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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네 그 & 주[렘51:33-44] 본문

구약 QT

나 네 그 & 주[렘51:33-44]

주하인 2024. 8. 21. 06:47

부제) 노예 근성 죄의 노예 그리고 자각

      인생의 지팡이 나의 깨달음,자각 그리고 긍휼.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이 '바벨론'...

왜 '딸'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 

딸처럼 사랑스럽다는 것은 당연히 아님에도 

그러한 표현은 '반어'법이긴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시선^^;이 뵈는 듯하여

한번 내 생각과 일치하는 지 

AI들의 답변을 긁어다 놓았다.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

이스라엘 유다를 위한 '인생의 지팡이'...'연단의 도구'..

하지만 쓰고 버리시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셔서 나타내 보이시는

'긍휼'의 한자락..^^;

 

하지만 우리네의 수준까지 맞추어 

어쩔 수 없는 상벌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눈물의 징벌... 

그런 의미 아닐까?

 

검색해서 놓았고 

나중에 다시한번 읽어 보아야 겠다.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그리고는

그들을 향한 '예루살렘'의 시선에서 말씀하신다. 

 

그동안 너무 두렵고 무섭고 힘든 '철퇴'이자 '세상의 망치'이며

자신들을 철저하게 눌러 놓은 바,

'노예'처럼 

노예의 시선으로 눌려서 단 한톨도 반항을 하지 못하던 그들이

마침내 '자각'... 

자신들이 '영적인 포로'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몸부림치는 '자성'.. '자각'의 몸부림이 아닐까?

 

 '나를'.. .'나를 '...나를.. '나의'.. .. 나를' .. 하면서

'내가 받은'.. '내 육체에 대한'.. 

그들의 학대가 .............하면서

'나'.. '나'.. '나'... 한다. 

 

 자각이 맞다. 

자성이 맞고

 

'노예근성'이라 한다 

'죄의 포로'

'사단의 흔적'............

 

마침내 때가 되어 

끌려가서 처절히 노예로 살면서 그게 숙명인양 살던 그들,

'유다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드디어 때가 되어

너무나 큰 두려움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깊이 깊이 무의식 속에 눌러 놓았던 

'자신들의 존재와 권리' 를 깨달아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 내.. '가 끝없이 되풀이 되는 거구

그것.. .그러할 상황임,

드디어는 '입으로 선언'할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시던

주께서 '미리 읽어 주심'이시다. 

마치 '어린아이 말 배울때' 

한 소리 튀어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부모님의 시선처럼...

 

그것을 "예루살렘이 말하리라"라고 

주께서 읽어 주심이다.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송사를 듣고 를 위하여 보복하여 의 바다를 말리며 의 샘을 말리리니

 그리고 주께서 

"내가" 하신다 .

당연히도 '윗구절의 예루살렘 , 나' 가 아닌 

하나님 '나'.. 말씀이시다. 

직접.. 내가 .. 일대일로 유다백성들과 대화를 하시며

말씀하시는 거다 .

'일대일'의 '하나님' 말씀이시다. 

그 분이 직접.. .^^*

 

내가 '네'...예루살렘의 송사를 듣고 

'너'.. 예루살렘인 '나'.. 우리를 위하여 '보복'하고 

'그'.. 바벨론의 샘과 바다를 말리신다신다 .

 


무엇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런 생각.. 

당연히 자유인인 우리는 어찌 그런....하지만

과연 포로..

그 위태한 고대 중동의 포로가 

그런 생각을 있을까?

 어릴 때부터 가느다란 줄에 묶여 살던 코끼리가 

몸집이 커다라져도 가느다란 끈을 끈을 끊을 생각조차 안한다는

너무도 현실적 '멍에' '묶임'.. 사단의 끈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함 , 

그런 묶임 마져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끊을 수 있고

끊어질 때가 있고

끊을 수가 있음을 

오늘 말씀하시는 거다 .

 

 딸, 나...내.. 나.. 그를 대비시키시면서

'예루살렘'인 내가 깨달을 때가 올 때가 있고

그게 바로 오늘이라 말씀하시는 거다 .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바벨론의 바다를 말리시고 샘을 말리실 것을 보게 될거니

걱정하나 하지 말라 ...신다. 

감사하다. 

 

 

주님.

