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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눈빛 눈빛, 그리고 눈빛( 행25:13-27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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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눈빛 눈빛, 그리고 눈빛( 행25:13-27 )

주하인 2007. 11. 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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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장 ( Chapter 25, Acts )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27.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저 눈을 보세요.

아이들의

순수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눈은

가끔

내 영혼을

전율시키곤 합니다.

 

 주님께서도

간절히 갈구하는

그분의 자녀들의 눈을 보시면서

비슷하지만

훨씬 더 강렬한 사랑을 느끼시리라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우리의 주님.

내 주님 !!

 

 

 

 

  얼마 전

퇴근 버스를 타니

바로 뒷 자석에 아이가

어머니 옆에 앉아서 있는 품이

귀여워서

싸인을 보내고 장난을 몇 번 쳐줬다.

집에 다와서

내리면서

눈길이 느껴져서

출발하는 버스의

아이가 앉아 있는 쪽

버스의 창을 얼른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 까

아이는 눈을 고정하고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버스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떼지도 않고..

 

 아침에 출근하며

유모차에 앉아 있는 풀이 죽어 있는

새침한 아이를

들여다 보며 장란을 걸었다.

아이는 잘 웃지도 않았지만

그 눈안에 스쳐 지나가는

기쁨같은 빛을

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스쳐 지나가

내 진료실 문을 열다가

문득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을 받고

아이의 그것일 것이라는 예상과 더불어

휙 뒤돌아 보니

그 축쳐진 아이가

유모차 바깥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날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아..

사랑받는 자의

사랑 받을 줄아는 자의 눈은

저리도 사랑스럽구나.

 

순식간에

내 마음은

그 아이에 대한 귀여움으로 가득차 버린다.

잠시 지만,

난 맑음으로 가득 차 버렸다.

사랑 받는 자의 기쁨이 날 기쁘게 한다. 

 

 오늘 묵상은 어렵다.

세 사람의 위정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란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 당신 들이 보는 이 사람'

' 살피건데 '

 

 그들 중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재판정에 요란하게 꾸미고 들어올 정도로

세속의 모든 것을 누리는 자로서

당연히도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는 자이다.

그들의 눈은

아마도

죄수가 하찮아 보였을 것이며

더더구나 예수라는 이단을 퍼뜨리고 다니는 바울은

경멸하고 싶은 존재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 눈은 어떨까?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면

약간은 '토'하고 싶은 느낌의 그것일 것이다.

나는 ?

 

 베스도의 눈은 또 어땠을까?

나름대로 정치하는 자로서

유대인들의 심사에 맞추고자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죄를 발견할 수 없고

더더구나 로마인을 징죄하지 못하는

복잡하면서

눈치를 살피는 교활한 눈.

아마도 그렇지 않을 까?

 

 그에 비해 사도 바울은 어떨까?

어떤 눈을 가졌을까?

난 지금은 짐작할 수 있다.

부럽지가 않다.

세상의 부요가...

환란이 오려면

습관적으로 흔들리고 진폭은 있지만

주님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진다.

 사도 바울님의 눈빛을 아주 가끔은 닮게 보낼 수 있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기도 하는 것만 같다.

요즈음은...ㅎㅎ

그때는

정말 상황에 상관없는 '평온'한 기쁨의 상태일 때 그렇다.

 

만일

오늘 묵상하면서

머리속에 선명히 그려지는

이들 네명의 눈빛과

아이들의 눈빛의 대비가 사실이라면,

(당연히도 사실이 맞겠지만)

이러한 눈빛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그 영혼의 맑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 세속에 눈을 돌림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재물과 성령은 겸하여 있을 수가 없다고 했고

맘몬도 그렇다.

모든 재물은 '결과'로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근심이 없는...

'사람이 부하는 것은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으신다'는 시편의 고백이 사실이다.

잠시 삐져나갔지만

사도 바울의 그것은

아이들의 그것과 틀림없이 닮아 있을 것이다.

깊이를 알수 없는

청명하고 고요한...

그것은

주님으로 인한

성결해짐으로만 가능하다.

세상의 법정은

주님의 보혈로서 깨끗해진 자들,

특별히

주님 앞에 겸허히 선 자들에게서

징죄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그게 사도 바울의 증거다.

 

 오늘

아이들의 그것과 같은 눈빛을 회복하고 싶다.

그래서

날 쳐다보시는

주님께서

절절하게

'귀여움'을 느끼시도록 해야 한다.

 

적용

 

1. 회개한다.

 아침에 어이없는 환자에게 조금 딱딱하게 했다.

 회개한다.

 나쁜 감정은 아무리 당위성을 가져도 눈을 흐리게 한다.

 회개 만이 고요한 눈빛을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다.

 

2. 겸손을 원한다.

 아그립바 일행의 그 요란한 차림을 지양한다.

 사치는 영혼의 피폐에 첫걸음일 수 있다.

 

3. 주님을 우선 고려한다. 

 어떤 일에도 주님의 의중을 먼저 고려하려 노력하겠다.

베스도의 눈빛이 마음에 안든다.

 

4. 성경 다섯 장 읽겠다.

 

5. 오늘 있을 수술에 능력을,

 저녁에 세미나에 리셉션이스트로 당당함과 자신감을 주시길 기도한다.

 

 

기도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자칫

더럽혀질 수 밖에 없는 눈빛을

고요히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유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눈빛을 통하여,

아니

그 눈빛과 더불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이가 쏘듯이 쳐다보는

그 눈길로

주님을 향하여

집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말 세상에도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

고민이 될 것들이

기도함으로 이루어졌음을 체험케 하소서.

해결해 주세요

주님.

아름답게

주님을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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