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두려움이 문제일 때[요6:16-29] 본문

신약 QT

두려움이 문제일 때[요6:16-29]

주하인 2022. 1. 19. 08:24

 

(펌)

 

 주님이 자리 비우시면

주님의 임재를 놓치면

그곳이 바로 '빈들'이고 

풍랑이는 '빈 밤바다'다.

 

 인생의 모든 어려움은

근원을 짐작키 어려운 두려움이 기본이지만

주님께서 

'내니' ... 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기쁨이 차오르게 된다. 

 

그것이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동기다. 

그것이 살아가는 에너지의 근본이다. 

그것이 영생을 위한 가장 올바른 기회다.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내 두려워할 것들.

'저물매'

'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떠나 광활한 것을 마주하는 ' 어색함.

괜히 너무 넓고 어스름하고 익숙지 않은 습기와 ................싫다. 

격한 무서움 , 

실은 대상이 있는 '공포' 보다는 '불안'이 두렵다. 

그 대상보다 대상 뒤의 것들이 싫고 힘들다. 

'저무는 것'은 쇠퇴하는 것, 

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고 

너무 넓고 광활한 것은 괜한 눌림을 초래하는 듯하다. 

그게 어렵다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두려워 할 것들이 

계속 나온다. 

 '배'..

맑고 쾌적한 유람선과 달리

어둡고 동력없고 흔들린다면 ... 싫다. ^^;

 

 '어두움'

'주인없는 홀로'의 외로움...은 

정말 싫다. ㅠ.ㅠ;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거기에  '큰바람' 즉, '풍파'까지 겹치고 

파도로 대표되는 '환란'은 정말 싫다. 

 

 잘 자리 잡고 이정도면 되었지 싶을 때다가오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넘어서 정말 싫다. ㅠ.ㅠ;;.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두려움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

매사 모두 두렵다면 그건 문제다 .

 

그런데.. 

평생이나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그렇다면 

불안장애 내지 

공황 장애 아닐까?

 

 심지어는 좋고 아무렇지 않아도될.. 

아니 '예수께서 오시'는데도 두려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않는가?

 

그런데.. 

두려움은 이지를 내려 놓게 한다. 

기뻐할 것 마져 두려워 하게 하면

그것이 문제다.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하지만

주님이 전제가 되면 

그때부터는 달라진다. 

 

'두려움' 마져 '예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지지 말아도 될.. 

아니 오히려 그보다 

그 두려움을 매개로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더 '기뻐'질 이유와 근거가 된다. 

 

 그리고 '가려던 땅'.. 

이 의미없고 두려움의 땅,

하루 빨리 이 육신 벗어버리고 싶은 

이 인생의 모든 두려움과 버거움을 내려 놓고

'가려던 그 땅'이 이르게 되기 위하여서는

'주님을 영접'해야한다. 

'내니 두려워 말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매일의 삶에서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매일 사모하고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분을 놓칠 때

날이 저물고 

바다의 두려운 풍파와

갈데 모르는 방향상실..............이 모두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오직 예수님.

오직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가슴에 다시 품고 

살아가는 하루 되어야 하리라.

 

 

 주님.

그랬습니다. 

전........모든게 두려웠습니다. 

주님 모를 때는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매몰될까 당황해하며 

겨우 하루를 버티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다가오셔서

저를 붙드시고 어루만지시고 감싸시며

제 발길을 하나하나 인도하시면서

변화되는 수없이 많은 '오병'과 '이어'의 기적들을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저무는 시간,

인생의 나이가 그렇고

육신적으로도 그러며

허락되어진 '영적 '상황도 

'저물며 주님 없으신 풍랑'에 마주하는 곳으로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가만히 묵상하며 깨달아 지는 게 

'두려움'이었습니다. 

모든 관계 속의 파생된 두려움,

익숙한 것에서 또다른 새로움에 노출되는 두려움.

제 죄이거나

허락되어진 주의 다른 뜻에 의하여서 인지 

옳게 알수는 없지만

주님의 임재감이 옅어짐으로 인한 두려움...

의미가 상실되어진 것 같은 

메마름에 대한 두려움...................

그로 파생되어진 

제 산부인과의사로서의 삶의 트라우마에 의한 

자꾸만 커지는 .......................

두려움이 맞았습니다. 

 

주여.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 무섭게 

주께서 

풍파와 어두움의 무거움을 뚫고 오셔서

'내내 두려워 말라' 심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주여.

내 갈 곳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이 어둠을 뚫고도 

주님 오시고 주님 말씀하시니 그렇습니다. 

주여.

힘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묵상하며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나이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의 미련을 넘어서자[요6:41-59]  (0) 2022.01.21
주께 주를 나는 나도[요6:30-40]  (0) 2022.01.20
다 아시지요?[요6:1-15]  (0) 2022.01.18
주의 뜻대로만[요5:30-47]  (0) 2022.01.17
들고 가버릴 내 자리[요5:1-15]  (0) 2022.01.1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