 인격이 뛰어났던 자가 맞을 거다.
친구들과 절묘한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고
믿음 또한 뛰어난
아주 '純秀한 자' 였을 것이다.
아마도 주위에 감동을 주었을 가능성이 많은
삶을 살던 자가 맞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날벼락 처럼 '중풍병'이 닥쳐왔고
중풍이란 지금처럼 '배에 기름 많이 낀' 자들이 생기는
고혈압, 고지혈 증에 의하여 생길 가능성이 적은
고대이기에 아마도 선천성 혈관 기형에 의한
'뇌혈관 파열'로 인한 중풍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긴병에 효자 없듯이
대부분의 만성질환자들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어 있던 바,
그에게는 위에서 상상했던 친구들의 희생을 보면
그런 그의 '순수하고 감동적인 성품'이
긴병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위와 같은 역사가 일어 났을 것이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상상이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던가?
그런 상상이 사실일 가능성은
예수님의 놀라시는 표현에 의하여 충분하다.
한마음이 된 공동체.
절절한 우정.
하나님이 하실 것에 대한 한점 의심없는 믿음
그러기에 가능한 독특한 행동.
그 행동을 가능케한 충분한 토의 .
그리고 합심.
사랑.
참으로 여러가지 좋은 것들만 조합된
공동체적 사랑과 믿음의 표본이다.
그리고 그 들의 믿음이
하나님이 달란트로 주신 '요셉'같은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들 사이의 사랑과
그들의 소망이 깨질 것이 두려워
'믿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 믿음에 대한 진실이
묵상을 진행하는 과정 중
나에게 새롭게 느껴진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즉,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기로 선택한 후
믿어지든 안믿어지든
의심하지 않으려는 노력일 수 있다는 것.
그 의심은 본인의 것이 아니다.
'실패와 안되면 어쩌지..'라는 소리로 막아서려는
사단의 것이다.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선택과
행동과
예수님 십자가 아래서
믿음마져 성령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의심에 자신을 맡기는
의심많은 자들은
영적인 병이고
마음의 병을 가져올 수 있고
육신의 병까지 가져올 수 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의심을 벗어나길 선택하는
믿음에 의하여
모든 병을 고치게 하기 위해 오셨다.
나.
병든 자?
묵상할 일이다.
믿음이 아직도 깊지 못하다 .
더욱 신실하고 단순한 믿음의 선택일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또한
위의 예를 통하여
모든 믿음이 더 힘있게 되기 위하여서는
'사랑'이 깊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즉, 긍휼한 마음이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들의 착한 행위를 보면 감탄할 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배경
그들의 깊은 배경을 보면
'맨슬로우의 욕구 단계' 중
가장 상위 단계 인 '자아 실현의 욕구'일 가능성이 많다.
즉, 먹구 살만하니 삶의 의욕을 찾기 위해
봉사를 선택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도구일 뿐
만일 '임계 상황' 즉,,
어떤 한계적 상황에 부딪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전혀다른 인격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숨어 있을 뿐,
마귀적 성품
원죄적 성품은 그들이 한계적 상황에 다다르면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주님예수님이 그토록 원하는
영혼의 깨끗함,
믿음의 놀라운 성장
그리하여 '천국 백성의 자격'으로는
하등
일말의 가치가 없는
'속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인간의 행동으로
영혼이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망상(妄想)이다.
주님은 영혼이 순수해지길 원한다.
그 순수함이 없음은
천국이랑은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을 회복함은
주님 예수님을 믿음이다.
주님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긍휼' 함으로 더욱 깊어질 수 있다 .
보라.
'중풍병자의 친구'를 ..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사랑
그들의 친구에 대한 긍휼
서로간의 우정과 신뢰에서 나왔다.
그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긍휼하기 위함은
믿음을 위함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죄인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는 다함은
긍휼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모두... '가 아닌가?
주여 주여 하면서
긍휼한 자가 주님 나라에 합당한 자다.
적용
1. 사랑하자
긍휼한 마음을 기도한다.
사랑은 '믿음'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고는 주님을 어찌 사랑하는가?
형제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어찌 믿겠는가?
2. 나는 죄인이다.
주님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죄인 괴수 다.
감사할 일이다.
3. 남을 위해 기도하자.
월요일 아버지 학교 스텝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긍휼의 훈련 장소이다.
4. 믿음
의심토록 하는 어떤 생각들이 날 그냥 두지 않는가?
5. 예수님을 믿음은
순수한 영혼이 됨을 의미한다.
순수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자랑스러움이다.
손해를 볼 지언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수함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6. 성경 여덟장 읽겠다.
7. 주님의 안심해라 소리가 들리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누구들 처럼 소리를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모한다.
기도
주님
오늘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통한
묵상을 진행했습니다.
그 분들의 그 사랑과 우정.
절묘히도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의 조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합해서 벌이는
침상 영접...
그것을 통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주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우리의 노력이 바탕이 되고
우리가 긍휼히 되려는
노력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조금은 눈치 챘습니다.
내 속에 머물러
나의 영광을 위해서만은
절대로 옳은 믿음이 될수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주여.
남들을 긍휼히 여김.
그래서 피어나는 '간절함'
그 과정에서 믿을 수 밖에 없는 선택.
그것이 옳은 믿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저 올바른 마음의 흐름을 허락하소서.
나의 이기적 생각을 벗어나
좀더 마음을 넓히고 남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이 넓어지는
간절함을 허락하소서.
남을 위한다는 내 자아의 실현이 아니길 원합니다.
주님.
주님으로 인하여 믿음마져 더욱 커지길 원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다시한번 배웠사오니
주여.
이 믿음의 부족함 마져 채우소서 .
이 어리석음 깨닫게 하소서.
눈치채이게 하소서.
예수 께서 저에게 '안심하라'하는 소리 듣기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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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나의 맘에 임하사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채워 주시네 나의 그릇을 씻어주시고 큰 은혜 부으사 나는 넘치네 나는 넘치네 나는 주를 느끼네 지금 나의 곁에 계셔 나를 보고 계시네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네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주님 밖에는- 주님 밖에는- 전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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