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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탄덩어리 고기 깡통을 넘어서( 전 4:4-16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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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탄덩어리 고기 깡통을 넘어서( 전 4:4-16 )

주하인 2009. 2. 12. 09:25

 제 4 장 ( Chapter 4, Ecclesiastes )

 

 

 지난 겨울의 흔적.

아름다운 눈꽃.

차가움을 인고로 이겨낼 때

솔 잎은

멋진 흰 백색의 꽃을 입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움켜진 손을 풀고

한 손으로 평안을 유지하며

세상을 흘려 보낼 때

내 영혼은

예수님의 보혈로

투명한 흰색의 영혼을 입으리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아가페 쉬운 성경) 또 살펴보니, 모든 수고와 성취는 이웃에 대한 시기심에서 발생하였다. 이것 역시 바람

           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다.
 NIV)   And I saw that all labor and all achievement spring from man's envy of his neighbor.

           This too is meaningless, a chasing after the wind.

  

  자꾸만 볼 수 있도록 하소서.

알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게 하소서.

 

 세상의 돌아가는 흐름이

주님의 원리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의 열심을 내며 사는 인생의 그 열정이

가만히 그 본질을 들여다 보려 노력하면 비 본질적인 것이 너무도 많음을 알고 놀란다.

 비본질인지 본질인지 구분할 여유조차 없으며

살다가 죽고 또 나서 살다가 죽는 게 대 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지만, 그 것을 영혼으로는 느끼고는 있다.

 그 비 본질의 것 중의 하나가 오늘 묵상의 시작에 나오는 이야기다.

 열심을 내고 전 인생을 걸어가며 추구해온 대부분의

수고와 성취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성공하여 자리 떠나기 전, 아이들 결혼시키라 한다.

그래야 결혼식장에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장례식장에 사람이 북적거리면 성공한 집안이고 가정이 잘 되었다 한다.

일견, 맞기도 하다.

하지만, 씁스름한 맛을 금할 길이 없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들의 말에

장례식장과 결혼식장.. 에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는 게

삶의 목표인 듯하게 말하여 짐이 그렇다.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손에 잡히는 금전이 그 나이까지 살아온 전 목표이고

또 자신이 죽을 때 자손 들에게 물려줄 전부인 것 같은 뉘앙스로 느껴지니

어이가 없다.

 그것이야 말로 남들에 뒤쳐지기 싫은 '질투'의 또다른 표현이 아닌가?

어쩌면 현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숨겨져 있는, 그러면서도 진실을 찌르면

과도하게 분노하며 부정하고 싶어하는 근본 원리가

바로 '질투'와 '비교'에 의한 수고와 노력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살면서 아무런 목표가 없다면

전부 우울의 늪에 빠져 시들거리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저런 '비교'와 '질투'가 삶의 또다른 'Drive'   , 즉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다..라면,

그것은 정말로 무의미한 삶이다.

 이 인생이 끝이라면 그리 살아도 된다.

하지만,

난 해부실습실에 누워 있는 생명이 떠난 젊은 여인의 육신을 보고서는

저렇게 '고기덩어리'로 누울 것이 인생은 아님을 깨달았다.

불신의 시절에 ..

그것은 이 땅의 비 본질적인 것이 인생을 살게 하고

또 다른 개체들을 , 후손들을 수만년 이 땅에 나타나고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으로 끝이면 , 그것이야 말로 걸어다니는 고기덩어리 깡통이나 무엇이 다른가?

인생이 그리도 하찮은가?

그러기 위해 그 깡통에 '술'과 '고기'와 더 좋은 미각의 것들로 채우고

그 깡통에 차오른 '성 호르몬'에 의한 남아도는 잉여 부산물 - 정자... 똥..ㅎ- 이나 배설하러 다니는

그런 깡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야 말로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지구의 부존 자원을 갉아 먹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메탄덩어리들이 아니지 않는가?

 그 메탄 덩어리 고기 깡통들이

멋지게 폼잡고 와인잔을 부여 잡고

인생을 논하며 철학을 논하고

그러다가 기회되면 타인의 깡통- 이성... 동성깡통도 하더라..이구...^^;;;;;- 이나 탐을 내고

또 하루 해가 떠오르면 또 수고와 노고를 하다가..또.......

 

 그게 인생이냐?

그게 다 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헛되고 바람 잡는 것 같다.

솔로몬이 그러지 않던가?

 

 


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아가페 쉬운 성경) 바람을 잡고자 두 손 벌려 수고하는 것보다는 한 줌으로 만족함이 더 낫다.
NIV)   Better one handful with tranquillity than two handfuls with toil and chasing after the wind. 

