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님 앞에 서기 위하여 차라리[눅14:1-14] 본문
부제) 예수님 말씀이 있으시니 의도적인 겸손을 선택하리라
오늘은 겸손의 문제 자책의 문제를 가지고 나오라신다
차라리 겸손한 쪽을 택하라 주님 앞에 설 기회다
.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바리새인들의 ' 의도적' 초청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임에도
바리새인 지도자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신
'주의 앞에 '
수종병(내과적 질병, 예로써 신부전, 심부전..등 으로 몸이 퉁퉁 붓는 병)든 환우가 있었다 .
왜 갑자기 뜬금없는
'주의 앞에' 라 했을까?
확 달려와 선 거나
바리새인들이 시험하기 위하여 강제로 세웠더라면
저런 표현을 했을까?
더더구나 얼마전에도 나왔지만
바리새인들이 올무를 걸 목적으로 초청한 것을 아심에도
아무런 꺼리김없이
'바리새인 지도자'집에 가신 그 분위기가
더구나 상황과 상관없이 뜬금없는 ^^; 상황의 반전으로
퉁퉁부은 환자가 덩그라니 서 있는 형국임에도
'주의 앞'이라는
spirtural, 영적인 뉘앙스- 그런 분위기는 히스기야님의 성전 안 부르짖음, 완전한 회개의 장소, 주님 지성소안 거룩하고 완전한 평강.. 등에 어울리지 ^^;-의 단어를 쓰기에
그리 합당할 거 같지 않은데
웬일이실까?
이 버거움이
비가역적 가역적으로
서로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어울림 -어디 ..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어울리는가? 모든 상상을 불허하는 설정이 이땅에 이루어진 것.. .그것이야말로 진실 아니던가? - 속에
하나님께서는 꼭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실 때 자주 표현되는 상황이 아니시던가?
'인간세상 , 사단의 궤계'.. 등으로 상징될 수 있는
'바리새인'의 시험에 상관없는
주님의 '영적'이신 가르치심.. .
세속적인 것 앞에 아무런 꺼리김이 없는
고귀하고 신비한 도전.
그것을 '주님 앞에'라는 표현으로
가장 '절박한 세상의 문제인
건강, 퉁퉁부은 문제...' 로 대치시키신 거다.
예수님.십자가의 시간이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와 있으심에도
이 세상의 도전에
아무런 흔들림 없이 마지막까지
하나님 나라에 증언하고 증거하시고자
어디든 가셨으며
그 '주님 앞에'
세상의 그 어떤 문제라도
다 가져오라시는 그 상징으로
'주님 앞에'라는 단어를
드러내 보이신 거다.
아.. 그 어떠한 문제라도
주님은 '주님 앞 문제'로 여겨 주심이시다.
소망이고희망이다.
절대적으로 다가오는
그 어떠한 자책과 질책과 '자괴감' 속에서도
인생의 그 어떤 절박한 문제 조차도
주님 앞에 가져가 내려 놓아야 함을
말씀하심이다.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고 이어지는
너무도 잘아는 비유들로
'겸손'을 말씀하신다.
"차라리'' 라 하신다.
차라리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최선이 아닌 '차선'.
그렇게라도 하면 아니한 거 보다 훨 나을 것이다.
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말씀'하시는 분의 권고가 겸하여지니
그렇게 하면 훨씬 낫지 않는가?... 라는 ...
무엇인가?
이도 저도 아닌..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그 수없는 내면의 혼돈을
아주아주 오랫동안 겪어가며 세상을 살아왔다. ㅠ.ㅠ
너무 오랫동안 '말'의 꼬임 ㅠ.ㅠ
논리의 부딪침
생각의 다분화..........로 인하여
많은 부분 포기하고
또 많은 부분 혼란스러워 하기도
그리하여 내 젊음의 내면이 부딪치며
'자책'으로
'분'으로
'노'로......
'우울'로........
뭐.........그렇게 살아오며
'영적 수종병'..
심적혼돈의 시간들이 극에 달하려 할 즈음
불현듯 찾아오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 선택으로
난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아 .. 더 정확히는 순간 영접되면서 눈물이 쏟아졌던가? ㅎ- 지금까지
이렇게 '주님 앞' 서기위한 몸부림으로
매일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면서 '수종병'의 대부분이 사라진듯하나
아직도 일부분 많은 노곤함을 느끼면서
심적 영적 눌리는 부분에 '붓는' 느낌이 남아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 부분.
그 부분을 '자책', 교만.. 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부분을
'주님 앞에 ' 서려 하는 너무나의 당연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나에게
오늘
주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거다.
"너
무조건 나을 거다 .
완전히..
주님 앞에 서 있기에 그렇다.
아직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이제
네가 해야할 일이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네 안의 그러한 문제점들이
오늘의 하루 중에
또 마주하게 된다면
'차라리'
'겸손한 척'이라도 하라 !''
그게 무슨말씀이신가?
다양한 '당연하신'..
그러나 내 삶의 행태에서 돌이켜 보건데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에 마주할 때
'겸손'한 척을 선택하라'' 심이시다.
" 이거. 과연 그렇게 하는게 옳아?
의도적이고 가식적 아냐?... 라는 의구심이 들어도
그렇게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셔 선택'하면
즉,
차라리 에수님의 말씀이 있으시니 겸손한 척이라도 하면
그게 옳다
그러다 보면
겸손하게 될 거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다
그렇게라도
차라리 하면
겸손하게 되리라
그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너의 오늘 하루의 태도다.."라 신다 .
감사하다.
주님.
알겠습니다.
겸손한 척이라도 하면서
겸손하여 지는 영적 상태가 되는
그 시작점으로 삼겠습니다.
내 안의 여러 흐름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가장 타당한 '겸손'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머지..
주님이 다 바리새인들의 소리로 치부하여 주심을 알겠습니다.
그 안에서 전..
말씀이 있으시니
겸손의 태도만이라도 취하겠습니다.
주님뜻대로 '겸손'하게 되어
주님 앞에 서는 현상인 줄 알겠습니다.
감사하오며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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