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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獄圖 (삿19:22-30)

주하인 2007. 12. 26. 13:53

제 19 장 ( Chapter 19, Judges )

 어둔 영혼의

한줄기 빛이신

주님이시여.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 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아무 일도 없는 듯

즐거운 듯 해도

주님이 안계신 평안은 

파멸의 전조증상이다.

 

 아침에 환자 한분 ,

불신자이신 분과 함께

대화를 오래했다.

뒷 환자 뒤로 물리고...

 일요일 쉬지 못하고 나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이상하단다.

난,

기쁘면 시키지 않아도 한다는 말과

이 땅에서 편안함이 있어도

시간이 가면

죽음은 찾아온다. 

그 쉼은 마취지

쉼이 아니라 했다.

진짜 쉼은 '안식' , 주 안에서의 안식이 진짜 쉼을 열을 내서 설명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속으로..

 

 오늘 레위인의 쉼도 쉼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첩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쉼을 즐기고 있기에 그렇다.

조금있으면

'상관'하자고

즉, 동성애 하자는 무리

악의 무리가 악하게 들이 닥칠지도 모른다.

이것은

주님을 위한 고난이 아니다.

죄로 인한 쓸데없는 고통일 뿐이다.

 


26.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 타락한 레위인이

드디어 장인의 유혹을 겨우 떨치고

첩을 데리고 길을 행하다

겨우겨우 거할 곳을 얻은 곳에서

나름대로는

재밌고 좋은 쉼을 얻다가

지독한 위협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첩을 대신 내놓게 된다.

비겁하게도..

 그리고는 잔다.

아침에

 윤간(輪奸)을 당한

첩이 문앞에서 죽은 걸 발견하게 되자

그 자리에서 분노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체를 토막내어

열두 지파 전 지역에 보내어

그들의 분노를 촉발하게 만든다.

 

 이 지독하고 몸서리 쳐지는

구절이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이 놀랍다.

 

 동성애,

 폭력

 단체 이지매

 복수

 시체의 토막절단

 배반

 비겁

 냉혹무비....

 

 지옥도와 다름 아니다.

그것도 어제 저녁까지 그렇게 다정했던 화해의 모습에서

급전 직하

완전반대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놀랍다 못해 경이롭다.

 

 그런데,

이게

그 레위인 한 명의

특별한 정신적 착란에 의한 것이나

영적 혼탁에 의한

특별한 저주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듯 싶다.

 아니,

굳이 레위인임을 떠나서도

평범한 사람였다해도

바로 살을 맞대고 살며

바로 곁에서

몇 시간 전 만해도

같이 다투고 사랑의 눈빛을 나누던 여인을

죽음에 내몰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치 아무일 도 없다는 듯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죽음을 확인하고

시체를 집에 가져다가 난도질 하는게

이해가 가는 일인가?

지옥도가 아닌가?

 

 이게 수천년 전의 일이다.

마치 오늘 날 TV만 켜면 나오는

극도의 세기말 적인 현상 만이 아니라는 데서

더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는 잔혹 무비하고

지옥 같은 이러한 일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소름끼치며 느끼게 된다.

 비단 특별한 일임에도 우리가 무뎌져서 그러한 일인가?

수천년 전에도 일어나고

가까운 시절에

625 전쟁에도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도 일어나던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적 모습,

악마적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아 왔다.

 그리 멀리갈 필요도 없다.

극도의 노사 분규 시절

그리도 존경하는 태도를 취해오던

교수나 사장 들에 대하여

완전 반대의 행동을 하며

죽일 듯 달려 들던

그 착하던 노동자들의 태도를

보며 몸서리 치던 것도

바로 얼마 전인, 1980년 대로

겨우 20여년 되었을 뿐이다.

 

 인간은

언제든지

상황이 되면

지옥을 연출할 수 있는

본성이 있음을

오늘 묵상의 구절을 보며

확실히 절감하고 있다. 

 

 아침에

큐티 인도자이신

의료 원장님의 말씀을 들어가며 가슴이 찌르르 했다.

지미었다. 

 레위인의 혼란을

인간의 인생 여정의 풍파에 비교하시고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목숨을 걸게되는 레위인의 위협 받는 장면에 대하여

순교로 비유하신다.

 얼마 안되는 순교 사건 중,

아프간 피랍 사건..

 거기에서 순교 당하신  

배 목사님이 떠나시기 전

마지막 설교 예화 중에

'짐 엘리엇 선교사님' 순교 이야기가 있었다 하신다.

 짐 선교사님은 

선교지의 추장 일행이 죽이려 달려들자

마침 손에는 장전된 총이 있음에도

그 총을 발사하지 않았고

죽음을 맞이 하셨다 한다.

 

 그리고, '생명'을 버리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감동스럽다.

 더 감동스러운 것은

원장님께서

미국에 친선병원을 방문하던 중

추장의 아들을

그 병원에서 행사 중 만날 수가 있던 바

그 아버지인

그 때의 추장이 '짐엘리엇의 순교'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 부족 모두가 전도가 될 기횔 얻었음을

들었다한다.

