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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의 눈물 & 천사의 평강[요19:11-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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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의 눈물 & 천사의 평강[요19:11-23]

주하인 2017. 4. 17. 09:28

 

이게 외로움이 맞는가

이것이 끝이 맞을까

과연 이게 절망으로 느껴지던가


온 들녘에 생기로 그득하며

여유와 평안의 기쁨으로 그득한게

내 홀로 헤메이며 잘못 들어선

라이딩 길 농로 한가운데서다


그랬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적막이 아니고

온 공간을 그득채운 생명이었으며

홀로 있는 절해의 고독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기대되는

완전한 충만의 느낌이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 분의 무덤가는

 쓸쓸하고 슬프고 외로운

비어있는 끝이 아니라

곧 새로 시작되어 누려질  

부활의 전초

성령의 임재가 그득할

그 시점 그 장소였던 것이다


주께서 오늘 말씀하신대로

오히려 기뻐하고

제대로 주님을 바라보며

허락하신 평강으로

새로운 새 생명을 만끽하여야 한다


할렐루야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예수께서 돌아가셔서 '무덤'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살아계시다.

부활하셨다.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인생들의 눈, 우리 ... 알지만 인생에서 마주하는 칼바람에

예수님을 믿지 만 어쩌면 '무덤'만 그리고 있는 지 모른다.


그래도 마리아처럼

'무덤 밖에서'

' 울고 있는 자' 몇이나 될까?
제자들은 뛰어와서 빈무덤을 확인 했지만

곧 돌아 가버렸다.

하지만 마리아는 '울고 있었다'

비록 대상은 '죽은 예수님 '이고 '시체의 사라짐'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까지는 아니지만

그녀의 그 순수한 믿음만 이라도..

아니 '의리'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곁에서

무슨 일이 있든 ( 예수님 돌아가셔서 무덤 밖에 남지 않는 듯,... 절망.. 이 몰려와도... ㅠ.ㅠ;;)

떠나지 아니함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한다 .

어찌.. 머리로만 사랑할까?
사랑함은 '사랑했던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것..

누구에게나 '예수님과의 사랑 경험'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랑함은 사랑하기 위한 시간의 나눔이 필요하다 .

서로 있어줌이 연애와 사랑의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  말씀을 늘 사모함.. 그리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

최소한 난.. 말씀으로 14년 이상 .. 이곳에서 뿐아니라 다른 묵상터에서 묵상하며

깊은 교감으로 주님 예수 사랑으로 깊어져 있다.

그게.. .다행이다.

 난.. 주 예수 만으로 기뻐할 전제조건이 갖추어짐이 감사하다.


어제..

누워서 홀로 ( 어찌할 수 없이 원룸에서 사는 나..ㅜ.ㅜ;;) 나이든 외로움이 ,

잠시 다양한 이유로...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옛 외로움의 고통이 날 사로잡으려 할 때

갑자기 ' 예수님' 만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허전함보다는 감사함으로 바뀌는 인식의 순간이 되었다.


그거..

그 마음.

'마리아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다행이다.

그래도..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약시대'의 기본 이다.

거기에 '천사'가 끼어들 틈이 있는가?
그렇지만 '천사'는 옛 이야기처럼 .. 아직도 기독교인들에게도 번연히 인정되고 있다.

'천사 같은 아기.... ' 라는 표현은 내 입에서 자주 나오는 감탄사다.

소아과 대기실의 아가들을 보면서.. ^^*


이 천사.

베드도들이 들어갈 때는 없더만

마리아가 나중에 와서 울며 들여다 보니 ' 예수님'  계시던 자리에

그것도

둘이나 보인다.

성령님과 어찌 연계지을까?

 

이 신약시대에 ,

아직 성령이 오지는 않으시어서인가?

천사의 개념은 성령의 임재하실 때 우리의 가슴에 형상화되는 상징적 개념으로

보이시는 것이실까?

 어찌 하나님의 일을 알겠는가..

하지만 천사와 예수님이 동시에 보이시는 구절이다.



15.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시며

예수님이 곁으로 다가오셨다.


감정에 복받쳐서

예수님을 못알아 보지 않게

이 세상의 원리나 논리에 가로막혀

주님이 살아계셔서 내 앞으로 다가오심을 믿지 못하지 않게

그 분은 '부활'의 하나님이시고

내 홀로 있음, 내 절망을 모두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분이시니

모든 고통과 수난과 힘듦 마져

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모든 '시종(始終)' , 시작과 끝이 주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길

주님이 원하신다.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

주님이 주시는 그 평강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우리의 궁극적 감성,

우리가 천국, 영생에서 누리고 살 감동의 흐름인지 

비록 부족하겠지만 이 땅에서도 그 평강을 누리고 살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누리자.

 



 주님.

그래도 '무덤' 곁이라도 떠나지 않는

마리아의 질긴 의리라도 귀히 여기시사

주님께서 이리 모습을 보이십니다.


주여.

제 이 땅에서의 삶...

무덤 가 , 절망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내게 오셔서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주셔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부인치 못하게 하시고

어떠함에도 주님을 떠나지 못할 

오직 유일하신 '삶의 이유'임을 제게 각인 시켜주셨습니다


이제 해마도 돌아오는 부활절.

그때마다 동읾한 말씀 구절을 겪게 되지만

조금씩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주여.

무덤가의 눈물.

그 절망.

그러나 그러함에도 그려지는 예수님의 사랑하셨음을 그려보지만

가슴이  뻐근해지려 합니다.

답답하고 힘이 들려 하지만

이제는 절망보다는 '천사의 소망'이 조금더 크게 느껴집니다.


죽음보다는 부활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오면서 읽은 구절, 고린도 후서 4장 이하의 구절에

욱여쌈을 당해도 쌓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생명을 몸에 나타나게 한다.

겉사람은 후패..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라는 구절이

참으로 일치하는 듯

다시금 제 뇌리에 소롯이 떠오릅니다.


주여.

현실만 볼때

이전과 하등 다름없이

무덤가의 '좌절'일 수 있겠으나

주님 곁을 떠나지 않으니

주님을 가슴 저리도록 매일 맞이 하니...

이제는 '천사'의 평안함이 , 포근함이

내 현실의 상황과 그리 상관없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주님.. 말씀을 매일 사모하려 애쓰니

제게 '어찌하여 울려고 하고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 하느냐.. '시며

말씀을 걸어오시는 주님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조금 더 빠르게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받아 들이게 됩니다.


그게.. 감사하나이다.

주여.


오늘도 내게 허락하실

온전한 평강,

폭포수처럼 내 안에 흐르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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