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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위하여(막5:32-43) 본문

신약 QT

믿음을 위하여(막5:32-43)

주하인 2015. 1. 17. 09:55

35.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40.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회당장'은 딸이 죽을 위험지경을 보고

망연 자실한 상태로 예수를 찾았다.

 예수 만이 치료할 수 있을 '실'같은 희망을 가지고 왔다.

실같은 희망은 '절망'이 훨씬 커서 앞이 깜깜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은 온통 답답함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앞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는 딸을 살릴 소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사람 들이 몰려와 딸이 죽었음을 알렷다.

실이 끊어지었다.

더 이상의 소망은 그에게 잇을 수 없었다.

절망이다.

끊을 絶, 바랄 望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신다.

' 두려워 하지 말고 '

 ' 믿어라'


더 이상 믿을 희망이 없다.

어둠은 폭풍우가 치고 비바람 불다가

차가운 한풍이 불어 얼어 붙은

북극의 그것이 되고 만다.


그것.

누구도 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이다.


믿음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믿음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은

'안될 것이다'라는 확신, 즉 부정의 믿음을 뚫고

'될 것이다' 라시는 '긍정', 궁극의 긍정의 믿음을 믿는 과정이다.


우리가 살면서

너무도 당연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소리,

'죽은 자는 살 수 없다'라는 소리를 뚫고

' 믿어라' 시는 소리를 믿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이고 당연한 소리인가?

어느 것이쉬운가?

더구나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정의 소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 만들어졌다 한다.

그러기에 '긍정'의 소리

예수의 소리를 듣는 것은

두려움을 초래한다.

거기에

무리의 비웃음이 더해진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을 믿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부정적인 것에 쏠리는 경향을 지닌

큰 무리들이

'긍정'의 소리,

죽은 자가 살수 있다....

그것도 믿으면 살 수 있다는 소리들을

비웃어 누르고 있다.


본능과 자연적인 것을 물리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대단한 자기 파괴인가?
그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믿으라'를 넘어선

'믿기만 하라' 라 하신다.


그 분은 믿음에

설명이 필요치 않음을 아셨다 .

예수님은

'지금부터 회당장 너의 집에 가서

딸을 살리고 밥을 먹이는 데

사람들이 쫓아오면 .....우리만 들어가서

딸을 어떻게 어루만지면

딸이 몇초후에 깊은 숨을 들이쉬며서.,,

놀래지 말거라.. .믿어라.. " 하지 않으셨다.


그냥 믿기만 하면.... 이라 하셨다.


부정을 누르고

긍정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경험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나란 의식을 형성하게 해온 모든 경험들을 누르는 것은

수많은 비아냥이 따를 것이고

안되면 그대로 '딸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당장'은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쫓았다.


그렇다.

믿음을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나쁜 결과가 생길 것을 아는 것을 부인해야 하는 용기,

비아냥을 극복하는 용기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어라'시고 금방 증거를 보이지않으시며

시간을 끄셨다.

그 끄는 시간 동안의 '기다림',

살이 타고 피가 마르는 인고의 시간들,

예수님의 시간에 이루어질 것을 위해

기다리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오늘나에게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일까?


아내와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며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해 많은부분 회복이 이루어지고

엄청나게 많은 선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지만

장래를 보면

또다른 답답함이 있다.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기도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보면 ....

기도의 제목이 뚜렷지 않다고 한다.

실은 아내는 '아들의 전공인 IT'와 상관없이

아버지 뒤를 따라 '의사' 되게해달라는 기도를 오래 하다가

얼마전 에 '알아서 하소서.' 하면서 기도를 바꾸었다.

그 기도 만 빼고

나머지 기도는 엄청 많이 이루어진 한 해 였지만

이제 앞으로 더 뚜렷한 기도의 방향에 대하여

걱정하고 답답해 하고 있었다.


나...

의사를 시켜달라는 기도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한다.

그 방향을 통해서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혹여 아내의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내를 위해서이든,

아들이 지금은 아녀도 (나이들어 의사로 전공 바꾼 의사들이 아주 .. 많다. ) 나중에 그리될 수도

그런 아내의 기도를 받아

과정을 바꾸어 다른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실지

어찌알겠는가?

어쩌면 기도의 방향을 틀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하고 답답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즉, 조금은 믿음이 부족하여

덜 바꾸어진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아내의 덜 완전한 믿음을 기다리시면서

지금 이 시기에

아이의 원함과 환경과

지금과 같은 상황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목표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


문제는 '예수'의 말씀을 더 깊이 청종하는 게 우선이고

그래도 같은 기도 제목이거나

다른 뚜렷한 방향이 있으면

의심을 하지말고

전혀 다른 이야기( 의사.. )일 지라도

지금처럼 '의혹'으로안절부절하지 말고

믿어야 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함은 아니실까 싶다.


오늘 주시는 레마는

'두려움' 이다.

믿음은 용기다.

그 믿음이 뚜렷하려면

말씀을 더 깊이 청종해야 한다.

주님과의 긴밀한 만남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그 분이 '믿어라' 시는 말씀이 있으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기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

돌아본다.

그런 용기가 있던가?

혹여, 말씀이 있으실 때 순종할 용기가 있던가

지금 그만 두라실 때 내 직장 그만두고 선교의 자리로 털고 나갈

그런 용기는 있는가?


아직은 그렇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특별한 말씀이 없으실지 모른다.

그러나, 어쨋든 그 길은

가장 선한 길이 틀림이 없다.

두렵고 비아냥의 위험이 있지만

영원과 영생의 관점으로 가장 선할 수 있다.


오늘

용기

주님을 위한 용기를 기도햐여야 할 바다.



주님.

덕분에 '삼시세끼'라는 종편의 프로그램 같은

장모님 댁 환경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냥 편하고 기쁩니다.

육신이 편하고 마음이 편한 이 시간에

주님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위하여는

깊은 만남이 전제가 됨을생각케 하십니다.

주님을 전 더욱 깊이 만나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순종할 용기가 더 필요합니다.

주여...

그래서 오늘

이 편한 시기에

억지로 자리에 앉아

제가 '최소한 드릴 수 있는 ' 믿음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묵상을 올리고

기도를 하려 몸부림 칩니다.

주여.

이 가련한 몸짓에

더 깊은 기쁨으로 만나게 하소서.

그리고는 이제는 조금은 불편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아부인, 자기 십자가를 더욱 즐겨하는

성숙한 자 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믿기만' 하면..이시라는

말씀에

적극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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