감동의 연속이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치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도하시는 원장님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그 폭넓으심과

전세계를 향하여 펼쳐지시는 행보에 대하여 들어가며

가슴 한 구석이

조그맣게 막혀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주 그랬다.

이상하게 부대끼는...

감동스럽지만

답답한...

대단한 열정과 비전에 대하여

상반된 거북스러움.

 가만히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았다.

순간..

그 깊숙한 곳에

' 난, 이렇듯... 한데.. '라는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고

그것은

나와 다른 성장 과정의 축복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의 축복도 있는 대로 받고

어려움 없이 뻗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반발감 같은 것이 있었음을

난 느꼈다.

 

 그것은 분명코

주님의 원리가 아니었다.

 

 순간,

'아~' 했다.

 

레위인의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인간들의 180도 다른 표변(俵變)함

지옥도의 당연하게 받아 들여짐

남의 성공에 대한 질투.........이 이해가 간다.

 

 원죄(原罪).

 

 이 깡통인 빈 육체

단지 장막인 이 육체에

어떤 상태의  영혼이 거하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진다.

그 영혼은

원죄에 의해 늘 조심스럽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그 영혼을 순간 까맣게 변화 시킨다.

그리고는 마치 그 상황이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인다.

그게 추세이면

그게 유행이면

그게 생존에 걸린 문제이면

그게 상처와 연관되면..

 

 오늘 보이는

레위인의 그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냉기(冷氣)가

오랜 동안

하나님을 옳게 받아들여

자신 영혼의 지성소에

늘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채우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장인 위치를

자신이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

그냥 당연하게 자신의 전부인양 받아 들였던

어리석은

종교인 - 믿음이 아니고 -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더우기 그는 제사장이다.

늘 영적 세상에 민감해야 하는 자로서

그 원죄와 그의 오랜 상처의 배합으로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하였던

결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벌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아침의 그 답답한 마음의 상태 속으로 돌아간다.

그 억울한 감정.

거기에 오랫동안 매달려 살아온

역기능 가정 출신의

주 모는

만일

아직도 그 답답한 감정에 목을 매어

그 속에 침잠해 들어간다면

이리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당신들의 말은 옳아.

하지만

고통과 고민없이

성공만 해온 당신들이 무얼 알아.

아무리 선교가 순교가 어떻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기에 상급이 없어.

남을 보며

깊은 공감을 하며

깊은 사랑으로 전도도 선교도 해야지..

습관처럼 배운 행동으로

자기 잘난 맛에 하는 일련의 종교 행위일 뿐야... . '라고 할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신

전도나 선교에 대하여

전혀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당위성은 이해하지만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어쩌면

자신이 인정하든 안하든

상처가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선교나

순교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도 간다.

이 시대의 냉랭함이 이해가 간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하지만

날마다

주님 말씀으로 찔림을 받아야 한다

행위가 우선이 되면 절대로 안된다.

악한 우리의 본성은

절대로 그 잘남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영혼의 강팍함을 강화하는 데 철저히 이용할 것이다.

'겸손도 경쟁하는 순간 교만이 된다. '

 

 주님 앞에 서려는

선택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기쁨임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 앞에 내려 놓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길

타산지석의 모습을 통하여

슬그머니 보이신다.

 

 

적용

 

1. 성경 다섯 장 읽겠다.

 

2. 난 선택할 것이다.

 좋은 생각

 좋은 말

 

3. 오직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이든

주님을 위해 참는다.

주님을 위해 기뻐하겠다.

 최소한 오늘 하루만이라도..

 

4. 겸손하리라.

 날 낮출 것이다.

 참는다.

 

 

기도

 주님

주님 안계신 삶이

바로 지옥임을 보고 있습니다.

아니..

지옥의 삶이 펼쳐질 개연성을 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특별한 상황에

특별하지도 않은 것 같은

특별한 일이

벌어질 특별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묵상하면서

그게 비단 누구도 예외가 된다고 안심할 수 없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그렇게도 익숙한 생각들...

부정적인 감각들이

어느 순간에 제어되지 못하고

날 사로 잡으면

누구든 사로잡게 되면

그것은

바로 지옥도가 펼쳐질 가능성을 오늘 보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 역사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바로 이십여년 전을 올라가 보아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처욱 그렇습니다.

주여.

합리를 가장한

나를 중심으로 하던 삶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공감하지 못하고

괴리가 있는

자기멋의 신앙과

어이없는 신념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셨던

그 아픔의 기억을 가지고

남들을 공감할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새로운 한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해는

나름대로 소득은 많았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은 모습인지

이제야 겨우

방향을 잡은 한해인 듯도 싶습니다.

주여

돌아보고

지옥의 삶 같던

흔적들은

회개하고 지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그리고

새로운 한해는

주님의 원리 안에서

감동있는 한해가

제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경의 많은 지시가

지시로서 끝나고

억울함과 부정감으로 막히는 한해가 아니고

주님의 기쁨이 뒤에 넘치고 있음을 아는

기쁜 순종의 한해가 되길 원합니다.

이제 주여.

천국의 삶을

넘치게 펼쳐갈 기반을 허락하소서.

제 안에서

남을 향하여

주님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하소서.

부활의 한해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감사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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