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하나님을 노래하다( 엡1:1-6 ) 본문
제 1 장 ( Chapter 1, Ephesians )
주님.
내
마음을 바치나이다.
받아주소서.
찬양으로 드립니다.
들어주소서.
은혜와 평강과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절
어루만지소서.
아름답게 보아 주소서.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현재.
그것을 믿는가?
믿는다.
흔들리지는 않는가?
흔들리지는 않아진다. 점차로..
흔들렸거나 믿지를 못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 같은 자를... 이다.
현재의 처지가 맘에 들지 않음도 있었다.
믿는 것과 믿지 못함의 차이는?
믿는 다는 것은 내려놓을 수 있음이다.
그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든든한 자유함이다.
내려놓음의 자유는 '평강으로의 飛上'이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가벼워져 날아오를 듯한 평안함이다.
진리이신 주님을 믿음은 그 끝이다.
궁극이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아버지. . 우리 아버지.
그 분의 은혜와 평강.
그 은혜와 평강은 '평강으로의 비상'의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얼마나 크고 깊을 지는 눈치만 채고 있다.
눈치를 챔 만으로도 일생을 걸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놀라운 평안함.........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기쁨.
그것이 무한대로 확장됨을 어찌 표현할 수 있는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겨우, 이 땅에서의 가치와
투쟁과 아둥바둥으로서 얻어지는 약간의 포획물 - 재산, 학벌, 자식, 성공... - 인
그 상대적인 우월감의 또다른 표현인, 자만감이나 일시적 우쭐감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다.
세상적인 것은 모두 '반대급부'가 있다고 했다.
주님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땅에서의 성공엔 일반적으로 육신을 깍아먹는 workholic의 어려움이 있다.
만족의 반대편에는 그렇지 못한 분들에 대한 묘한 승리감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기쁨이다.
반대편에는 악한 쾌감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다.
심지어는 봉사하는 근본 마음의 반대편에는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 묘한 승리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아주 적지만..
어제 작년에 캐나다를 같이 다녀온 K선생님 부부와 식사를 했다.
좋은 동네에서 사시는 분들.
선하신 부부들.
이야기 중 그 동네에 너무도 많은 최고- 학벌, 재산, 가족력 중 하나라도 달리는 분들은 조금 불쌍히 여겨지는 동네.ㅎ -로 달리는 분들에 대한 열등감과 상대적 빈곤감이 나왔다.
이야기를 들어가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하여 돌아보았다.
의사이고 적당한 물질을 가진 나이지만
S대를 나오지 못하고
자식의 교육에도 그리 성공하지 못하고
빵빵한 가족력도 있지 못하는 나.
그런 환경에 나를 가져다 놓으면 난 어떠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평안함으로 살 수가 있을까?
소위 '품위 유지비'가 뛰고 경제적으로는 더 쪼들리게 되고
마음의 평강은 잃어 버릴까?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잠시 돌아 보았다.
그리 열등감이 심하지는 않다.
예전처럼 흔들리지는 않는다.
실은 안그런 내가 슬그머니 기뻐지려고도 한다.
잘나가시는 그 분들이 날 안타까이 ^^;; 보아도 예전처럼 속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
그냥 지금처럼 봄의 양광을 즐겨가며
그 최고의 아파트 단지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사진도 찍고 하늘을 올려다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가끔은 속을 찌르고 들어오는 나보다 훨씬 수준 높은 분들의 눈빛에
쩌르르하고 가슴이 아플 것 같기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빨리 아픔이 없어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온전하지는 않다.
아직 온전히 주님의 은혜와 평강 속에서 머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지만, 난 곧 그리될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난, 찬송하는 자다.
주님을 열렬히 찬송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의 찬송에는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 찬송은 힘이 있다.
내 찬송은 가슴을 흔드는 영적 눈물이 있다.
내가 들어도 난 내 찬송이 좋다.
그것은 내 자랑이 아니다.
난, 하나님을 기뻐하기에 그렇다.
하나님이 그 분을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난 그 분을 위하여 세상의 일정의 것을 내려놓았기에 그렇다.
찬송을 할 때마다 난 하늘의 속한 기쁨을 아주 조금 눈치 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의 '아주 조금'으로
내 어리석은 영혼을 터치 하실 때마다
난 감동으로 펄쩍 뛴다.
그때마다 내 찬양은 열렬한 감동으로 토해진다.
정말이다.
토해진다.
그때마다 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깊이 느낀다.
찬양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찬양할 때 더 뚜렷이 표현되어 느껴진다는 이야기다 .
어제는 '진료과장회의가 있는 화요일이다.
그 점심시간에 얼마전 부터 약속되어 있던 호스피스 병동의 찬양이 있어
무거운 기타가방- 내 것은 하드케이스라서 무겁다..ㅎ- 을 들고 3층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올라갔다.
회의시간을 잠시 빼먹기에 초조했고 어제 고백한 대로 쑥스러웠지만
찬양은 정말 뜨거웠다.
