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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숨을 쉬게 하소서( 시69:1-1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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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숨을 쉬게 하소서( 시69:1-12 )

주하인 2009. 2. 26. 08:57

제 69 장 ( Chapter 69, Psalms )

 

밤에

기도원에서 내려오다 찍은 사진.

기괴하지만 나름대로 멋있다.

어두운 저편 하늘에

달이 희미하게 보인다.

혼란스러운 ,

곤고한 영혼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나마 무언가 있는 듯하다.

 

오늘 시편의 고백이 시작부터

가슴을 친다.

영혼에 물이 들어온듯..............하며

마구 마구 고통을 외친다.

공감이 간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외치니

곤고한 가운데서도

그의 승리가 보이는 듯 해서

아름답다.

 

 

 

 


1.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하나님이여 날 구원하소서.'

묵상을 들자 마자 눈에 찌르듯 들어온다.

 저 구절을 쓴 수천년 전의 그 분 모습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나님이여 날 구원하소서.'

다시금 되뇌여도

그 감정이 그대로 나에게 들어온다.

 

 어찌 생각하면 인생에서 가장 절박할 순간이기도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희망이 있기도 하다.

내가 말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

세상의 눈으로 돌아가 쳐다보면

현 상황이 말이다.

 죽도록 창피하고

죽도록 짜증이나고

죽도록 .........할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랑 다르다.

좀 성장했다.

그래서 받아 들이고 녹이고 나니

주위가 보인다.

불쌍하기도 하고 가슴아프기도 하다.

그러니 저런 엉망인 생각 들이 들지는 않는다.

분노를 표출하고 무엇인가 화난 태도를 취하여야 마땅하지만

난, 그렇지 않고 있다.

자연스럽게. .

 하지만, 연민까지 어쩌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말씀으로 자꾸만 내려놓기에 어찌 하지는 못하지만

틈 만 주면 날 습격하려는 어떤 마음이 있다.

 영적 세력 같이........

그러기에 그걸 난 이리 느끼고 있다.

 

 곤고하다.

 

 비단 이것은 나의 현 상황 만이 아닐 것이다.

위의 나열한 문제들은 느끼고 표현하지만 못해서이지

곤고한 많은 '영적'인 기독교인 들이 그럴 것이다.

 그 곤고함은

무력함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나른한 무감각함으로 오기도 한다.

말씀에도 감동은 줄어들고

큰 부담은 없어도 어딘지 모르게 피하고 싶어지면서

홀로 있는 듯한 외로움으로 슬그머니 다가오기도 할 때가 있다.

 삶의 굴곡은 많이 줄었고 편해진 반면

감동이 줄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날 보고 '영적'이지 못해 보인다는 표현을

완곡히 하고 있다.

 어딘지 탈출하고 싶은 욕구를 슬슬 느낀다.

혼자서 여행가려던 계획 - 절실하지는 물론 않았다.ㅎ- 도

주님의 뜻이신지 당일날 휴가가 무산이 되어 버렸다.

 아침 마다 일찍 일어나

예전의 그 놀라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려는 마음도

일어나기는 하지만 여지없이 실패하고 만다.

마음에 어줍지 않은 부담이 늘어난다.

찝찝하다는 표현으로 느껴진다.

난, 곤고해져가고 있다.

 그러다가 계기가 있어서 '화'가 올라왔다.

어이없는 '교회' 내의 분란으로 속상해져 온다.

그러니, 예전의 마음들이 슬슬 준비를 하는 듯

걱정과 근심과 염려의 끈들이 날 흔들려 한다.

 

 그러던 차,

전도서 마지막이던 어제의 묵상 중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나오고

드디어 오늘은

저러신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맞다.

 그 말이 그렇게도 가슴에 꽂히는 것은

내 영혼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이 맞나보다.

 '하나님. 날 구원해 주소서. '

 날 도와 주시고 살려주소서.

내 영혼의 소리를 말씀을 통하여 대신하신다.

