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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을 주님을 위하여 죽다 (슥7:1-14)

주하인 2007. 4. 17. 08:19

1.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매일 임하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매일큐티 책을 펼치자 마자 '감사'한 마음이 든다.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3.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칠십년 동안

유배의 생활 동안

그들은 금식하고 애통하고 울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니던가?

 

 

( 딱딱하게 말라 굳은 이 어리석은 영혼이여..)

 

 매너리즘

그것의 당연한 유전.

반성없는 교육의 결과는 칠십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그 행위에 주님은 안계시고

자신들의 의를 강화하는 요식 행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에 아무리 잘못했다 해야 이해가 되겠는가?

 

 작금의 교회들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느낄 수도 있다.

열심히 헌금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모여서 교제 나누고..

 거기에는 회개와 반성과 성화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소수 기복적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다름이 아니다.

 

 

 

4.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나는 다른가?

나름대로 평안을 이유로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듯 하며

키타를 들고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찬양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두 손 번쩍 들고 늦은 밤 기도를 하지만

거기에 내 감각적 평안 이외에

주님의 영광을 위한 마음은 있던가?

 

 하나님의 좋아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고

압제를 풀고.....라는 이사야 구절이 있다.

진정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 주님을 위하여) - 이처럼 안타까이 말씀하시고 있다.-하고 있었는지  다시한번 들여다 보고 반성할 일이다.

 

 

5.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솔직히 나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차리고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습관적 이기주의에 빠져

주님은 안계시고

행위만 남는지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동안 그리도 뜨겁게 주님의 열정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결국 행위와

자가 만족만 남는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져 내려오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결점에 대하여 어찌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오늘 처음 서두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후 말씀이 임했다는 소리가 묵상 내내 세번이나 나온다.

여기에 답이 있다.

 처음 구절을 대하면서 난 옛날 사람들은 참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단 하루라도 주님의 말씀을 접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멍하여 지고

세상의 것에 자꾸만 갈등하고

마음이 갈라지고 있는 나를 거기, 그 시대에 대입하면

매일이 아닌 가끔 임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 실체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할지라도

임하시지 않는 그 공백의 시간이 참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바로 이것이다.

매너리즘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빠지고

스스로 자가당착하는 위험에 빠져 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말씀으로 자신을 되뇌어 보아야 한다.

 

 스가랴님은 주님의 선택을 받은 선지자의 자격이 있으신 성장한 분이시기에 가능할 지 몰라도 평범한 우리로서는 구약시대와 같이 가끔 임하시는 말씀으로 이 세상의 유혹과 힘든 세상의 풍파와 사단의 우는 사자와 같은 공격 속에 온전히 기독교 인으로서 서 있기가 힘이 드는 세상이다.

당연히 우리가 나갈 예상되는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적당히 기도하고 적당히 봉사하고 적당히 구제하며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것 뿐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러다 보면 그 모든 선한 주님의 행사가 그냥 우리의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가만히 우리의 속을 들여다 보면 '주님의 영광'이니 '나를 위하여 즉, 주님을 위하여'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오늘 벧엘에서 돌아온 경건한 듯한 , 존경하기에 마땅한 분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존경해야 될 듯한 기독교인으로 딱딱히 굳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매너리즘의 딱딱한 존경 기독교를 내 자식들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대물림 시켜 자칫 그들로 주님의 준엄한 경고의 대상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벧엘에서 성전에 온 자들은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9.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 주님

이 딱딱한 자에게 긍휼의 마음을 주소서' 

 올 초 기도할 때 주님께 구하던 내용이다.

중보자가 되게 해달라고..

지금은 많이 무뎌졌다.

그냥 습관적으로 행하였었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는 시간이 10분이다.

타자마자 잠시 눈을 감고 그 안에 타신 자들을 위해, 말씀 묵상을 인도하시길 기도한 후 큐티 집을 들여다 본다.

 버스 안에 드나드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켜져 나오는 아침 뉴스

흔들거리는 쇽옵서바 부족한 버스의 승차감

....으로 집중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길은 참으로 귀중하다.

