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밴댕이 소갈딱지 해결법(시 37:1~20) 본문
2007-03-13 시편 (Psalms) 37:1~37:20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속이 자주 뒤집혔던 벤뎅이 속아지- 소가지? 소갈 딱지? ... 어쨋든 어릴 때 부모가 나한테 잘 표현하셨던 충청도 사투리로서 난 내가 벤뎅이인줄 알았었다. 한동안..ㅎㅎ - 였던 나는 화가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스스로 위안을 삼아야할 필요가 있어서
'아니다.
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직한 자...'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했었다.
그런 나에게는 남들의 잘못은 즉각 시정되어야할 상황으로 인식하고
불평과 투기 - 예수님 믿기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투기라니... 그러나... 투기 맞았다.ㅎㅎ-가 날 지배하는 주된 행동 양식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야 하고 고쳐서 세상을 올바르게 나가게 해야 할 강한 의무가 나에게 있다고 믿어 왔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지적인 육체적인 능력이 따라 주었기에 남들이 따를 수 밖에 없는 카리스마로 통했지만 나이가 점차로 듦에 따라 이런 행위는 세상에서 그리 포용 받지 못할 불평자의 모습이 다름 아녔다.
그러다 보니 속은 자주 뒤집히고 세상이 불의로 치달리는 것을 직접해결할 수 없음에 좌절까지 겹쳐졌다.
그것은 크게 사회를 향한 것 뿐 아니었다.
가까운 식구들에게도 끄떡하면 화를 내고 고치길 강요하니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실은 힘이 든 사람은 상대 뿐아니라 내 스스로 더욱 더 그랬다.
자존심이 상하고 외로워지며 사람들에 대하여 미안함이 많았었다.
세상 끝도 없이 교만했던 자가 의사로서 일취월장하지 못하며
현실에서도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일들이 하나하나 벌어지면서
속은 말이 아니게 타들어 갔다.
모든 걸 내가 해야 하는 데 못하니 해결할 방법은 담배와 다른 대체물 들이었다.
혈압은 뛰어 올라가고 기관지는 숨이 답답하고 목이 찢어지는 듯 아파도 멈출 수가 없었다.
육체라는 '공' 안에 스트레스 '바람'을 쉬지 않고 집어 넣어 마치 폭팔할 듯한 지경까지 왔었다.
그러다가 38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반 이상 바람이 감압되는 대 역사가 순간에 일어났지만
40년 가까이 해왔던 삶의 기본 기조가 하루 아침에 멈출리는 없었다.
기도 만 하면 그리 평안할 수 없는 마음이 세상에만 나오면 또 또 또...
그러다가 큐티를 시작하게 되면서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하나 하나 쌓이고
잘못된 생각들을 녹여서 융합해 가시면서 또 한번의 '감압(減壓)' 이 이루어져 갔다.
그러면서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어려운 삶의 이유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고 모든 걸 내가 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탓이었다는 것을...
묵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기 시작하면서 부터
그때마다 살아 운용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흔적,
어떤 때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손길,
순간 순간 아버지처럼 즉각 말씀으로 잡아주시는 체험들이
큐티로 깨닫는 것과 더해지고 나서야 점차로 많은 부분을 주님께 내려 놓게 되었다.
그러자 , 평안이 나를 사로잡는 시간이 점차로 많아졌고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효율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서서히 인정 받게 되었고 현실적으로도 많은 부분이 풀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아직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마치 장이 부분적으로 막혀서 소화가 잘 안되는 것처럼..
고속도로 병목현상 처럼...
그게 아직도 가끔은 튀어나오는 '분노'였다.
그때 내 속을 보면 '저것은 그냥두고 보면 안될 것이야.'.. 라는 생각들의 밀림이고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질투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걸 아시는 주님은 다시한번 오늘 구절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신다.
"눈에 보이는 악한 자들의 풍성함과 푸르름과 싱싱함은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마를 것이고
베여지면 금방 없어지는 채소와 같다.
그것들과 상관없이 그냥 소원을 아뢰고 맡겨라.
그리고는 그냥 선을 행하라.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 분을 의지하면 그 분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 너의 의를 밝히실 것이고 너를 들어내 주실 것이다.
그냥 주님 앞에 나와 아뢰라.
그러고 나서 그냥 잠잠히 기다려라 .
그 분이 이루시는 것을 목도 하리라. "
문제는 맡김이다.
지금까지 나를 단련시키고 연단시키시며 여기까지 이루어 오신 그 원리대로 상당 부분 주님께 맡기는 연습은 되어 있지만 아직도 내가 모르는 깊은 내적 부분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처로 인하여 맡기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묵상 구절을 버스 안에서 서서 읽어 보면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37절은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시편 구절이다.
거기에서 오늘 따라 걸리는 부분에 대한 단어 몇가지를 캐취하였다.
'나의 소원'
'나의 길'
맡기면 이루어 주시고 기뻐하면 이루신다고 하시지만
솔직히 난 깊이 소원과 내 길에 대하여 아직도 잘 모르겠다.
특별히 중년을 넘기면서 다양한 삶의 가치와 능력과 육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더욱 더 혼란 스러울 때가 있다.
세상적 성공에 대하여 내 욕심 부분을 돌아 보면 그리 부럽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사도 바울처럼 , 귀에 들리는 대단한 선교업적의 그 분들이 귀하고 부럽기는 하지만 아직도 나에 대하여 적용시켜보면 그리 큰 길이나 열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아직까지는이다. 가능성은 열어 놓았다. )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간다.
진즉에 예수님 영접하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든다.
