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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의 5인 (막 2:1-12 )

주하인 2011. 1. 5. 10:29

제 2 장 ( Chapter 2, Mark )

 

 

저렇게 위험한 공사장이었을까요

아마 아닐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들 운명의 공동체는

더 높아도 옥상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득한 사랑과

열렬한 믿음의 결과로

그들은

매화 꽃 만발하고

폭죽터질 듯한

하늘 나라의 축제를

이루어 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온전한 치유와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이유로

예수님 앞에서 진을 치다.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어떤 사람도 '절박한 이유'로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왔다.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나름의 이유에 의하여

절박한 이유가 막히었지만

절박한 이유의 사람들은 '뚫고' 예수께로 나갔다.

 

 예수계신 곳 지붕을 뜯을 때

먼지와 어쩌면 위험한 돌덩이도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질 수도

그들이 다칠 수도

모양새가 심히 안좋을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절박했다.

예수 아니면 그들은 고쳐질 수 없음을 확신했다.

'절박한 확신의 믿음'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이유에서든

장해를 뚫고

예수께로 나온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고쳐 주셨다.

'믿음'을 보셨다 한다.

 

 절박한 믿음.

절박한 사랑.

내 일 같이 최선을 다한 네명의 사람들과

그들은 내 일같이 최선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절박하게 묶을 수 있는

중풍병 환자의 '인격'과

그들 사이에서 이어지는 '절박하고 절실한 확신'과

그 순간에 깨달아지는 지붕을 뚫을 지혜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한가족 같은 끈끈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하여져

'믿음'으로 이루어져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게 된 것이다.

그러니

절박한 믿음들..이 주제인 듯 싶다.

 

 나는 예수님을 절절히 사모하던가?

솔직히 절절히 사모하지 못함을 깨달아

더욱 더 사모하는 연습ㅜ.ㅜ;; 을  하고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 십자가 통해 내가 천국의 백성이 되었음을 절절히 안다면

난 늘 '감사'하는 삶이 될 것이고

현실의 지엽적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며

내 삶은 겸손의 향기, 예수님의 향기로 그득할 것을

돌아보면

이전보다는 너무 좋아지긴 했지만 - 실로 이리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도 발전이긴 하다 ^^* - 그리

뚜렷하지 못한 것이 맞긴하다.

간헐적인 '감사' 와 비교적 '안정감'.

더욱 사모함이 필요하다.

어쩌면 난 군중 사이에 끼어든 자 정도는 아닐까 싶다.


 내가 저런 절박한 믿음을 가진 자로 가정한다면

과연 나를 막아서는 '군중'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든, 단지 구경 군이든 간에 

그것은 영적으로는 어떠한 의미가 될 것인가?   

'믿음 부족'

아직도 의혹이 많은 것은 내 속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합리를 가장한 이 세상의 교만함이 있는 듯 싶다.

그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믿음 ' 부분에서 어느 정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환상과 실제의 구분하기 힘듦에 대한 힘빠짐.

그러나,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존재할 것인 것임을 당연히도 생각한다면

그 존재의 본질로 성경에 나타나 확증하시고

이 혼란하였던 영혼에 증거를 자주자주 보이시며

당신을 확증하셨던 것을 어찌 믿지 못하던가?

이 믿음 부족은 '믿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상처'다.

눈치 살피는 버릇이다.

약화 되었다고는 하나 본성이다.

군중의 무리에 눌려 숨도 못쉬는 가슴 떨리는 연약이다.

 지혜 부족이다.

 세상에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은 육신적 성향이 강함이다.

그것들을 타고 사단이 '날 붙든다.'

 

 나에게 '네 사람'은 누구가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나에게 있을 것인가?

' 공동체'

영적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모임은 물론 많다.

그런데 그들과 저렇듯 깊은 교감은 없음이 맞다.

그것은 내 문제다.

누워 있는 중풍병환자의 자식이 그들이든,

평상시 잘해주었던 주위 사람이든

그 네 사람은 그 환자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듯 최선을 다하여 군중을 뚫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뭉친 공동체가 된것이다.

 

 믿음의 정도다.

그들은 다소 무모할 정도로 예수님의 계신 지붕을 뜯었다.

그 집안의 주인에게 다소 무례를 끼치면서까지..

군중을 놀래킬 기발한 행동을 하면서 까지..

아마도 내가 이런 행동을 생각하면

난 오금이 저려서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 일을 비슷한 상황에서 나에게 적용시킨다면

나는 과연 어찌 반응할 것인가?

 아마도 '옳지 못한 믿음' 이니 어쩌면서 질타를 했을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추석 즈음에

깊은 trauma가 될 뻔한 일이 우리 가족 내에서 있었다.

 나.

나름으로는 영적으로 얻은 것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때의 상황 같은 무모한 상황을 '영적'으로 바라보면

어쩌면 저들의 저런 행동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반성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난 '군중'의 표준에 어긋나는 그 행위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난 그 일이 예수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거나

나에게 한번도 절박하게 다가온 상황이 아니어서

비록 그런 상황에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난 내 자신에 대하여 깊이 깨달은 게 있다.

