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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내 모든 자랑은 주님께(잠 2:16-22)

주하인 2007. 7. 5. 09:03

제 2 장 ( Chapter 2, Proverbs )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 음란과 사랑과 아름다움과 유혹의 차이는 무얼까?)

 

  여기서 지혜는 ,

잠언서를 통해 계속 언급되어지지만

솔로몬이 그리도 신봉하고 자신있어하는

IQ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나오는 지혜라 인정할 때,

그 지혜는 머리로 생각할 때

당연히도

우리의 삶의 원리와 원칙의 자(尺, sound)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자'가

굉장히 버거울 때가 있다.

역사가 증명한다.

십자군 전쟁,

중세의 마귀사냥....

말씀이 자칫

과도한 율법의 잣대로 변하면서

예수께서 그리도

이 세상에 주시고자 하던 '사랑'이 '괴로움'의 도구로 변할 수가 있고

그 분이 그처럼 갈파하시던 '화합'과 '연합'이

그 도구로 인하여 '파'가 나뉘고

갈기 갈기 나뉘어지는 차가운 분할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아침에 원장님의 전화가 왔다.

'사정이 딱한 분이 있으시니 입원하실 수 있으면 입원시켜서 검사하세요.

 그러면 그 분에게 보험회사에서 나오는 입원비가 도움이 되신답니다.'

순종이 성경의 원리다.

'예'하고 끊었다.

그리고 나서는

또다른 원리인 '진실'과 부딪친다.

'이거 만일 입원질병이 아닌데 거부하면 상관의 뜻을 어긋나게 하는 것인데 어떡하나?'

'  거짓은 하나라도 벗고 나가야 할게 마땅히 기독교인의 할 바인데.. '

' 너무 강팍한 모습은 아닐까?'

잠깐 주님을 생각했다.

이게 중요했던 것인가?

교회다니시던 그 분에게

미리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진실 임을 양해받고

최선을 다해 도웁겠다는 말을 하고

초음파를 해보니

다행이도 그 분은 과거에 진단 받았던 물혹이 없어져 있고 -물혹은 단순할 경우 대부분 사라진다-

검사 부분에서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가 있게 되었다 .

 그 분이 많이 고마워 하신다.

 

 주님이 원하시는 지혜.

주님의 말씀을 통한 세상 바라보기... 가

요즈음

엉터리로 살던 40몇 년간의 습관을 바꾸기 위한 내 기도의 주 내용이다.

그럼에도 한번 씩 부딪치는

성경적 내용과

세상의 원리와 부딪치는 부분에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결국은

우리 주님은 이 갈등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갈등 사이에서

인간의 의지로 앞서 나가는 부분은 

자칫 율법과 분쟁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성향에 따라 심한 혼란을 유발하여 우울증이 오게 하는 원인도 되기도 한다.

 열심이던 분들,

성령 충만한 분들이 어느 순간에 좌절하여 냉랭해지고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으로

짐이 되가는 경우가 그것이 아닌가?

 나라 간에는 위에 설명한 극단적 현상들이 나오기도 하고..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변함 없는 잣대로 쓰는 그런 도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원리가 상충이 될 때는

주님이 인도하셔서 원리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의 원리를 깨닫게 하시는

그런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속은 누구나 결점과 원죄를 가지고 있던 바

그 판단은 주님에게 맡기는 연습과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을 회개하고

적용하는 습관이 들여져 있어야 한다.

( 현대는 마음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때입니다. ㅜ.ㅜ;;; )

 

 오늘 묵상의 주제는 '음란'과 그를 대처하는 '지혜'인 듯 싶다.

어제 기도원에 다녀왔다.

일찍 끝나는 수요일 - 난 수요일이 半休지만 그동안 수술이 있으면 반납했었다.-이라서

오늘 있을 전인치유 인도 찬양을 얻기 위해 다녀왔다.

 최근에 근원적인 부분에 대한 갈등으로

많은 부분 열심을 내던 것을 쉬고 있던 차

마음이 그에 따라 자꾸만 쳐지는 탓이던가?

 기도하고 저녁 예배까지 마져 참여하고 가려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으려 앉은 차

맞은 편에 빨간 티를 입으신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안그랬던 마음의 요동이 느껴진다.

40대 초반 내외로 보이는 그 여성이 날 아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본 것처럼 느껴진다.