아내 -봉사자 ! ㅎ-가 그런다.
너무들 좋아하셨다구..
찬양하던 호스피스 봉사자들 모두가 찬양에 취해서 눈을 감고 감동으로 불렀다고...
이제 더 바라는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spiritural blessing), 영적인 축복을 넘치게 주시길 원한다
더 이상의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원한다.
가진 자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그들만의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도
부러워 하지 않고
못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의 한으로 더 영적 매진을 하여
나보다 훨씬 높은 영적 성화를 이루는 것도
그리 부러워 하지도 질투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냥 난 내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영혼의 기준으로 삼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사는 선택과 약간의 노력을 하면서
주님이 허락하시는 영적 축복을 받아
내가 발할 수 있는 최선의 찬송을 불러 드릴 수 만 있기를 원한다.
결과는 다 주님이시다.
주님이 성화를 시켜 주실 것이다.
그마져 내려 놓는다.
난, 내 삶에서 찬송을 불러드릴 뿐이다.
주여.
복 주소서.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거저 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나에게 퍼부어 주소서.
사랑하시는 자로서의 나를
확실히 인식하고 누리리다.
그 누림을 찬송으로 표현하리다.
기쁨과 터져나오는 감동을 견디지 못하여
제 목소리를 들어 찬미하리다.
내 삶의 태도를 바꾸어 찬송하리다.
내 표정을 바꾸어 찬양하리다.
주님의 영광 만이 내 삶속에서 들어나는 유일한 이유가 되게 하소서.
적용
1. 연휴다.
내일 부터 당직이다.
오늘 오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을 어찌 지낼까?
육신이 만족하는 대로 살까?
식구들과 식사나 하고 영화나 볼까?
세상적으로 맞다.
영적으로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혼자 도피해서 주님만 만날까?
주여.
어찌 하는게 옳은 당신의 자녀의 모습입니까?
복잡하다.
남들은 단순한데.ㅎㅎ
2. 찬양을 부른다.
아들과 성경 읽기전 부르고 또..
연휴에 찬송 부르는 공연장을 갈까?
예술공원에서 찬양할까?
어찌할까요?
제 마음대로 안하게 하소서.
3.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늘에 속한 복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묵상이나 은혜 가운데 체험하는 흔적 정도가 아닌...
바울님이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예수님,
그 확실한 복을 맛보고 싶다.
이제는 막연한 자제와 도덕적 규범 속에서 제한된
복에 대한 나의 개념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뚜렷한 말씀을 듣고 싶다.
부족한 믿음인가?
한계를 건너가고 싶어하는 간구인가?
신령한 복을 받길 원한다.
나에게도 그런 복을 주소서. 주님...
4. 성경 일곱 장 읽겠다.
아들과 열심히 읽어간다.
읽는 것 자체는 별것 아닌 듯 하지만
그 말씀이 내 영혼과 아이의 영혼에 틀을 잡으시길 간절히 바란다.
모든 원리의 중심에 주님이 있음을 고백하는 삶이 되길바란다.
5. 내 모든 형편이 주님의 뜻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인식한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과는 다르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받아 들이되
주님의 말씀 가운데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체념'과는 다르다.
희망 중 기다리자.
인내하자.
기뻐하자.
참자.
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모든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
앞으로의 있을 모든 것도 다 아시는 주님.
그냥 그 주님께 맡깁니다.
맡기고 불평없기를 소원합니다.
그리 되게 하소서.
기쁨으로 하루 하루 맞이 하게 하소서.
다가올 변화에도 그냥 받아 들일 버퍼를 허락하소서.
그 변화가 좋든 나쁘든 그것도 주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게 하소서.
머리 속의 개념이 아니라
영혼의 확신이 되게 하소서.
주여.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제 찬양이 주님의 하늘의 복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시되
주여 저로 찬양의 자리를 좇지 않게 하소서.
내 하루의 삶이 찬양이 되게하소서.
그 찬양이 무조건 주님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주여.
전 그리되게 하소서.
어떤 상황이든 찬양하시라면 하게 하소서.
목소리든 삶이 되든
내 움직이고 발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되게 하소서..
이게 마음의 장난이 아니고
그것이 절실한 내 영혼의 목표가 되게 하시고
한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사단이 절 흔들어 '네가 과연'..하지 않게 하소서.
태우소서.
성령의 불로 그리하소서.
그냥 온전히 주님의 주시는 하늘의 복으로 절 채우소서.
신령한, 영적인 축복으로 절 채우소서.
그리하여 흔들림이 없도록 하소서 .
제가 가진 달란트로 주님께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특별히 오늘 부터 연휴입니다.
제 삶이 주님의 시간과 분리되어 살도록 권유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오늘 하루를 현명히 보내는 시간이 될까요?
가족에 시간을 할애하는 세상의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될까요?
저 혼자 영적 추구를 하는 자가 될까요?
같이 하면서도 영적인 시간이 되게 하소서.
어떤 모습이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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