하루를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시작을 스가랴님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받다가

벧엘의 사람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아차 하다가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행동의 원칙을 말씀하시기에 '그래'했다.

'귀한 주님께서 오늘도 내 어지러운 인지체계를 바로 잡으시려는 구나...' 하고

기뻐하는 순간에

연세드신 중후한 60대 신사 분이 내 앞에 서신다.

'3정거장 정도 남았는데 그냥갈까?' 하며 주위를 보아도

예전과도 너무도 다른 젊은이들의 무감각한 반응을 안타까워 하며

일어나서 권유하기엔 내 나이도 중년을 치달리는 데 쑥스럽기도 하다.

 큐티도 계속해야 하고 ..

그러나 ,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

과부를... 하시는 말씀을 접하면서도 그냥 있기에 마음에 부담이 든다.

'그래.

나중에 굳어지는 마음을 회개하는 고통보다는 잠시 복잡한 마음이지만 주도적으로 행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아무 소리하지 않고 일어섰다.

그냥 내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당연히 그 분 노인께서는 허겁지겁 앉으신다.ㅎㅎ

미안해 하실까봐 문 앞으로 슬쩍 나가 섰다.

별거 아니지만 난 기쁘다.

주님의 말씀을 난 준행했다.

승리했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깨달은 게 있다.

 

( 어리석고 갈급한 이 영혼은 하나님 만 바라나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 누구나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 죄가 아닌 듯 하며 큰 죄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매너리즘'이라는 이름 붙은 게으름이다.

태만은 죄가 아닌 듯 다가와서 가장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물론 회개와 십자가의 보혈로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지만

돌이키기 위해 인식하는 과정도 쉽지 않을 뿐더러

몸에 굳은 생활의 방편을 바꾸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그러기 전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시적으로 성공해도 그것은 또다른 매너리즘을 불러 일으키고 나중에는 교만까지 더 해지는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을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장래가 없다.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주님 예수님이 계시다.

그분으로 인한 성령이 계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노력은 의미가 있다.

매너리즘에 빠질 단단한 벽돌을

잠시 눈을 돌려 매일 매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려는 노력만 하면

천성적으로  딱딱한 이 영혼이 촉촉히 젖어

굳어버릴 위험성에서 많이 벗어날 챤스가 생긴다.

 

 주님을 믿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것이다.

마음이 곤고하고 갈급한 것.

주님을 불러도 주님의 응답이 없는 듯한 것.

 메마름.

 

주님을 불러도 듣지 아니하시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고 두려움이다.

그러한 대우를 받지 않기위해서라도 날마다 말씀을 접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내 속의 잘못된 오류를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이 내 뜻이 되고

그 사이에 하나도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이

내속에서만 머물러서는 또 안된다.

이웃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이 들어나야 한다.

그 분이 나로 하여 영광을 받아야 한다

'쟤, 예수님 믿고 달라졌어'

소리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을 이웃을 향해 전도로 보답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기쁨을 견디지 못하는 전도.

 

 

 

적용

 

1.  이웃을 긍휼이 여긴다.

  그동안 과부같이 , 고아 같이 , 나그네 같이 , 궁핍한 자 같이 이웃을 대했던 마음이 있으면 내려 놓겠다.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도 오시는 그 분들을 오늘 하루 만큼은 인애와 긍휼로 대하겠다.

 

2. 성경을 5장 읽겠다.

 

3.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하면 들어나는 하루가 될 것인가 생각한다.

 

 

기도

 

주여.

아침에 말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아주 적은 부분이고

들어나지 않는 부분이지만 성공하게 해주심 또한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에 하나하나 맞추어 가는 과정이 또 어찌 그리 기쁜지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시는 기쁨 또한 감사합니다.

주여

당신의 이름이 이 적은 자로 하여금 세상에 들어나길 원합니다.

기쁨을 기쁨으로

평강을 평강으로

깨끗하고 정결하게 전파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아침 귀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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