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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 가져야 할 것[요21:1-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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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 가져야 할 것[요21:1-14]

주하인 2017. 4. 19. 09:02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데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그리 서운치 않다

그리 또 외롭지도 않다


가만히 느껴보니

따사로운 봄기운이 나를 감싸고

온 우주에 생기로 그득하며

내 안에 

어떻게

평안하고 행복이 그득한가

오히려 놀라웁다


가진게 하나도 없지만

나 아주 많은 것 가지게 되었고

진정 가져야 할 것

그것도 충만히 가져야 할 비밀에 대하여

이제 깨달아 가고 있다


감사하다

기쁘다

이러함이 놀랍다

내 이리됨이 그렇다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디베랴 바닷가.


온 인생을 걸고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그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인생의 눈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말한다 )

인생의 방향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는 ,

그래도 3년 공생애를 같이 했던 제자들이라고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으셨으니...ㅠ.ㅠ;;)

안식일 다음날 빈무덤가 까지 소스라치듯이 뛰어 갔으나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이니 눈꼽만한 성장..)

그들의 조급한 눈(마리아 같이 진득하지 않은... 마치 나.. 같은..ㅠ.ㅠ;)에는

또다른 실망이 그들을 사로 잡았다.


그들이 디베랴 바닷가 , 목표를 잃은 인생의 처참한 현실,

실제의 우리 들, 죽음을 곧 현실화 시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조금은 인생의 쓴 맛 단맛을 다 보고 난 나이 들은 우리들 앞에

결국 갈 곳은 '빈손의 죽음 '밖에 없음을 처참히 인식하고

그동안 그리 열심히 살아왔던 모든 것,

가족, 인생, 성공, 돈, 명예...............그 어느 것도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없음을

이제는 인정하게 되고

좌우를 돌아보니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고

결국 홀로 임을 절감하는

이 절해의 고독 앞에서 서 있는 자...

그것이 디베랴의 이들 모습,

우울 증 빠질 것 만 같은 힘없는 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러함에도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니

모두 넋놓고 걸터 앉아 소주잔이나 담배 허탈히 피워 물던 것 (^^;; , 가능치 않은 상상 ㅎ)

툭 하고 집어 던지듯 땅에 버리고

어슬렁 어슬렁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가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무엇이 재밌고 의미가 있었겠는가?

이전과 동일한 장소 동일한 방법으로 고기 잡이에 나섰으나

그들의 머리는 이전과 같은 얕은 희망 (돈벌어 가족과 성공하고... ....) 조차 없으니

무에 소득이 있을까?

과연 잡아서 무슨 덕을 볼것이라고 열심히 잡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밤이 가까워 오며

그들은 그 허전한 마음 만큼이나 텅빈 배에 당혹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그때...불현듯...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난.. 이게 좋다... 내 전혀 가능치 않은 빈 인생에

 내 전혀 예상 못하던 생각을 뚫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내 인생에 나타나셔서 말을 거시고

 소출을 주시기도 하시고 ^^*

 평강의 기쁨을 주신다.. )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신다.

 

나.

가진 게 있던가?

지금...

그랬던가?


 나.

가진게 많다.

이제는..

예수님의 평강을 가졌다.

어... 이거... 언어 유희로 들 들리시는가?

아니다.

난... 가슴 한구석이 지금도 뿌듯하다...기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푸근하다.

자주 그런다.

별.. 그리.. 성공적 상황이 아님에도 그렇다.

오히려... 현실은 차거운데....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아니 어제 만도 그랬는가?

그랬다. ㅜ.ㅜ;

돌아보니 그랬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인하여 조금 고민이 되려 했다.

이전의 '차갑고 무서운 생각'이 두려우려 햇었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금방 회복되었다.


이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시는 물음에

위에 나열한 현실 앞에 '우울' 만이 들어나 버렸을 것이다.

소망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옛 생활로의 귀의는 '퇴화'가 아닌가?

사람은 절대로 퇴화해서 살 수 없다.

성장하는 만큼 채워지는 욕심 바구니가 있다.

그것.. 엄청난 불행일 것이다.

'고기가 있느냐"시는 말씀은 현실에 풍성한 것을 떠나서

'진정 내가 이 인생에 가지고자 하는 것' 을 가졌느냐.. 시는 물음이시다.


 돌아 본다 .

과연 나는 무엇을 가지려 했던가?

돈인가?

명예인가?... 솔직히 애시당초 그런 것 아니었다.

그렇다면 ' 평안함'이었는데... '행복' 이었는데 이 막연한 개념이 과연 이루어 졌는가?

