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돌아볼 때(민1:1-54) 본문
제 1 장 ( Chapter 1, Numbers )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께서는 애굽땅에서 탈출한 후 즉시가 아니시고
2년 2개월 2일 째가 되서야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계수'를 허락하셨다.
3.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계수의 내용을 하나 하나 모두
일일히 지도 하셨다.
49.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러나 그중에서도 '레위' 지파로 대표되는
영적인 부분은 특별히 관리하길 명령하신다.
'계수'
내가 가진 것이 얼만지 돌아보는 것.
다윗이 하나님께 혼난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채
자신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계수한 바에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확히 계산하여 계획을 세우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어찌 하여 나쁘단 말인가?
인간의 눈으로 만 보아서는 당연히 해야 할 바이다.
어쩌면 '성공'으로 가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일 수 있다.
'긍정'의 힘이나 어떤 것도 옳을 수가 있다.
하지만 다윗의 혼난 바를 염두에 둔다면
거기에는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던가?
계수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에만 의지할 위험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다면야 문제가 없지만
결국 '진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만들어진 우리고
우리는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계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계수는 '광야'에 나온지 이년이 넘어서야
하나님께서 '갑자기 ' 명령하신 바에 따른다.
시작하자마자 하시면 얼마나 더 좋을까?
인생 살다보니 참으로 어이없어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어디까지가 옳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어디까지가 영적이고
또 어디까지가 '방치'인지 구분하기 힘들때도 있다.
인간의 눈으로 생각하면
광야에 나오자 마자 '계수'를 하여
대책을 세우고 임원들을 세우고
이사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하여
나갈 바를 힘있게 하고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년 이개월 이일 ' 째가 되어서야
계수를 명하셨다.
거기에는 영적원리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도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 하나고
우리의 계획이라는 것이
미래를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다는 것이 또 당연한 것이며
기다리는 훈련을 시키심도 그렇다.
그러기에 '계수'는 하나님에 속해 있다.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시는 바가 크다.
요즈음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또하나의 이슈가 되어가는 것이 있다.
'이슬람 채권'
이른바 '슈크크'법이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이명박 대통령의 하야 ' 문제까지 거론할 정도로
큰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글쎄, ..
그 채권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거나 도입에 암묵적 동의를 하신게
그 분 MB 장로님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계수'를 시행하고 있는 우를 범한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조금은 더 자제하게 하는 것이
그 분 대통령 장로님의 역할 이 아닌가 싶다.
함부로 하나님 앞을 나서는 '계수'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하고 레위지파는 세상의 계수의 범주에서 넣지 않기를
하나님이 오늘 강하게 말씀하신다.
살아가면서 지금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적 분위기가 드물었던 것 같다.
유사이래 가장 빨리 모든 것이 변해 간다.
세상을 하나로 묶은 정보 통신의 기술은
전세계가 하나인양 행동을 하게 하고
그것에 따라 아랍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서로 서로 경쟁을 통해 아주 강렬한 발전을 도모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이익'을 하나라도 놓치는 것은
죄악이나 미련한 죄로 치부되기 마련이고
당연히도 사람들 사이에는 '버퍼'가 없어진다.
그 버퍼가 없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지고
영적인 고갈을 의미한다.
사람들 사이가 냉랭해지고
이전에 보기 드문 악한 일들이 매일 같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자행되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 늘어난다.
레위지파를 '계수'하지 않고
그들을 따로 남겨 놓는 것은 - 하나님을 위한 부분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작금의
시대에서는 미련한 죄...일 수 있다 .
그러나 주님은 그러라 하신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시는가?
나에게 어떻게 적용을 하라 하시는 것인가?
계수는 나에게는 어떠한 부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던가?
지난 주말 당직방에서
잠시 침대 맡에 걸터 앉아 묵상을 하던 중
'난 허상의 세상을 살아가되
그 허상의 세상 중 진리를 향해 가는 자가
나이지만
그 허상의 세상을 터부시하고 수도하길 바라지는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허상을 살되 그 허상에서 진실을 캐어내길 바라신다'는 느낌이 날 사로잡았다.
세상의 일에 조금은 도피해 사는 듯,
허무주의 적 성향을 띄어 온 것이 이전의 내 삶의 행태였고
그러기에 당연히 성공이나 명예 같은 것은
내 관심의 밖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기에
겪는 갈등이 많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오면서
그러함에도 살 이유를 찾아서 그 에너지로 살아왔지만
그러함에도 세상에 큰 매력은 느끼지 못했음이 사실이다.
적극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배우고 경쟁하여 성공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었다.
아직도 솔직히 경멸 비슷한 감정으로
세상의 대부분의 그러한 사조에 대하여 비웃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부족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의사라는 신분 탓에
더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 하나님은 그 안에서의 진실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조금은 더 적극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계수라는 것.
나.
이전의 그러한 나의 성향은
나름의 가장 부정적인 계수를 통하여 나온 결론이 어쩌면 '허무'였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놓으라는 것은
머리를 비우라는 것이시다.
그 계수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혹여 부정적인 결론에서 '손해볼 지 모르는 상황'을 '도피'하는 것을
피하라는 뜻이신지도 모른다.
그 연습은 '말씀 가운데서 내려놓음' 을 통하여 많은 훈련을 받았었다.