'내가 더 손해 보아야 겠다.'

'그동안 내 삶은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는 않되 손해보지도 않는다.'는게

내 삶의 모토 처럼 깊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타인 뿐 아니라 내 가족에게도 은연 중에게 나타났던 모양이다.

이것은 정말 미련한 일이 맞다.

힘이 있을 때는 내 주위에 어쩔 수 없이 있을지 몰라도

힘빠지고 나이 들었을 때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인지 상정아니던가?

더구나 성경에서는 늘 '긍휼'을 말씀하신다.

타인을 위한 '이타주의'가 성령의 원하심이다.

예수님은 타인인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로 인하여 난 그 분과 하나될 기회를 얻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

네 사람은 '중풍병자' , 그 힘없는 사람에게 다가와

전력을 다하여 지혜와 사랑과 열심을 다하여

그들이 믿는 바를 행했다.

배울 바가 많다.

 

 주님이 사랑하라 하신다.

주님은 사랑이시다.

그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라.

그들은 그 사랑으로 날 사랑하게 될 것이고

내 아픔을 통하여

예수님께 깊이 다가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세상이 이해하질 못할지라도

예수님으로 강하게 하나가 되면

현실의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승리가 아니겠는가?

주님을 뵈올때

처절히 세상을 살면서 '사랑'으로 승화된 '믿음'을 이루어 냈다고

칭찬 받게 될 것 아니던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에 비치이실

잔잔한 미소가 눈에 그려진다.

그들을 먼지 내리게 했고

돌덩어리 가루 머리에 맞게 하시고

눈에 티끌들어가게 했다고 질타하시지 않으시고

누워서 바라보는 '중풍병 환자' 분의 눈에

티없이 맑고 흡족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그득히 들어 왔을 것 만 같다.

아마도 그 얼굴, 그 눈을 뵙는 그 환우의 마음은

폭포수 처럼 밀려드는 '성령의 충만함'이 느껴졌을 것이고 

표현할 수 있을 런지는 모르지만

그 영혼에 폭죽튀듯 강렬한 평강의 느낌이 샘솟았을 것이며

그 머리속에 '승리했다'라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맴돌았을 것 만 갔다.

그리고 네 사람이 들고 왔던 그 침상을

번쩍 들고서 나갈 힘이 온 전신에 용솟음 쳤을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감사하다.

 

 

적용

1. 타인에게 잘하자.

 긍휼은 하나님의 기본 명령이시다.

 남을 긍휼히 여기자.

 

2. 남을 긍휼히 여기려면 내적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의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그런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자.

 

3.  네 사람으로 대표되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람 숫자는 무의미하다.

 영적으로 하나된 믿음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분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결심과 선택과 기도가 필요하다.

  '실크로드'를 위해서 기도하자.

 이전에 뜨거웠던 것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서 영적 경건성이 더 배가 되길 기도하자.

 

4.  예수님 만이 내 삶의 목적이다.

 주님께 진정한 누가 되지 않는다면 ,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되어야 만 한다.

 그 분을 깊이 만나면 인생이 힘이 있어진다.

 지엽적 문제들 다 해결된다.

 힘이 있어진다.

 

5. 비아냥이나 소리는 '군중'이다.

 그들은 미련한 존재들이다.,

 개인적이 아니다.

 군중으로 모이면 미련한 다수가 되기도 한다.

 다수의 소리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기도하면 하면 된다.

 

6.  2011년은 공동체의 삶을 至向해 보자

 기도하자.

 주님 원하시면.....

 

7.  성경 세장 읽자.

 

 

 

 

기도

 

 주님

아침 묵상에서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특별 새벽기도회 나갔습니다.

아침에 설교 말씀 중 특별히 공동체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연가시'와 '가시고기'에 대한 예화도 있었습니다.

기생하는 연가시와 희생하는 가시고기...

희생하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대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저...오늘 그것을 묵상하길 원합니다.

깊이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나를 막아서는 어떠한 생각이나 오류들이나 세상의 소리들을

불구하고 그것이 옳은 것이기에

지치지 않는 마음을 저에게 허락하시오소서.

주님.

간절히 비옵건데

제 주위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흘러나오는 제 사랑으로 감동한

영적 공동체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고

예수님을 위하여 전부를 다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를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저 ..

많이 부족합니다.

우선 그런 가운데서 그들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아량이 부족합니다.

오래된 습관이 그랬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에서 풀려가오니 주님 절 온전히 바꾸소서.

절제하고 정확한 자보다

사랑 많고 이해하는 풍성한 자.. 손해보는 자로 만족할 수 있게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적을 경험함도 허락하사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축복을 허락하소서.

저에게

제 가족에게

세상 모든 선하게 믿는 자들에게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연가시 ))--------------

 

사마귀몸속에 살고있는 충 - 연가시

 

사마귀를 잡으면 사마귀의 뱃속에서 실처럼 생긴것이 기어나오는 경우가 자주 있죠..

