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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늘 버릴 것[마19:23-30] 본문

신약 QT

내 오늘 버릴 것[마19:23-30]

주하인 2014. 3. 15. 12:07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당연하지 않는가?

세상의 것과 성령의 것은 양립할 수 없다.

 물질은 세상의 것.

세상의 권세 잡은 자에게 허락된 영역.

 하나님 나라는 영적 영역. (물론 심령 천국은 다른 개념이지만 .. )

세상에 살동안 허락된 '사단'의 영역에서 가만히 둘까?

부유하고 물질이 풍부하면 어찌 하나님을 절절히 따르게 될까?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모두 포기하고 고행길로 간다고 '천국'이 보장되던가?

부자면 모두 절대 천국 못가던가?

아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다.

 

일반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을 '어려우니라' 라 표현 하신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긴 어렵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것.

그리고 그를 넘어서기 위한 또 다른 원리 !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방법을 아시고계신다.

 

그것은 세상에 살면서 가능하면 물질을 소유를 절제함이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부유한 운명 ' - 부럽다 ^^; - 일 경우 ,

추구를 하여 얻어진 , 자연스러운 부유함의 경우에는

'하나님' 께서도 허락하시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들에게 '천국' 사모를 기대하기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사모와 결심은 우리의 영역이고

천국에 들어감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상속하리라

 나.

이 '버린 자'라는 단어에 두가지 생각으로 '갈등'을 느꼈었다.

 

 그 하나는

' 매력'이다.

내가 '의사'지만 '산부인과 '의사, 그중에서도 남자 산부인과 의사로서

내 원튼 원치 않든 조금은 화려치 않은 ^^;; 의사로서

더구나 시골 출신에, 금전적 추구보다는

이상적인 추구 성향을 지녔던바

하나님의 이러하신 '무소유'에 대하신 말씀은

내게 '내가 생각하던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네... ' 라는 기쁜 마음이다.

나..

차도 팔아 없앴다.

하던 골프채도 없앤지 오래다.

자전거 타고 걸어다니고.. 사진 찍고..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들처럼 가진 거 자랑하는 거

경멸까지는 아니어도 유치한 눈으로 바라본다. ^^;;

그러고나니 '자유롭다' .

내려놓고 나니 얻어지는 풍성함이 참~ 좋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어찌 다 버리나?'다.

한번씩 세상에 치일 때 ㅜ.ㅜ;;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내 성향이 치우친 대로 '수도자'로 살아볼까 하는 유혹도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자식들 가르치고 장가 보내야 하고

딸린 아내에게 역할은 해야할 것이고

그리도 이뻐하는 '아가'가 손자 손녀로서 내 옆에 올 때

주어야 할 풍성함 (솔직히 꼬질 꼬질한 가난함.. 죄송 .. 가난하신 분께.. ..솔직한 마음이라서.. ) 이

있어야할 것이란 유혹이 날 완전한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다.

솔직히 '다 버리고'라는 말씀에 저항이 일어난다.

죄송하지만..

그래서 두 마음이라 한다.

수도자는 수도자의 길이고

고행자는 고행자

제자는 제자가 할 것이기에

다버리라는 이야기는 거부가미 들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고정되고 편협하신 분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부자에게 '지옥'갈 사람들이라 하지 않으셨고

인도나 네팔에나 거할 만한 거지 닮은 고행자들에게 모두 '천국' 올자란

어이없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늘 말씀에도 '부자가 어렵다'고 하셨지 아니라 하지 않으셨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 버리라 ' 하셨다.

'길'이 있다고 하셧다 .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고하셨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부자가 천국 갈길.

 

'버린다'는 개념에서 다시시작해보아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는 '누구에게 ' 하시는 말씀이신지 고민해보아야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그 어떤 종류,

즉 명예, 돈, 소유.. 등 어떤 것이든 '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여서 얻어지는

'적극적 개념'

'수동적인 것을 가장하지만 심적으로 ' 부함을 추구하는 '부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시다.

 

즉 , 버릴 것은 그런 것이다.

자연스러운 '부'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음으로

영육간에 필요해서 허락하신 '부'는 누리면 된다.

누리되 하나님의 시간을 빼앗을 누림은 안된다.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이 있고

' 하나님'을 위하여 과감히 포기될 '부'는 괜찮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 했다.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성공하여야 한다 한다.

그것은 '이름을 내세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값싸게 변개케 하는 행위다.

하나님의 이름을 건, 자아 만족행위다.

그러함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

그러함은 더 가증스러운 일이다.

 

말한대로 '버린다함'은

하나님 때문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버릴 수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결심이나 성품적 독특함'으로 버리는

그야말로 자아덩어리 결단과는 차이가 나는 버림이다.

버림이 기대가 되고

버림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느끼고 확신되어지고

버림으로 가벼워짐이 감사되어야 하는 버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늘 하나님의 '은혜' 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까 노심초사하는 자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수 있을까?

 

 나

조금의 편안함 만 주어지면 여지없이 내 자아가 튀어나온다.

잘 나가는 것 같으면 어느새 기도가 줄어들고

목소리가 커지고 눈이 부리부리해지고

거침없는 소리로 남에게 아픔을 준다.

그리고..나서

한동안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어야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오고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다시 조금은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아주아주 약간이나마 겸손해지고

그러함에도 감사함으로 살곤 한다.

이거..

나름 되풀이 되고 시간이 경과되어

지금은 없어지니 자유로워지는

아주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함은

내사진을 통하여

내 드리는 찬양을 통하여

스스로 발견하고 투영해내곤 한다.

감사하지 않은가?

 

부자아닌 부자가 

버릴 것 많아도 감사할 수 있음이..

 

 

오늘 주말입니다.

오라는 데 없어져가고

가지고 있는 것 그리 많지 않아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행복해져 갑니다.

점차로 그런 시간이 늘어갑니다.

덜 당황해져 갑니다.

이제.. 버려져야하는 것에대하여

두려워하던 늙어가는 장년이 아니고

내려 놓을 것을 그리 힘들어 하지 않아지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계신 덕이구나 .. 하면서

감사해져가는 제가 되어감을

다시한번 기뻐하는 중년이 되어갑니다.

주여.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버릴 것을 버리는 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내 주여.

힘이 납니다.

더 자유로와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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