주님은 아시오매

제가 또 

아니 저를 또 묶으려는 

오래된 '노예 근성'의 소리가 있는 듯합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그냥 사로 잡혀

마구 두려워 하려고 하는 그것 말입니다. 

제 성품처럼

제 인격의 일부처럼 그냥 달라 붙어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것.. .

그것을 오늘 또 바라보게 하십니다 .

그랬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들여다 보니

요며칠.. 근거없이

너무도 익숙한 되풀이 두려움이 절 살살 묶으려 하는 듯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거.. 가느다란 코끼리 끈이고

풀려날 시간의 '바벨론 포로 유다백성의 심사'가 그렇다... 함을 보이십니다. 

 

그랬습니다. 

그 처참한 사단의 상징인 바벨론의 폭거에

그게 운명인양 끌려 다녔지만

엄연히 우리는 '영적 유다인'이고

그 아픔과 두려움의 정체는 '망치' 철퇴였지만

그를 흔드시고 움직이는 가장 궁극의 존재는

'바벨론'이 아니고

그를 흔들게 만드시는 주님의 뜻이심을요.

 

주여.

잊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이 내대신 

멈추시고 

말리시며

이제 때가 되었다. .. '예루살렘아' .. 하시면

그냥 자유로운 제가 될 수 있음을요.

 

주여.

그 자유를 기다립니다. 

주여.. 

그동안의 그 폭거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그들의 그러함이오니

그 무서움에 대한 자각이 

그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의 시선이신

딸 바벨론..........처럼

긍휼로 보게 하소서.

 

우리의 인생광야를 위하여 허락되어진

인생 지팡이  삶의 막대였으며

그들도 그리할 수 밖에 없던 운명이었음을 가련히 여기게 하소서.

그런 마음 주소서

 

나 혼자 되지 아니하오니

그를 그리 포용할 마음을

제게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절 ''  바벨론에 대한 고찰 

 

#  내 질문

예레미야 51장에서 바벨론을 왜 '딸'이라 표현하셨을까? 애정이나 아쉬움이었을까? 불신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이시며 들어서 쓰시던 자 이기에 불쌍해서이셨을까? 무슨 표현인가? 아니면 불신자는 결국 이렇게 버려질 것이라는 반어적 표현일까? 설명 해줘

 

 

 

#1. Copilot 의 대답

예레미야 51장에서 바벨론을 '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애정과 아쉬움: '딸’이라는 표현은 종종 애정과 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면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잊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셨고, 그들의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계획이 있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1.
  2. 심판의 예고: '딸 바벨론’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는 바벨론이 타작 마당처럼 짓밟힐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다가왔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2.
  3. 반어적 표현: 바벨론을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결국 버려질 운명임을 반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3.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예레미야서의 전체적인 문맥과 일치하며,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하는 데 기여합니다.

 

 

#2. Gemini

예레미야 51장에서 바벨론을 '딸'이라 표현한 이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

예레미야 51장에서 바벨론을 '딸'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한 단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학적으로 매우 흥미롭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왜 '딸'이라고 표현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하고 단 하나의 답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을 통해 이 표현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애정이나 아쉬움:
    • 과거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향한 애정이나 아쉬움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마치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멸망을 앞두고 안타까움을 느끼셨을 수 있습니다.
  • 불신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바벨론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 비록 불신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연민을 가지셨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대상이기에:
    • '딸'이라는 표현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 바벨론을 '딸'이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어야 했지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을 수 있습니다.
  • 반어적 표현:
    • '딸'이라는 표현은 바벨론의 교만함과 허영심을 비꼬는 반어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 강대한 제국이었던 바벨론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표현인가?

위에서 제시된 다양한 해석들을 종합해 볼 때, '딸'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의 감정이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애정과 심판의 공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향한 애정과 동시에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주권: 강력한 제국이었던 바벨론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레미야 51장에서 바벨론을 '딸'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복잡하고 심오한 마음을 드러내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위해서는

  • 성경 원문: 히브리어 원문을 직접 살펴보면 더욱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문맥: 예레미야 51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딸'이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 역사적 배경: 바벨론의 역사적 상황과 예레미야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질문해주세요.

참고 자료:

주의: 위에 제시된 내용은 다양한 해석을 종합한 것이며, 정확한 해석은 개인의 신앙과 해석 방법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3. naver Cue

바벨론을 '딸'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벨론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교만해져 하나님을 배신하였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셨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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