솔직히... 이제는 평안과 평강이 내 안에 반이상 차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 ^^*

그런데 그 평안함이 목표던가?

이 땅에서 평안함과 행복함.. 그게 목표?

아니다.

난..내 우울하고 목표없던 저 힘없던 디베랴 제자들의 그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처절히 예수님을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이제는 그 방향을 찾고 덜 흔들리는 것은 맞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땡이라면

이제 주님을 더 열심히 믿을 필요 없고 그냥 적당히... 누리면서 살다 갈까?

그렇다면 또..

이 나머지 인생...나.. 지루해서 75세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가끔..ㅜ.ㅜ;;...

현실적으로 주변 노인들을 봐도 평균 나이가 100세 가까이 살 게 되는 게 확률상 맞다면

난... 지금처럼.. 편안하게만 살다가 가는 것을 생각하면 지루하기 이루 말할 데 없을 것 같다.

어..어찌 생각하면 '영생'을 천국에서 평강의 마음으로 사는게 지루하지 않을 것이

천국이라면 그 마음을 미리 체험해보는 것도 괜찮지만

(아무 것도 안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오직 심령천국....^^*)

나.. 그래도 이 인생에 육신의 장막을 입고 왔다면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가질 것'에 대한 고민은 한번 쯤 있어야할 것만 같다.


무엇일까?

그게...

내가 가져야 할 것.

가진 것은 '평강의 단초' , 예수님..이지만...


불현듯 드는 생각들.

심리적 부분에 치우친 평안이..

이제는 '내'가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뜻,말씀'에 맞추어 변화되어가는

그래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성령의 내주 합일'로 인한 평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말이 어려운가?

이 감정적평안을 유지하려고 애쓰다고 끝나는 그런 삶이 아니고

삶이 비록 어려움에 처해도

말씀이 있으시니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의지를 발휘하고

그 의지를 기뻐하심으로 하나님이 강력히 잡아 주시는

절대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과 나의 코오퍼레이션,

그러나.. 그러한 선택을 통해 점점 내 자아는 약해지고 하나님의 의지만 이

내 안에서 움직이시게 되어가는 것.

그게.. 내가 가져야 할 앞으로의 목표가 아닐까?


아...

어떤 현실적 상황을 통하여

주께서 그런 상황을 내게 만들어 가실까?

내 영혼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

어쩌면 '망상' 을

주님은 어떤 인생의 도구를 통하여 나를 변화 시키려 하실까.....


난.. 그러한 가질 것을 가지게 됨을 기대한다.



주님..

오늘 200 큐빗,  90여미터의 바닷가에서

소리를 지르시지 않으시고도

제자들에게 곁에서 말씀하시듯 말씀하는 장면을 보고 잇습니다.

주여.

흐르듯 스치고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제 인생에도 이처럼 멀리 계실 것 같지만

제 예상을 뚫고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공간을 타고 오실 줄 기대가 됩니다.



 주여.

오늘은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시며 제게 말씀을 걸어 오십니다.

한동안 디베랴 저 제자들 같은 상황에 빠질 뻔 하던 것을

주님이 인도하셔서 또 일어섰습니다.

이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을 원하는 가 에 대하여 묵상을 시키셨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내 마음이 순종하여 변하는

그래서 그 궁극이 늘 평강, 평안, 충만, 행복함이 되길 원합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의 햇살이 사뭇 싱그러웠습니다.

그랬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노래가 나왔습니다.

아닌.. 버거움의 시간이어야 할 것을

이렇게 전... 주님의 평안을 누리 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

오늘 하루도 깊이 붙들고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동일한 과거의 묵상 I. (2008. 04.15묵상)


" 그 후 ( 요21:1-14 ) "

 

 

죽을 때까지

이런 아름다움을

꽃 피울 수 있길 원합니다.

 

주여.

성령으로 절 잡으소서.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도

뿜으리이다.

주여..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 그 후에'다.

살아나신 예수께서 베드로 일행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다.

 

성령 체험.

성령충만.

성령세례... 등 다양한 말이 나온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성령세례는 성령을 체험한 이후

주님이 예비하신 개개인의 일정시간이 지나간 후

쏟아 붓는 성령의 체험으로 성령 충만이 지속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한다.

 울 목사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 성화의 경지에 올라

주님의 임재가 내주합일 되어

생수의 강이 폭포수처럼  배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성령이 전 신, 전 영혼을 사로잡아

단 일초도 주님과 떨어질 수없는 상태,

즉, 로마서 8장 의 고백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 우리의 전체를 다 사로 잡히는 것을

성령 세례라고 말씀하신다.