 

 이제

주하인.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 기독교인으로서

조금은 본질에 가까워져 가는 삶을 살려하는 자로서

솔로몬의 오늘 말씀을 공감한다.

 

 두손 모두 벌리며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들을

난 참으로 많이도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니까..

그 아이들은 정상 반응으로 두 손을 움켜 쥐는 악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 손을 살짝 뽑으면 '부르르' 떤다.

태어나면서 부터 ,

인간은 두 손으로 잡으려는 삶의 본성을 발휘한다.

그것이 죽기까지 되풀이 된다.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들의 손은 땀으로 번득거려지고

온통 헛된 힘으로 경련이 올정도로 긴장하며 산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육신의 깡통 외벽이 녹슬기 시작하면

그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예전과 같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다시금 되찾으려는 각고의 노력을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심령은 '불안'해져만 간다.

 중년의 우울.

중년의 비애.

노년의 회억.

노년의 절망.........

 

 현대인이 그처럼 많은 정신적 고통과 질병은

움켜 잡으려 함에 있다.

움켜 잡음은 무엇인지 모를 허전함,

아이의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의 허전함이 증명하는

실존적 허전함에 그 이유가 있다.

 

  그 허전함은 원죄에 이유가 있다.

아담이 이유다.

 

 그 원죄는 영혼의 상처다.

영혼의 상처의 증상이 마음의 질병이다.

육신도 결국 따라간다.

 

 회복은 '평온함'을 통해서 나온다.

평온함은 증상인 마음을 다루기만 해서는 또 되풀이 될 뿐이다.

영혼이 채워져야 한다.

영혼의 채워짐은 손을 풀음에서 시작이 된다.

 그 풀음은 예수님을 전제로 시작이 가능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

풀고 손을 놓으면 그 때 부터 주님이 역사를 하신다.

역사하시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는 증상은 평안함이다.

 평안함을 넘어서는 기쁨이다.

평강이다.

 

 오늘 묵상에서 평안함으로 한손을 잡는 것이 수고와 노력으로 바람을 잡으려

두손을 움켜 쥐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하지만, 살아감이 독불장군의 행사가 옳은가?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시적으로 전도자가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 '

혼자는 외롭다.

외롭게 살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시리고 춥다.

삶의 굴곡 속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친구나 가족 , 동료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보듬어야 한다.

주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받들기 위함이라고 빌립보서에도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

나와 다른 자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긍휼히 여김이 필요하다.

전도자는 계속적으로

본다.. 또 본다.. 또 보았다.. 한다.

 

 위의 교훈은 누구도 모르는 교훈이 아니다.

하지만 삶속에서 누구도 지키기 힘든게 이런 기본적 교훈이다.

이 교훈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격적 변화가 선행이 되어야 한다.

그 인격적 변화는

주님의 인격적 만남,

임재의 체험과 동행으로 가능하다.

 

 

주님

늘 동행하소서.

그리하여 저로 하여 진실을 보게 하소서.

본질적 삶을 살게 하소서.

비 본질에서 벗어나 두손 중 하나를 펴게 하소서.

그리하여 평강의 삶속에서 비교와 질투를 놓게 하시고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게 하소서.

이웃을 편한 눈으로 보게 하소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

주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동료임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눈에 보이는 내 동료 들에게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

그들의 아픔을 받아 들이게 하시고 공감하게 하소서.

불의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하소서.

악의를 관용하게 하소서.

아무렇지 않게 하소서 .

나를 흐르게 하소서.

주님의 따사함으로 그들을 맞이하여

내 외로운 인생길에 동행자를 허락하소서.

나를 변케 하소서.

주님의 동행하시는 삶 속에서 세상을 흐르게 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헛된 비교를 내려 놓자.

 새로오신 소아과 선생님.. 대단하신 분이시다.

 경력이나 영성

  내 추구하는 영적 방향과 비슷하신 선교사 출신이시다.

  기쁘게 동료로 받아 들인다.

 

2.  난 깡통이 아님을 명심한다.

 

3.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금한다.

 비교에 의한 수고는 아닌 지 늘 돌아본다.

주님의 원리에 의한 열심이 아닌 것은 내려 놓는 연습을 한다.

 

4. 욕심을 버린다.

두 손 중 하나는 풀자

하나는 평강을 위해서 잡자.

 

5.  주여.

 따뜻한 체온의 동료를 주소서.

 

6. 친절한 사람이 되겠다.

 모두 용서하고 받아 들인다.

 아무렇지 않기로 한다.

 나도 받아 들인다.

 여유롭길 원한다.

 

 7. 성경 일곱장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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