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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은 주님의 사랑이다.(출 9:1-1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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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은 주님의 사랑이다.(출 9:1-12 )

주하인 2008. 4. 9. 11:56

제 9 장 ( Chapter 9, Exodus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생축 곧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며 
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5.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가라사대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생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모세에게 이르시었다.

 바로에게

정한 기간 동안

애굽의 동물에만 악질이 있을 것이라고.. 
 
 
7.  바로가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그렇게 하셨다.

하지만, 바로는 아직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미련함은 어디까지인가?

이 미련함은 비단 바로 만의 이야기인가?

우리 주위에서도

내 안에서는 없을까?

정말?

 그렇다면

그 혼자 만이 그런 어리석은 미련함을 저지를 수 있을까?

내적 언어에 대하여 어제 썼지만

그런 '설마'  '그래도'.. 라는 단어들은

혹시 우리가 생각지 않으려고 그리도 애를쓰지만

영적 존재들에 의한 것은 아닌가?

만일

귀신이 어딨어..

영혼이 어딨어.. 라는 비웃음이 스치지는 않는가?

그렇게 믿는 자라면

무신론자이고 여기에서 이글을 읽을 이유가 없는 자들이다.

보는 것만 믿는 자들.

 그런데 기독교인이면서도 '신비적' 현상에 대하여

터부시 하는 생각들은 아주 많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 '성령님"을 되뇌이고

눈감고 기도는 하지만

그 분들이 '영의 세계'에 있음을 부인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진짜로 믿는다면

귀신이나 사단의 영적인 존재함에 대하여

아니라고 할 논리적 근거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러한 미련함을 가져오고

강팍한 굳어짐을 가져오는 내적언어들은

그들의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난

중년이나 노년기,

오래된 질병으로 쇠약해진 분들이

자책이나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어갈 때

그들이 내 뱉는 부정적 소리의 상당 부분이

혹여

'영적인 존재'의 속삭임을 입으로 내뱉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 '바로'의

저 무지하게도 ..어리석은 면이

과연 왕의 자리에 있는 자의 '지적 능력'이

저정도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렵기에

더욱 더 그렇다.

ㅎㅎ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내 안의 소리가 다 내것이 아님을 알면

마음의 무거움이 많이 가벼워 진다.

 

성경에도 많이 나온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두려워하며 .. '

' 다툴 자와 다투고 싸울 자와 싸우세요.. ( 시35:1)'라는 구절들.

 괜히

귀신 같은 영적 존재의 속삭임에 대하여

어찌 내가 싸워서 이길 것을 기대하는가?

 나쁜 마음이나 어두운 생각은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 분이 싸워주시고 그 분이 이겨 주시길 기도하고

믿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걸 하는 것 조차 막는 자기 연민이 문제지만

그러한 것은

위에서 명기한 대로

영적인 존재의 장난임을  '인지하고'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하고'

내려 놓은 다음 믿어 버리고 말아 버리는 게 중요하다.

 

 바로는 그걸 못했다.

그래서 미련 떨고 있다.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신다.
 

이상하게 어느 때는 모세 단독에게

어느 때는 모세와 아론에게 하신다.

 지금 이 명령과

처음 바로와 만나 지팡이를 뱀으로 변케 하는 장면에서 그러셨다. 

 가축들에게 하는 재앙은 안그러셨었는데

사람에게 해당되는 재앙일 때 그러신가?

모세는 마음이 약해서인가?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실까?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투표를 마친 후

가만히 잠시 묵상을 해 보았다.

 모세는 한번도 배제된 적이 없었다.

아론은 모세가 약해질 것 같은 상황,

특별히 사람에 대하여 직접 영향을 줄 듯한 재앙이 있을 때만

같이 포함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한번 도 빼 놓지 않고 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통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기도를 깊이 하여

직접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방법도 있을 수가 있겠고

다른 사람의 계시를 통하여

주위 환경의 변화가 도저히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경우가 아닐 수 없음을 알 때... 등

여러 경우가 있을 수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성경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오류가 적을 수가 있다.

 계시나 응답 등의 신비적 추구를 통하여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의 농간이 개입할 여지가 적지 않음을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많이 보고 있다.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름길이며

가장 안전한 통로이기도 하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책이란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말씀은 항상 있고 썩지 아니하고.........라고도 되어 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다정한 친구처럼 세밀한 말씀을 주실 때가 너무도 많다 .

말씀을 가까이 하다보니

어느 새 삶은 변화되고

내면의 왜곡된 부분이 많이 펴져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너무도 많다.

놀라운

끝이 없는 절대의 지존자이신

그 분 안에서

내 일생이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가고

그 나가는 끝이

반드시 '선'임을 확신하게 될 때 느끼는

엄청난 자부심이 날 기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

 가장 건실하고 흔들림 없는 길이다.

말씀을 통하여

늘 주님 앞에 서 있는 체험

그 체험은

모세는 단 한번도 주님의 말씀에서 제외된 적이 없음을 보이시는

그 분의 특별한 대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가?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사도 바울 등의 훌륭한 선진들을 통하여

세상에 베풀어진

하나님과의 통로가

이처럼 쉽고 놀랍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그러기에

날마다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이 게을리 됨은 곤란하다.

이것은

비단 모세와 같은 신비적 응답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바로의 그 어리석은 강팍함

영혼이 사단으로 멍듦을 막는

유일한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적용

 

1. 성경 여섯 장 읽겠다.

 

2 . 수요 예배 가겠다.

 한동안 삼일예배를 빼 먹었었다.

 

3. 바빠도 빨리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하겠다 .

 

4.  바로의 강팍함이 나에게는 없는지 돌아본다.

 내가 잘했다고 주장하고 뜻을 굽히지 않음은

바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타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해본다.

 

5. 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말씀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모세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관심의 결과 이었다.

모세 자신 탓이기 보다.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라도 묵상을 마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이 놀라운 행운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모세의 한번도 빠지지 않은

주님과의 교통이

모세를 정말로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닫고

큐티를 하루라도 빼먹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려는 그 노력을

주님께서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 지

알 수 있게 해주심을 보고

감사드립니다.

특별한 말씀 사랑.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라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겸허히 섬이

모세 만의 의도가 아니고

주님의 편중된 사랑의 결과이었음을 알기에

한편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서의

행운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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