 

 어느 것이 맞은지 모른다.

그냥 기독교에서 쉽게 성령세례라 표현하는 것이 맞은지

위의 표현이 맞는지...

하지만,

묵상 구절에서 보듯이

'그 후' , 즉 성령을 받은 후에도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로 표현되는

옛 습관, 옛 삶, 세상적 삶으로 되돌아 가 있다.

 그것은 '성령체험'이 금방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하고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돌려 말하면

기독교인이 금방 모두 착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베드로 처럼 심한 심적인 좌절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깊은 연단을 거쳐 가서야 주님께서 비로소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 예수님을 구주로 섬긴 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뿐아니라

작금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 제자들 같은 깊은 환란에 빠져 연단을 심하게 받은 흔적이 없고

따라서 그들 모두 곧 있을 오순절의 성령 불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심한 환란은

그 환란을 맞이하는 동안

주님 앞에서라는 전제만 된다면

주님의 쓰이을 받기 위한 연단, 즉 제련을 통한 불순물빠지는 기간임을 알 수 있다

 

 나에 대하여는 어떤가?

자주,

' 주님을 이렇게 믿어 왔고 그렇게나 사랑을 받았던 자가  이것 밖에 할 수가 없는가'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럴 때마다 깊은 좌절에 들어가고 싶은 자기 연민의 유혹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내 속의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만일

이때 그 연민의 신호에 계속 날 맡겨 버리면

그래서 주님을 생각에서 지우려는 어이없는 결심을 해버리면

그것은 우울의 깊은 늪에 들어가 버릴 수 도 있는 것이다.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이게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전인생을 걸고

주님 예수를 따라 다니던 자들이 허탈하게 디베랴 바닷가에 앉아 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나는...' '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한다.

정확하게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넋을 놓고 뱃머리에 걸터 앉아서 있던 일행들은

서로 한마디 이야기도 없었다.

그냥 애꿎은 담배 - 있었을 세대는 아닐 것이지만 극중 효과를 위해서..ㅎㅎ  - 만 버끔 거리고 태우다가

그것도 지루하자,

갑자기 베드로가 허리춤을 털고 일어나며

'에라.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 겠다'라고.....

  무엇이 느껴지는가?

어쩐 지 익숙한 느낌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향해 , 부자를 향해 전력을 질주하다가

예기치 못한 일로, 특별히 최근의 금융대란으로

본의 아니게 실직이나 삶의 굴곡을 겪을 때

그래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

그 공허함과 허전함은 얼마나 심할까?

  더구나, 이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인생 대 역전을 이루려 하던 꿈이 물거품 되어 버리고

옛시절로 와 있는 것이다.

 세상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던,

예수님이 주시던 그 놀라운 카리스마의 평강 속에서

철저히 지도 받던 그들은

단 일푼도 장래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의심이 없었을 것을

그토록 믿었던 그 분과의 시간이

마치 바람 불면 없어지는 모래 먼지처럼

흔적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과거로 , 고향으로 회귀되어 내려온 것이다.

오늘날 보이는 많은 사회현상의 그것과 어찌나 닮아 있는가?

 조금만 더 있으면 이들은 '우울증'에 걸릴 지도 모른다.

 

 난 어떤가?

 자꾸만 나오는 옛습관.

무엇인가 목표를 잃은 듯한 허전함과 특별한 이유없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어올 때가 있다.

 물론, 말씀 앞에서고 예수님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일

결심을 굳혀가고 있으면서 잠시이지만..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어쨋든 그들은 그들의 빈 마음으로는

주님을 알 수있을 심적 에너지가 없다.

그러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

 

기독교인이 된 것,

그 분의 구원을 얻은 행운 중의 또다른 자랑스러움은

그 분 예수님은 인간의 이러한 변화 마져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천년 전의 사람들이나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 그들 심사에 흐르는

영혼의 상처로 인한 심리적 흐름까지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일상을 먼저 회복시키신다.

 보라.

머리가 깨어질 듯한 멍함 속에서

무슨 삶의 의욕이 있을 것이며

삶의 의욕없이 어쩔 수 없이 던지는 그 물에 어떤 고기가 잡히겠는가?

 

 주님은 우리 어리석은 고민자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시리라고는 전혀 예측 못할 때에

어둠 속에서 나타나신다.

그리고는 우리의 부족한 것 마져 다 챙기신다.

그것도 '풍족히...'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문제는 이런 회복을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물에 뛰어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은 '배반에 의한' 죄책감을 해결하고자 하는 회개의 간절함이다.

그것보다 예수님의 그 평강에 대한 본능적인 간절한 바램이다.