거의 대부분 나온다고 봐도 될 정도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실처럼 생긴 생물은 연가시 라고 합니다.  이 연가시는 생물의 분류학적인 입장에서

봤을때 기존의 어떠한 동물과도 연관성이 없다고 합니다.  그냥 선충류의 한가지라고만

알려져 있는 아직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생물 입니다.

 

연가시의 알이나 유충은 주로 물에 사는데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곤충의 몸에, 특히

사마귀의 몸에 잘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사마귀의 몸에 들어간 연가시는 길게는 거의 1m정도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마귀의 몸속에서 성장을 한 연가시는 곤충의 신경을 자극해서 물가로 이동하게 한다음 곤충을 물로 뛰어들게 한다고 합니다. (글쎄요... 믿어지지 않는군요...-_-ㅋ) 이렇게 곤충이 물에 빠지면 연가시는 숙주의 몸에서 나와 물속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연가시는 물밖 공기중에 노출이 되면 금방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란을 하거나곤충이 수명이 다할때쯤이 되면 곤충을 자극해서 물가로 가게 만든다고 하니 정말로

무서운 생명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네마토모프(Nematomorph) 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욕타임즈에서 이 생물에 대해서 대서특필한적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사마귀나 베짱이등의 육식을 하는 곤충류에게서 주로 볼수 있는 기생충으로 보여집니다.

 

앞으로는 물에 떠있는 사마귀나 메뚜기류는 절대로 잡지 말도록 하세요...^^;

 



연가시 입니다. 실같이 보이지만 살아있는 생물 입니다. -_-ㅋ

 



연가시가 메뚜기류의 몸을 잠식한 그림입니다. 연가시에 의해서 침입을 받은 메뚜기는

몸안에 온통 연가시뿐 이라고 하네요...

 

엠파스 사전

연가시 : 연가싯과의 선형동물. 몸길이 90cm가량으로 실같이 가늘고, 몸빛은 검음. 유충은 물에 사는 곤충에 기생하다가 다른 곤충(사마귀)에 먹히어 그 체내에서 성충이 된 뒤 빠져나와 민물로 돌아옴. 기생된 곤충은 생식 능력을 잃음.

위키백과

유선형동물 : 유선형동물(類線形動物)은 연가시라고도 한다. 메뚜기 또는 귀뚜라미 등의 곤충의 몸에 기생하는 선충의 일종. 성충이 되면서 기생충으로부터 수생 곤충이 되면서 자신의 생활환경인 물가로 자신의 숙주의 뇌를 조종하며 심지어 숙주로 하여금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게 한다고 한다.

 

먹이사슬 통해 숙주로 이동, 신경 단백질 배출로 숙주의 행동에 영향 일으켜

발표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연가시(네마토모프)는 물속에서 수십만개의 알을 낳는데 물속에서 일정시간이 경과된 알이 부화된 후 육지로 이동하고 주변의 풀에 달라붙게 된다고 합니다. 그후 메뚜기 여치같은 초식 곤충이 풀같은 먹이를 먹는 과정에서 연가시의 유충이 체내로 유입된다고 합니다. 또한 대표적인 숙주의 하나인 사마귀는 메뚜기, 여치 같은 초식성 곤충을 잡아먹음으로써 연가시가 체내로 유입되게 됩니다.

숙주의 몸에 자리잡은 연가시 유충은 숙주가 섭취하는 양분을 먹고 자라게 되며 충분히 자란 성충은 다시 알을 낳기 위해 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연가시는 수중생물로 물밖에 끄집어 내면 수분내에 죽게됩니다. 그런데 숙주인 메뚜기나 사마귀 같은 곤충은 스스로 물속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이때 연가시는 숙주의 체내에서 특별한 신경전달물질(단백질류)을 배출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뚜기의 중추신경계에 반응하여 이 영향으로 숙주인 메뚜기가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들게 되고 연가시는 곧바로 숙주의 몸을 뚫고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연가시에 감염된 곤충이 물속에 뛰어드는 모습과 직후 연가시가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모습. 연가시가 빠져나온 숙주는 이내 죽게된다고.(출처:뉴사이언티스트)

 

연가시는 수중생물로 물밖에 꺼내놓자 불과 몇분만에 죽었다.


 
연가시가 서식하고 있는 하천. 계곡형 하천으로 오염이 없는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인체감염과 위험성에 대한 연구,조사 없어

기생충의 일종인 연가시가 인체에 감염되는지 여부와 위해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연가시가 분비물을 통해 숙주를 조종한다는 이번의 연구결과도 전세계에서 유일한 연구자료 입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세밀한 연구,조사가 뒤따라야 할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지난 2004년 대한기생충학회 학술대회시 경상대의대로 부터 보고되었던 인체감염사례가 있었는데 이번에 발표된 연가시(Hair worm)와는 다른 신종으로 '진주철선충(Parachordodes megareolatusn. sp.)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경남 산청군의 한 여성(77세)에게서 3마리가 배출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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