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때늦은 후회는 있어도 때늦은 회개는 없다[마27:1-10] 본문
언제나
주 앞에만 가면
내 마음
탁트인다
십자가 보혈은
내 찐득한 마음을
깨끗게 하시고
예수님의 부활은
내 지친 육체에
새로운 의욕과
힘을 주시며
성령은
내 영혼에
물 붓듯 생기를 부으신다
오직
내가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서라도
주님 십자가 앞에
가는 것이다
그게
회개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지만
십자가 앞에 다가서는
회개에는
늦음이 있을 수 없음이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유다.
불쌍한 인간이다.
하나님 곁을 수년간 따라 다니면서도
인간적인 생각, 가장 세상적으로 똑똑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드디어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죄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런가?
그는 굳이 히틀러나 작금에 펼쳐지는 수없이 많은 추악한 죄들에 비하면
그는 새발의 피인듯 하다.
최소한 그는 '싸이코 패스'는 아닌듯하다는 말이다.
보라.
'스스로 뉘우칠' 힘이 있지 않은가?
싸이코 패스는 그런 마음마져 들지 않는
진짜 '사악한' 영혼들이다.
그것에 비하면
유다는 자신의 지혜에 발걸려,
세상의 적은 욕심에 눈감아 버리고
아마도 정확히 짐작하긴 힘들지만
메시아 내지 왕으로 따르던 예수라는 분의 정체가 별거 아니었다는
너무 계산적인 실망에 따라
순간적인 '화', 내지 실수에 따라 ,
혹은 밀고하여 나올 '돈'의 욕심에 따른 실수 일 수는 있지만
그게 비록 예수님을 판 실망스러운 결과이지만
최소한 그는 나름 이해할 만한 소지가 있고
더구나 그는 '후회'를 하는
인간적인 약한 마음이 있음으로
최소한 싸이코 패스의 동정하기 어려운 '악'은 아닌 듯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그는 역사에 남은 죄인이다.
그것은 '예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해당 되는 일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자,
거기에 '후회'와 더불어 다시 한번 '예수'님을 찾지 않은 죄 때문이다.
그것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 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는 별거 아닌 죄일 수 있다 .
아니 오히려 그는 '후회'하는
마음 약한 심성을 지녔다.
어쩌면 가정교육을 잘못한 그의 부모 탓일 수 있고
유전적 특질 탓일 수는 있는 죄이기에
가련히 여길 만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자다.
하지만, 그의 죄가 진정한 죄임은
예수님께서 그리 오랫동안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죄,
'예수님을 판 죄'와 더불어
예수님을 끝까지 찾지 않은 죄 때문에
역사적 '죄'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유다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유다는 '후회'를 했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이 모든 죄 사할 능력이 있으심을 고백하지 않은,
즉, 회개 ..하지 못함이다.
후회는 하되 '회개'는 못함이다.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에서 보아 알수 있듯이
'자신'이 주가 되어
자신의 감성에 맞지 않아 눈물흘리고 돌이키는 것은 '후회'다.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돌이켜 보아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을 '후회'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감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 정의'에 의한 나름의 기준미달이란 스스로의 깨달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
아무리 깨끗한 것 같고
아무리 가련한 것 같아도
자신이 주인이 되는 '후회'의 행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마져 없으면 '싸이코 패스'지만..
세상엔 날로 그 싸이코패스의 비율이 높아지고
이 땅은 점차 지옥도가 그려지고 있어
그나마 '후회'라도 하는 자들이 다행이긴 하지만..
어쨋든 후회는 때늦으면 소용없는 것이고
자기 자아를 갉아먹어 감정의 낭비를 가져와
'우울'의 함정에 빠져 극단의 경우는
유다의 경우와 같은 ' 자살'같은 극단의 자기 파멸의 길이다.
그렇다 .
세상의 사람들은 아무리 '죄'를 몸부림치고 빠져 나가 려 하고
후회와 도를 닦을 요량을 가져도
일시적 감정적 완화는 있을 지 몰라도
절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쌓임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그들의 결국은 때늦은 후회요
해결되지 않는 '자아'의 올가미일 뿐이다.
한편, '회개'는 다르다.
회개는 완전히 돌이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움은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이 되기 위하여는 자아가 죽음이 있어야 한다.
후회는 자아의 기세등등할 기회를 주어 오히려 나중에 자신을 갉아 먹게 되지만
회개는 다르다.
자아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 영혼의 지성소에 거하시면
놀라운 평강이 자리하게 된다.
부활로 인한 자아의 죽음은
'십자가' 앞에 나가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을 의미한다.
그렇다 .
그러한 '인간'의 제사행위로서는 도저히 가능치 않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결단을 하시고
당신의 아들이시자 당신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진정한 '제사 ' 인 '십자가 못박히심'을 실행하신 것이시다.
매일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매일 매일온전한 부활의 영이 됨으로
매일 새로운 피조물로서 세상을 살다가
성화된 영혼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렇다 .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지만
회개에는 늦음이 없다 .
그러기에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온갖 갈등으로 영혼이 갈기 갈기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있을 때
어서 어서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
십자가 앞에 기어서라도 나와야 한다.
나와서 그 앞에서 고개 숙이고 온갖 죄를 고백하는 순간,
그것이 어떤 죄라도
이전 것은 다 없어지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온전한 돌이킴의 역사를 목도할 수 잇게 된다.
영혼에 새로운 희망이 돋아나
날아갈 듯하게 된다.
새롭게 되는 개운함,
난, 그것이 이 땅에서 허락받은 '매일의 부활'이라 느낀다.
하나님 말씀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늘 서 있는 결심.
그래서 적은 죄라도 얼른 얼른 예수님 앞으로 가져와 고백하는 것,
그리하면
성령의 그 기쁜 평강이
내 영혼을 사로잡는 느낌.
그것이 좋아
난 지금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주님.
오늘은 후회와 회개에 대하여 대비시켜 말씀을 주십니다.
일상에 어떻게 적용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살면서
내가 원튼 원치 않든
지은 죄 지을 죄 짓고 있는 죄들이
나를 둘러 쌓을 듯합니다.
주여.
이럴 때
이 죄들의 부산물인
가슴앓이 아픔 속상함 억울함 우울... 등의
악한 것들이
잠시라도 내삶을 왜곡 시키지 않도록 도우소서.
우선 무조건 예수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소서.
저로 인하여 고민하고 힘내려 애쓰는 헛된 노력을 안하게 하시고
양심을 가장한 헛된 후회로
내 스스로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소서.
주여.
어떤 일이 있어도
십자가 앞에 나가는 제가 될 수 있도록 하시되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그러기 전에 미리 피할 수 있는 지혜와 결심도 허락하소서.
주여.
늘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세대와 세대간
종족과 종족간
심지어는 인간과 기술과의 단절까지도 거론되고 있는
세대입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 주여.
십자가에 더 가까이 유지하길 원합니다.
주여.
부디 붙드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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