그러한 주님 예수님에 대한 갈구가 있어야만 일상 마져 회복이 될 기회가 되는 것이다.

위에도 명기한 것 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서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주님이시다.

그래도 날 구원하실 분은 주님 뿐이시다.

어제 도마의 고백과 같이 '주님은 내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간절함이 생기고 평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베드로의 그 넋을 잃은듯 멍함은

주님에 대한 죄책감과 주님을 잃은 방향 부재의 탓이다. .

그래도 주님이 전제가 되었기에 그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아.

그 세심하시기 까지 하시기란...

때가 되면 주님은 다시 모습을 보이시려 오신다.

 

 

 

 죄로 따지면

누구라도 그 무게에 버틸 수가 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어찌나 이렇게 음란한 생각은 온전히 떨어지지는 않는가?

예수님 영접하고 목석되는 남자가 있으면 메일 좀 써 주셨으면 좋겠다.

어찌나 이런 포악함은 사라지지 않는지?

어찌나 걱정과 근심은 오래도 달라 붙는지?

어찌나 자기 연민은........................... 

 십자가 예수님을 믿은 후 단 한번에 온전한 의인이 되어 버렸다면

이 땅은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천국을 옮겨놓은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오늘 베드로 일행의 '그 후'의 상태를 보아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 곁에 다가가려는 노력과

거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절대로 그 기간은 짧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시지만

절대로 그 분 만으로는 성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그 분을 향한 '선택'과 '의지'라는 과정이 필요함을

그때가 되어야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신다는 것을

베드로의 태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은가?

 얼마나 심리묘사가 잘 되어 있는가?

 마치 살아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면 저리 변화 무쌍한 시대를 가르는 실제를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천년 전의 요한 著者가 심리학의 대가이며

미래 SF소설의 창시자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모두 살아 있는 진실이다.

 

오늘 묵상은 나에게도 시사하시는 바가 많다.

 

 그래.

질 수도 있다.

이전과 같은 깊은 나락의 시간이 오래 필요치는 않다.

베드로도 그렇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베드로처럼 반드시 큰 인물로 쓰임을 받기 위한 과정일 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과정에 맞추어

나의 정도에 맞는 성화로 이끌려 하심이다.

 

성령의 세례를 엄청 사모하여야 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제는 이 어리석은 영혼에 자리잡는 기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훌륭한 목사님들이나 기본이 되어 있는 성도들이나 가능한 줄 알았다.

그래서 베드로님의 고민이 그럴 수 있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있다 생각했으나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며 일상의 삶에서 성화하려는 욕구를 가진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위안의 묵상임을 알 수 있다.

 

힘이 난다.



---------------동일한 묵상 II. (2008.12. 29 묵상 ) 


성장통(요 21:1-14 )



제 21 장 ( Chapter 21, John )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야할

유일한 희망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로 내려왔다.

 

 디베랴는 옛날 삶의 모습이다.

왜 일까?

왜 예수님의 허리춤 상처에 손가락 집어 넣는 도마를 보기 까지 한 그들이

옛날로 돌아왔을까?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내려는 왔지만 의욕이 없다.

예전에 어부이던 때, 어부의 본분 만 열심이던 그들이 힘이 없다.

베드로의 말투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어부가 왜 그런 소리 할까?

그들은 돌아온 어부이지만 어부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그들을 잡아 끄는 허탈함이 있다.

 

 깊은 허탈함.

영혼의 공허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그 진득한 어두움................

 

 그 모습으로 세상을 살지만

세상은 예전처럼 그들에겐 힘이 있는 매력이 되질 못한다.

고기가 잡힐리가 있는가?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누군가 자신들을 끌어 주었음....하는 넋을 잃은 허무함으로

그물을 쳤지만 소득은 없다.

 그때에 누가 나타나서 묻는다.

대답한다.

그가 우측에 던지라 한다.

왜 하필 우측일 까?

어쨋든 그들은 그냥 끌리는 대로 그물질을 한다.

 당연히도

그 분이 누구인지

왜 오른쪽인지

또, 그 멀리서도 마이크도 없이 말하는데도

어찌 50간 (100yards :91.4미터)  밖에서도 대화가 잘 들렸을까?

어쨋든 세상의 물질도 풍성히 얻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유명한 이 행동이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가던 자들의 고뇌가 얼마나 심한지를 잘 알 수있다.

그는 옷을 입고는 무조건 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달려 갔다.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주님이 준비해 주신 '만찬'

주님은 세상을 모두 버리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그리고 위안을 허락하신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거기에 주님의 도움으로 얻은 물질 일부를 가져오길 바라신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당연하지만

주님이 주신 물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누구나 좌절은 있을 수 있다.

