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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선한 친구(요일3:9-15) 본문

신약 QT

사랑받는 선한 친구(요일3:9-15)

주하인 2009. 4. 30. 11:27

 

 친구는
서로 닮는 사이다

조금 더 붉어도
조금은 덜 붉어도

그냥 그렇게
어우러져 버림으로
더 아름다운
하나를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 친구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천국의 모습이다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악한 것은 무엇이고 선한 것은 무엇인가?

세상이 복잡해 지면서 이전에는 비교적  뚜렷하던 선악의 개념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은 점잖고 함부로 혈기를 발하지 아니하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대통령이 (누구라고 하지는 못한다.  감히 N 대통령이라고는..ㅎㅎ ) 온갖 악의와 어린아이 같은 억지를 발해도  그것을 하도 많이 보다 보니 그런게 정상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황우석 박사의 '배아 복제'는 엄연한 생명을 건드리는 영역임에도 

어느새 경제 ..라는 이름으로 합법화 된다.

 이혼은 추세처럼되어가고

낙태가 합법화되며

도저히 생물학적, 기계 물리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요와 요' '철과 철' 사이의 결혼이 합법화 된다.ㅎㅎ

동성부부 말이다.

 TV는 막간다.

영화의 폭력은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세상은 구분이 없어진다.

 어느게 선인지 악인지 구분할 필요조차 못느끼는 것 같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당연히도 여긴다.

그러면서 세태에 비교하면 그들은 다 합리화 된다.

 자신들의 감성 만이 오직 유일한 진리인양 살아간다.

 

오늘 디오드레베와 '친구'라는 개념의 두 선과 악의 대비가 나온다.

 악한 디오드레베는 접대를 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등... 악한 행동을 한다.

사랑하는 자로 대비되는 '친구'

즉, 선한 자들은 서로 문안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선한 자들은 서로 교류가 있고 평강을 소유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내 삶 속에서 선과 악이 구분될 수가 있는가?

그렇게 쉽게 아는 선한 자의 삶에 대한 바램이 행실로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다양한 내 모습.

의사로서..

친구로서..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들의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사회인으로서...

난 모든 모습에서 선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 

 친구같은 의사.

서로 문안을 나눌 수 있는 의사.

 문안 나누고 염려하는 좋은 친구로서의 친구.

친구 같은 남편.

친구 같은 아버지.

나이들어 가시는 아버지에게 문안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들.

..........

과연 그런가?

세상이 혼돈스러워져 가며

자칫 그 친구같은 ..이라는 개념에 흔들리는 가치기준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가?

그 의도와는 달리 받아들이는 아내, 아들, 아버지, 환우......들에게

좋은 친구로서 일정하게 받아 들여지는 친구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

일정부분 많은 개선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가까운 관계 속에서

내 선한 의도와 다른 어떤 벽같은 것이 있다.

반드시 깨어버려야 할...

발로차고 두드려도 무너지지 않을 듯이 보이는 옹벽이 있다.

그럴 때 마다 주님의 뜻대로 선하게 산다는 노력이 얼마나 쉽지 많은 않고

세상의 흔듦과 역기능이라는 이름의 사단의 저항이 강한지

힘을 잃어 버릴 만큼 힘이 들때가 있다.

 

 디오드레베.

사도 요한 장로의 극도의 거부감을 유발하는 자.

정면으로 저항하는 자.

성경에 나쁜자로 이름을 올린 자.

그의 잘못이 무엇인가?

살인을 한 강호순도 성경에 이름 올리기 어려운데.ㅎ.

 주님의 일을 막아선 자이다.

주님의 일을 막아선 근본 원인이 무얼까?

유다도 마찬가지 겠고

헤롯도 마찬가지지만

가만히 그의 속을 들여다 보면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이

그로 세상의 가장 나쁜 자로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다.

 소유욕,

윗 사람에 대한 거부감,

명예욕...

그 깊은 속을 더 들어가 보면

그의 성장 과정에 있던 어떤 상처 등이 원인이 되지 않지 않을까?

그러한 욕심이나 저항을 유발할 만한 성장과정의 어떤 아픔.

그 아픔을 다독여 주고 싸매어줄 사랑의 대상이나

교훈의 대상의 부재,

거기에 자신의 상처를 해결할 선한 욕심은 부리지 않고

도피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성격을 왜곡시켜 버린

자신의 잘못된 선택.

 

작금 세상의 가치 부재의 가장 큰 원인은

'확실한 진리가 없어짐' 탓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철저히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보니

배우고 존경할 대상이 없어진 탓이다.

 마지막이던 '주님의 진리'마져 마구 침범해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이다.

 

 

 아침에 진료실에 늦게야 들어섰다.

목요일 아침은 큐티 찬양인도인데

늦잠... 이 게으름 탓에 늦었는데

여직원 한분이 찾아 오셨다.