하지만 주님은 손해볼 수도 있는 부분까지 내려 놓으라 하신다.
레위지파의 계수 배제.
그렇다.
그런 부분이 인생에서 있어야 한다.
특별히 나.. 그렇다.
욕심은 없지만 손해보는 부분은 절대로 용인하지 못하는 팍팍한 성품이
아직도 내 속에 그리도 많이 남아 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반긴다.
큰 아들이 이제 개학을 맞이해서 자취방으로 짐싸가지고 나간
집에는 아내 혼자 있다.
수술 전과는 달라진 것이 없다.
현관 문을 들어서자
아내가 반가이 나오며 두팔 벌려 맞이 한다. ^^*
그러나, 변화가 있다.
아내의 머리에 모자가 씌워져 있다 .
아직도 수술한 왼편의 얼굴의 부기가 덜 빠져 눈이 약간 내리 띄여져 있다.
그 아내가 날 아주 아주 반긴다.
가슴이 미어지려 한다.
감사해서 그렇고
속상해서 그렇다.
아내와 이야기 하던 중
아내는 병문안 오신 분들의 들고 오신 아주 많은 위로금- 아이구...
아내는 정말 착하게 살았다. ^^* - 의 반을
아시는 목사님의 사모님의 수술 위로금에 내 놓자 한다.
나... 얼굴 굳혔다.
순간적으로 ..
솔직히 그 분 목사님..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다.
그 분 사모님은 전혀 모른다.
그런데 얼굴 아직 저렇게 부은 아내가
자신의 위로금을 타인의 위로금으로
그렇게나 많이 내 놓자 한다.
잠시 침묵을 했다가 결심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바....
'그러라..'
아내가 참 기뻐하며 활짝 미소를 띄운다.
순간적으로 아내의 얼굴이 참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의사지만 참 미련하게도 살았다.
그리 이재에 밝지도 못하고
지금 가장 인기 없는 과 중의 하나인 산부인과 의사로
그 중에서도 운신하기 힘든 중년 남자 산부인과 의사다.
그러함에 아내의 저런 결심은
어쩌면 '레위지파'를 계수에서 빼놓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모세일행의 심사일 수 도 있다면 과도한 생각인가? ^^;
어쩌면 '수크크 법'으로 단순간에 얻을 수 있는
한국의 이익은 대단할 수 있다.
인간의 계수로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레위지파를 계수에서 빼라시는 ' 하나님의 명령이다.
포기하기에 아프지만
반드시 인간의 계수에서는 빼어내야 하는
내것이 아닌 것.
나.
아직도 이 나이가 되어도
앞을 내다 보아도 뒤를 보아도 뚜렷이 살아온 것없다.
그러면서 자주 자주 주님의 원하심으로 생각되어 지는 부분을 생각해 보면
또 어떤 아픈 요구를 하실 지도 모를
정말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성공하지 못한 중늙은이 남자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더 늙기 전에 한번 멋지게 살아야 할
미래를 두고 기도하고 싶다.
그래도 어쩌면 그러지 말라시는 것도 같다.
오늘 묵상은 조금은 더 깊이 묵상해야 할 부분일 듯 싶다.
그러면서 그냥 그 마져도 맡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믿고 나가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지않아 든다.
내 초조함은 어쩌면 주님을 믿지 못하는 내 미련한 계수의 흔적일 수 있다.
어쩌면 내 미련한 지혜없음일 수도 있겠지만...
주님.
생각할 바가 많은 묵상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기다렸다가
주님의 말씀대로 계수하시는 모세의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그 모습 속의 모세님의 마음에는
이년 이개월 넘기 까지 기다리는 과정에서
'아주 늦은 시간'이라는 초조함이
그 분의 마음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거기에 대입을 해 보면요.
그러함에도 모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기다렸다가
정확한 계수와 통계를 얻음으로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을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을 믿고 기다리면 이러한 내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심을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
그 마져도 내려 놓고 기다리고 기도하면 됨도 알았습니다.
그러한 나를 받아 들이길 원합니다.
기다리고 결과마져 겸허히 받아 들이는 부분이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임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손해는 일정부분 하나님 앞에서 감수해야 함도 알았습니다.
그 손해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 통하는 기회가 됨도
레위지파의 계수 배제에서 알았습니다.
주님.
제 깨달음이 제 영혼 깊숙히 자리잡고
이 일상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각론적 부분에서
정확히 응용되어
힘이 있는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허상 속에서 진실을 바라보고
그 진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인생의 과정임을 확실히 깨닫게 하시어
허상을 살되 진실을 살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 잘 살다가
주님 곁으로 갔다는
누군가의 모델과 탄성이 되길 원합니다.
내
소리내지 않고 발하려 몸부림 치지 않아도
그들의 영혼과 인생에 진실한 하나님이
영향을 깊이 미칠 수 있는
제 삶이 되길 원하나이다.
그 대상이 제 자식들이 있길 원하고
또 다른 몇 분들도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살아계신 하나님.
이땅.
너무나 파격과 왜곡이 심한 이땅에
주님.
조금이라도 더욱 더 올바른 주님의 자녀들이 나오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기적의 하나님)
둘째 아들이 부른
트롯트 스타일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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