 

 다윗의 그 처절한 고백 같은 어려움은 물론 나는 아니지만,

말씀 묵상, 큐티의 좋은 점은

적절할 때 미리 알려 주셔서

그 분 , 성경의 기록자의 그것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그의 성취를 만들어내게 하시는 것도 있다.

 난, 자주 묵상을 통해 이겨내곤했다.

이겨낸다는  것은 나의 실수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고

영혼의 성화를 말하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정도이지만

그 분의 원하시는

내 인생의 목적은 '성화'아닌가?

 

 오늘이 그렇다.

영감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본다.

 감동스러운 마음의 상태가 유지 되는 것.

그것은 대뇌 피질에 '도파민' 등의 생화학적 물질의 교란에 의한

일시적인 감정의 흔들림이나 착각에 의한

정서적 환희나 감각적 착각과는 다르다.

 어찌 다른가?

 영감은 constant하다.

지속적이고 흔들림이 별로 없이

감각적 착각이 수도없이 왔다 갔다 하는 현상과는 다르다.

차분하고 지속적이다.

 분명코 내 감정이 기쁠 어떠한 자극이 없음에도 생긴다.

기분이 불안하거나 나쁜 상황,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자책이 될 상황 등에서도 생긴다.

 달리 말하면,

영감은 주어지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영혼을 확장시켜 가는 그 무엇이 느껴진다.

그리고는 감정으로 연달아 퍼져나가는 그 무엇의 존재가 느껴진다.

 보통 나는 영적인 감응, 즉 영감이 오기전

심장 부위가 따스해지면서 퍼져나가는 어떠한 실체적 느낌이 있다.

그러한 것은

내 감각적 혼란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을 거스르고도

나에게 주어진다.

 

 오늘이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고백을 들으며

그 고백이 눈에 확 들어오고 감동이 나온다.

물론, 내 영적 노력 - 기도원 목사님이 설명하신 것 처럼, 무릎꿇고 한 기도는 앉아서 받는다는 원리로 -에 따라 그 감응의 정도나 유지의 시간은 좀 다른 듯하지만

주님은 살아계심을

최소한 나에게는

그리 표현해주신다.

'영감'으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이 말씀은

내 곤고한 영혼을 수천년 전의 다윗의 표현을 통하여 공감해 주시는 것이다.

그 분이 절묘히도 그러신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맞다.

내 영혼이 숨을 못쉬는 것처럼 답답하다.

연민 들이 - 물'이 아니다.  물 '들'이다- 슬슬 내 영혼을 공격해 오려 한다.

 곤고하다.

아니, 곤고해 죽겠다.

내 감정은 아니지만, 내 영혼은 깊숙히 답답해 하고 있다.

그것을 난 느끼고 있지만 그냥 눌러 놓고

TV보고 , 멍하니 있고.......스스로 위안하고... 그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바라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고백하라신다.

 

 감사하신 하나님.

예.

하나님 그러지요.

하나님 나를 구원하소서.  .. 하고 외치지요.

주님 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 외치겠습니다.

내 속의 연민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그 깊은 속은 모르지만

그것 마져 알게 하소서.

그 연민의 틀이 내 주위의 잘 흐르지 않는 바램들을 틈타

이리 날 곤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전 지금 질식할 듯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감동이 저에게 한톨도 느껴지지 않는 듯 해서 그랬습니다.

그냥 막연한 답답함만 날 누르고 있어서

괜찮은 것 같지만 숨이 막혀 그랬습니다.

이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 하나님

당신 만을 바라보길 원하니

주여 날 도우소서.

날 지키소서.

날 이 어두움에서 구원하소서.

숨이 막히려 합니다.

숨을 트게 하소서.

물이 내 영혼에 밀려 듭니다.

아닙니다.

물들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닥치는 듯하여

내 영혼이 숨이 막히는 듯합니다.

그리 될 듯

곧 그리될 듯합니다.

저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

주 나의 구원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성령하나님이시여

내 말라붙은 영혼에 비로 오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아멘

 

 

 

적용

 

1. 성경 일곱 장 읽겠다.

 

2. 기도원 가겠다.

 

3. 하나님이여 날 도우소서.. 기도하겠다.

 

4. 내 연민에 대하여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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