아침에 목사님이 '주하인'에게 사정이 있어서 못옴을 말씀하셨고

그 분은 걱정이 되신다면서 올라오신 것이시다.

늦잠이 원인인지도 모르고.ㅎ

 어차피  다른 이유이도 있으시긴 하여 대화를 하다가

그 분이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을 알고 놀랬다.

 불신자들이 거의 대부분인 아침의 찬양시간에 홀로 머뜩히 찬양을 인도하는

중년의 남성찬양리더를 조금은 덜 머쓱하게 하던 분이 그 분이다.

찬양을 하면 깊이 받아 들이는 눈망울이나

가끔 나도 모르게 멘트를 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집중하는 눈으로 끄덕이던 분이시고

가끔은 조용조용히 따라하던 모습이 신앙체험을 깊이 하던 분인 줄 알았다.

 그 분과의 대화 하던 중

그 분도 예수님을 한번 깊이 만나보았다면 좋겠다는 고백을 들었다.

나는 결단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일요일 억지로라도 한번 교회에 나가보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세상의 원리를

내 안에 받아 들여 그 원리가

내 속의 평강으로 온전히 인식되어

삶이 편안해지고 걱정이 사라지는

'평강'의 삶이 되는 길에는 자신의 '선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 선택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사랑받는 주의 친구'가 되는가

'디오드레베'가 되는 가 결정이 되는 순간이다.

늘 느끼지만, 믿지 않는 분들,

피상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의 심령은

거부 반응이 드는 그 무엇이 있고

그들의 심령 앞에서는 날카로운 예기 같은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오늘 장로인 사도 요한 께서 말씀하시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친구인

선한 자의 자격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조금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남들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을 배려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남을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선한 논리를 대어도 '악'이다.

선한 교류를 - 무조건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해치는 어떠한 논리도 배격해야 한다.

 

 그 기준이 '성경'이다.

 그 기준을 이끄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 기준을 따르면 나타나는 현상이 '평강'이다.

 그 기준을 따르는 결과물이 '천국'이다.

 그 기준을 따르는 우리를 부르는 말이 '친구'다 .

 그 기준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은 '사랑 받는 자'이다.

 

특별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성질이 급해서 많은 자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가족에게도 그렇다.

더 유해져야 한다.

더 편안해져야 한다.

더 온유해져야 한다.

 

 

 점심에 아내가 봉사하는 호스피스 - 우리 병원 3층에 있다.-에서 부른다.

찬양을 리더 해달란다.

창피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전에 전인치유 무대에 올라설 때도 얼마나 많이 마음을 조아리며 했던가?

이 모임은 어쩌면 더 가까운데서 같이 부르며

지나다니는 동료 의사, 간호사들이 쳐다보는 그 군중 속에서 해야하는

시간이기에 더욱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정했다.

그냥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예수님을 위해서 찬양한다.

내 부족한 점은 내려놓고

내 잘하는 것 -찬양, -을 들고 그냥 내려놓는다.

 세곡을 하고

기도를 하고

도망치듯이 내려왔다.

얼른 지하의 '임상과장 회의'로 내려 왔다.

최소한 난 '선한 선택'을 했다.

얼마 후면

난 주님의 '사랑받는 선한 친구'로 불릴 때가 있을 것을 예감하면서...

 

 

 

적용

 1. 친구로서의 나를 돌아본다.

  반성이 필요하다 .

 남에게 배려가 부족한 삶을 살았다.

 

2. 친구로서의 자격에 대하여 묵상한다.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3. 교회에서의 선한 교류에 대하여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 사랑으로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5. 가족의 선한 친구로서의 나.

 배려하고 감싸주고 이해해주는 나여야 한다.

 나를 이해받길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6. 오는 모든 환우의 친구로서 하루를 보낸다.

  좀더 친절하게.. 배려있는 모습.

 

7. 화내지 않는다.

 어떤 이유든 급한 화는 죄다.

 

8. 당을 짓지 말자.

 

9. 입을 조심하자. 

  분란은 죄다. 

 

 

기도

 

주님.

친구라는 개념으로 세상의 온갖 나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배려라는 면에서도 생각해 봅니다.

분당을 짓지는 않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헛튼 판단으로 가까운 자를 정죄하지 않았는지도 봅니다.

아버지로, 남편으로 , 직장인으로, 의사로서도 자신을 돌아 봅니다.

아무 것도 그리 잘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주님이 '선한 친구'로서의 모습에 대하여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선한 친구의 모습에 배려를 하고 남을 위하여 조용히 연합하는 모습을 봅니다.

난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제 그러려 노력하겠습니다.

진리이시고 원리이신 주님이 그러시라시니 그러겠습니다.

남들이 고리타분하다고 해도 전 그리하겠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조금 떨어져 살겠습니다.

최소한 노력을 하겠습니다.

도우소서.

친구로서 사랑받기 원합니다.

주님의 친구로서 사랑 받기 원합니다.

도우소서.

도우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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