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달라야 한다면 다르고 싶다(삿19:1-9 ) 본문
제 19 장 ( Chapter 19, Judges )
이 자리가
강아지가 앉아야 할 자리는 아닌디...ㅎ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이스라엘,
기독교인도
왕이 없을 수 있다.
주님을 믿는 자들도
주님이 늘 왕으로 모셔지지 않을 때도 있다.
3.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특별히
익숙했던 옛 습관이
그럴 수 있다.
4. 그가 삼일을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그러한 환대가
누구나 그러는,
관습의 이름을 들고 나오면
흔들리기 쉽다.
'너 만 특이하게 왜그래..'라면
더욱 흔들린다.
5. 나흘만에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어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그대의 길을 행하라
6.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첩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하더니
9. 청컨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찌기 그대의 길을 행하여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이렇듯
달콤하게 유혹하면
여지없이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다.
정욕은
인간의 종족 유지를 위해
아담을 지으시며
주신 선물로
수면욕, 성욕, 식욕.. 이 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이것이
더러운 욕심으로 변질하여
비만,
남색........
개인적으로
과도한 게으름
식욕의 지나침..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죄는 아니다.
하나..
죄의 온상이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정욕'이다.
죄가 아니기에
친근하다.
본능이기에
벗어날 수는 없다.
오래된 습관이기에 친절하다.
그러나,
성경에 정욕과 성령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나온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된 본성이
원래의 아담과 같은 선한 모습을 띠어야
주님의 나라에 거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삶동안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늘 깨끗이 정결해져야 가는
당위성과 의무가
우리 기독교인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
이스라엘 인에게 '왕'이 없다 하신다.
그것은
친분을 가장하고
환경을 통하여
어쩔 수 없이 강요하고
거기에
다정함과
논리를 통하여
주저 앉히려 하는
정욕의 세력이
우리 영혼의
지성소 부위에 앉으실
왕이신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의 대신으로
들어앉으려 다툼하기에 그렇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고 결단이다.
일찍 일어나 떠나기를
결단하고 선택하면
우리는
주님을 우리 영혼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지만
다정한 정욕의 세력들에 져서
아침을 저녁으로 미루고
저녁을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루면
그 교묘한 합리 덕에
어느새
허리 둘레가 커지고
엉덩이 근육이 적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없어진다.
영혼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무뎌지고
더러워 지고
혼탁해져
죄에 농락을 당하게 된다.
즉,
정욕 자체는
본능이지만
주님을 멀리하게 하여
죄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욕의 절제에 대한 당위성과
결과의 두려움에 대한 인식이다.
주님이 왕으로
우리의 영혼에 계실 때의
그 고요함과
그 눈물의 기쁨과
타는 듯한 감동을
잊지 않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생의 결국이
'천국'임을 잊지 않음이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욕의 절제하는 노력이다.
비록 지더라도
식욕을 억제함이
TV를 보는 시간을 절제함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보다
왕으로 받아들인
그 하나님을
왕으로 잘 모시고 있는지
나의 태도를
다시 한번 돌아보기 원하신다.
적용
1. 지그시 나온 배를 집어 넣겠다.
식욕을 절제한다.
2. 잠을 줄이겠다.
어렵지만. .
왜 이리 약한 의지인지..
3. 오늘 오실 예수님 만을 기뻐함으로 묵상하겠다.
4. 성경 다섯 장 읽겠다.
기도
주여.
약한 부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식욕
수면욕
.....
죄가 아니라
합리화 하며
마냥 즐기며 보내는 세월에 대하여
오늘은
경고하시는 듯도 합니다.
오늘의 세대를 돌아보며
저들은 저렇게하는데
왜 나는 .. 하면서
많은 부분 합리화 시키며
교묘히 살아오던 부분을 보여 주십니다.
아니,
너는 왜 그렇게 유별나는가 하며
찔림을 받기가 두려워
내색하기 힘들어 하며
하나하나
삶의 버릇을 유지하던
그런 일에 대하여
오늘 보이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과연
주하인
네가
나를
왕으로
제대로
대접을
하는가? '
하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의 질책대로
늘 찔림을 받는게
맞냐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가며
그런가.. 하던
약간의 의구심에
주님은
더 .. 라 말씀하시는 듯도 합니다.
주님
요사이 편안합니다.
감정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편안합니다.
레위인의 3일 관습처럼
저도 당연하듯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야 할 시간인 듯 싶기도 합니다.
하기 싫고
듣기 싫고
다정한 습관에서
벗어나기 싫지만
주님
하여야 하면
하길 원합니다.
똑같은 삶은 원치 않습니다.
조금은
달라야 된다면
다를 수 있기도 원합니다.
주님
그 마져도
제 의지로는 가능치 않음은
수도 없는 많은
시행 착오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저
의지 박약입니다.
주여
정욕의 삶은
늘
나를 헷갈리게 합니다.
도우소서.
왕이신 예수님.
도우소서.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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