이처럼 소원과 길에 대하여 생각하려다 보면 스스로 걸리는 부분이 많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침에 묵상집을 펼쳐들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탄 버스 안에서 -자리가 없었다 ㅎㅎ- 한 손으로 흔들림을 겨우 억제하며 들여다 보면서 묵상한 소원과 길에 대한 주님께서 주시는 생각은 이렇다고 생각되어진다.
남에대한 관심과 그들 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내 소원과 길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깊이 내 속에 받아들이고 평생의 내 소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런다음 그것을 내려 놓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면 그 분이 크게 이루실 것이다.
비단 업적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런 과정 자체를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 과정에 축복을 내리심이 바로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 가는 삶의 행복이 아닐까?
특별히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잠잠히 기다리자
오늘은 생각이 많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이것 보라.
나에게 대한 말씀이 이래도 아닌가?
그분은 확인해 주신다.
꼭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신다.
노를 참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내쳐 던져 버리라 하신다.
결단의 던짐을 필요로 한다 .
불평도 말라 하신다.
오늘
보험회사와 연락이 있을 것 같다.
속상함이 앞서려지만 주님은 알고 말씀하신다.
쉽지는 않을 듯 하지만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는 말씀을 깊이 명심할 것이다.
16.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이 구절도 괜히 눈에 들어온다.
적용
1. 불평하지 말자
분노를 내지 않을 것이다.
2. 온유할 것이다.
3. 기다릴 것이다.
4. 오늘 묵상 구절을 외울 것이다.
5. 나의 소원과 길에 대하여 묵상하겠다.
6. 저녁에 교회에 가겠다 .
기도하고 잠잠히 기다리자
기도
주님
속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조금 더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삶을 허락하소서.
분노와 질투와 억울한 마음 등 선하지 못한 것들 주님께 내려 놓기를 결단하오니
주여 도우소서 .
주님 오늘 또 하나
내 소원과 빌어야할 길에 대하여 비오니 주여
이 중년이후의 삶을 인도하소서.
예수님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수 있길 소원합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중보와 남을 위한 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인정하고 나를 존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원함과 길에 대한 생각 조차 주님 앞에 내려 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주여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하소서.
온전하신 우리 주님이 날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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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댕이 소갈 딱지에 대하여 ( 펌)
밴댕이
청어과의 바다물고기, 몸길이 50 cm정도이며 모양은 전어와 비슷함....책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도 50cm되는 밴댕이는 보지 못했읍니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
맛이나 모양에 관계없이 속담에 생선 이름이 들어가면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가 부여 됩니다.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식 두들켜 패야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두기가 시킨다, 질기기가 고래힘줄 같다...등. 하지만 이들보다 훨신 더 악랄하고 억울한 경우가 바로 "밴댕이 소갈닥지 같다"라는 말입니다. 화 잘내는 사람,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생선 밴댕이, 대체 밴댕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토록 고약한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을까요??
다들 아시죠!! 다른 속담에서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밴댕이 자신은 아무죄가 없읍니다. 밴댕이는 그저 청어目, 청어科에 속하는 경골어류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밴댕이의 속이 유난히 작고 좁은것도 아닙니다. 물론 밴댕이의 내장이 그다지 큰편은 아니지만(열어보지는 않았음), 어미고기의 몸길이가 그저 15cm 안팍이고, 그나마 무언가에 납짝 눌린듯이 납작한 체형이니 내장이 지리잡을 틈이 없을것 같은 생각은 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던 이유에서 밴댕이는 속좁은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어을가요??
밴댕이는 성질이 급한 나머지 그물에 걸렸다 하면 바로 죽어 버리거나, 한번 펄떡 뛰었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즉사하고 어던것은 그물에 스치기만 해도 죽어나갑니다(이것또한 직접 경험하진 못했고 그냥 들은 이야기임). 이처럼 성질이 급한 밴댕이를 두고 소갈닥지 같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고 하는데...그래도 밴댕이는 억울할 것 같읍니다. 밴댕이는 그저 섬세하고 약한 물고기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그런 생태를 보고서는 성미가 급하다느니 속이 좁다느니 하면서 오명을 뒤집어 쒸운 것입니다.
평판은 안좋아도 맛은 그만..
주로 낭장망을 이용해 밴댕이를 잡는데(낭장망을 잘 모르시면 질문요함)밴댕이라 해서 다 같은 밴댕이가 아닙니다. 깊은데 사는것은 크기가 크지만 살이 물러서 주로 젓가을 담그는데 사용하고, 얕은 데 사는 것은 크기가 작은 대신 맛도 좋고 선도가 오래가기 대문에 주로 횟감으로 이용 됩니다. 횟감으로 쓰이는 밴댕이는 배에서 하역된 다음 바로 얼음을 채워서 보관해야 선도를 �할 수 있읍니다.
속좁은 생선으로 낙인직힌 것은 꽤 오래된 일이지만 밴댕이가 회나 젓갈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부터 입니다. 수협의 우판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천대받던 밴댕이가 냉장기술의 발전과 맛으로 뒤늦게 진가를 인정�고 있읍니다. 특히 밴댕이는 육젖과 액적 모두가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육젖의 경우는 여느 젓갈처럼 바로 양념을 해서 반찬으로 먹기도 하고, 김장을 할 때 통째로 다져 넣기도 합니다
인천의 연안부두에 가면 밴댕이 전문횟집이 많이 있읍니다. 건물한채가 온통 밴댕이 횟집이죠.주메뉴는 밴댕이 회무침과 밴댕이 회 입니다. 그간 죽~~ 밴댕이는 쉽게 상하고 젖갈이나 담그는 생선인줄 알다가 밴댕이 회무침과 회를 먹고나서는 아~ 그맛 , 맛있읍니다 특히 소조하고 곁들일때는..
특히 요즘은 냉장기술로 사시사철 먹을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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