솔직히 좌절을 모르고 성공만 치달리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아픔을 모르는 자들의 성공은 자칫

그 성공보다 더 아픔을 남에게 줄 위험이 있어

주님 안에서 크게 귀히여김을 받지 못할 위험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주님이 치리하실 이유가 있지만..

 주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그 엄청난 영적 부담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견디지 못하고 디베랴 바닷가로 내려왔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몸소 부활 보여주시고는

한동안 어디론가 잠적하셨다.

어디일까?

그것도 궁금하지만

그 후의 베드로 일행의 흔들리는 마음의 요동의 시간이

더욱 흥미롭다.

어쨋든 그들의 심령을 뒤흔들었던 대 격변의 3일은 가히 사람으로 견디기 힘든

곤란의 시간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긴 했지만

그들 자신이 막연히 바랐을 지도 모를

'이 땅위에서의 부귀영화' 의 물거품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지도 모르고,

그것보다 더욱 크게 그들의 심령을 자리잡은 것은

자신들에 대한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혼란은 그들이 어부로서 살아오고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느낄 필요조차 없었던

단순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삶에 고착되었던 눈이

또 다른 가치에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필수적인 성장통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베드로 일행은 주님 예수님을 쫓아 다니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삶은 세상에 가치를 많이 둘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고

그 삶은 고난은 있었으되 뚜렷한 눈에 보이는 가치 - 세상의 것,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어

별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었으나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심과 부활을 경험함으로

그들은 대 격변을 보아야 했다.

  세상적 가치에서

이제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전환되어야 하는 과정에 있다.

그들로서는 대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마음이 지진이 나는 듯 했을 것이다.

그 영적 혼란은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해오던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높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등등의

단순한 고민을 넘어서는

복잡하고 머리가 뒤죽 박죽일 수 밖에 없다.

그 고통은 이전의 것 보다 훨씬 크다.

죽고만 싶다.

살 이유를 찾기 위해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자'라 하지만

이전 처럼 '고기를 잡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다.

그냥, 죽을 것 같은 공허함에서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냥 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촛점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목표가 없는 그물질에 무슨 고기가 걸릴 것인가?

 

 그러던 그들에게

즉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소리가

새벽 호수 위를 뚫고  100여미터의 거리를 두고

들려와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 소리는 '희망의 소리'다.

그 소리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였다.

 

 물위를 뛰쳐 들어가는 베드로의 유명한 모습은

그 들의 그간 겪어 왔던 상실감, 허탈감, .....이 얼마나 심했던 가를 반증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신다.

그러시면서 뒤따라 오는 제자들에게 잡아 놓은 153 마리의 생선 중 한마리를 가져오라 하신다.

 주님은 세심하시다.

주님은 온전한 삶의 방편이시기도 하다.

주님은 기적을 베푸시는 근원이시다.

주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다 아신다.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지적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간접적으로 가르치신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

 

 나에겐 무얼 보이시려는 가?

 

돌아보니 훨씬 덜하지만

가슴이 텅 빈 듯한

나만이 남은 듯한 허전함이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열심을 보이던 주님의 일에

상황이 변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게을러 지는 듯 당혹감이 스치고 지날 때도 있었다.

'이거 이래도 되는가..'

 주님 앞에 내려 놓는 기도를 할 때는 세상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도 있을 거 같더니

한번 씩 주위를 보면서 '나만... '하는 허탈함도 있다.

 

 주님은 아신다.

주님은 나에게 아신다고 하신다.

153마리 고기를 보이시며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보이신 주님처럼

나에게 이전과 비교하여 훨씬 달라진 내 모습을 이해케 하신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에 다시 눈돌리며

주님이 그토록 기쁘게 내 영혼에 허락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가치 추구의 속도가

늦추어 졌음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어쨋든

난 사도 베드로 일행과 같이

그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있다.

 

적용

 1. 주님을 좇다가 허탈함은 새로운 성장을 원하시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

  

2. 베드로 처럼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좌절하지는 말자.

 그렇다고 몸부림 치지도 말자.

 언젠가 다가오실 그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며 기다리자.

 

3. 환경의 허전함이 올 때도 주님만을 기다리자.

 

4. 주님은 화려한 축복이시기도 하다.

 일상의 어려움은 그 분이 해결하실 것을 믿자

 

5. 성경 여섯 장 읽자

 

6. 세상 것에 대한 고집을 내려 놓을 때가 온 듯하다.

 아쉽고 허전한 것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을 기다리자

 

 7. 성장 통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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