가느다란 허리.

고운 얼굴 선.

묘한 눈 매무새.

괜한 상상이 든다.

 

 예배를 하면서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도 모르게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를 버뜩 털고 하나님께 집중한다.

 예전에는 두 마음이 날 굉장히 힘들게 했었다.

' 아..한번...

 아니..너...'

이렇게 갈등이 시작이 되면 그게 날 많이 힘들게 한 적이 몇 년전까지 아주 잦았다.

ㅎㅎ

 

 이 음란의 마음은 떼어내기가 아주 힘들다.

죄를 행동으로 옮기지 비록 못했어도

그 시간에 주님을 잊기 쉽상이고

벗어나도 이미 많은 영적 에너지를 빼앗겨 하루가 무력해진다.

 

  성적인 이런 유혹에 대하여서는

관계적 차원에서 푸는 심리학 자들이 있다.

어려서 부터 관계성에 문제가 있는 자들이

혼자 만의 상상으로 들어가

많은 sexual fantasy를 만들어 내고

그것은 실제보다 훨씬 큰 욕구를 만들어 내고

결국은......

 또 다른 설명은 Sex는 육체적인 실제의 접촉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나와 상대의 두 우주가 실제적으로 하나가 되는 '연합'의 모델이다.

 사람이 만나서 정을 나누고 서로 간에 나눔이 시작이 되는 관계적 연합은

두 우주의 연합으로 이러한 sex로 인한 연합이 심리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언젠가 주님은 나의 음란한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게 하신 적이 있고

솔직히 그 후로는 마음으로 스치고는 지나갈 지언정

혼란을 겪은 적은 단언 코 없었다.

그것은 나와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진 이후다.

 말씀으로 나의 본능을 누른 것이 아니다.

난 그 분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고

그분의 지혜가 자연스레이 내 영의 결손 부분을 치유해 가신 것으로

더 이상의 그 부분에서 흔들림은 없었으나

요즈음 나태한 마음으로 늘어져 있어서

갑자기 흔들린 것이다.

이것은 내가 주님의 말씀으로 올바로 서기를 게을리 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구구절절히 옳으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시편에서 배운 말씀대로

'찬양하라 찬양하라 찬양하라 찬양하라'

즐거운 소리로 하라...라고 해서

그 기준을 따라 찬양을 했더니

마음이 달라진다.

편안해지고 평강이 있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 분이 음녀가 아니다.

그 분이 이방 계집이 아니다.

 

 음녀와 이방 계집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 영혼에 들어온 말씀이 역사하셔

지혜로 작용을 하도록

내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속의 갈등과는 상관없이

약간의 순종의 의지를 발휘하여

무기력한 손을 들어 박수를 치고

찬양을 하니

주님이 깨끗하고 맑은 느낌으로 날 두손 높이 들게 하시고

극진한 찬송을 부르게 하시어

찬송속에 올라가시는 주님을 본 듯 한 마음을 허락하시어

내 속의 음녀가 잠잠해지는 현상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

이게 지혜다.

주님은 지혜마저 이끄신다.

말씀을 받아

내 잣대로 사용하면 그것은 율법이 되고 오히려 죄를 몰고 들어오는 사도바울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하나,

말씀 받아

그 운행마져 주님이 하시도록 맡기고

맡기는 원리마져 주님의 말씀대로 하게 하여

갈등이 없어지고

음란이 사라지는 게

바로

지혜의 근본이며

그게 주님이 바라시는

원리다.

 

 

 

 

 

20.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주님의 원리는 하나로 통한다.

어제의 묵상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금과옥조로 기뻐하며

운행 조차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려 놓고-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반드시 인간인 우리가 해야할 바이다-

찬송하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의지를 발휘하면

그 분은 반드시

날 선하게 하신다.

지금까지의 행로가 그걸 증명한다.

 

 항시 그랬지만

나의 삶의 방향은 착하게 살자다.

그러나 속은 그렇지 못해 얼마나 그 삶이 갈등이 심했는지..

의도적으로 노력해도 속에서 삐져나오는 분노는

감당하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인도하심으로 하나하나 해결 받고

분노 뿐 아니라

삶의 전 방위에서

속이 점차 깨끗해져가고 있지만

아직도

주님의 원리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죄악에 의해 갈등할 때가 종종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난 착하게 살 것이고

그 확률이 점차로 높아져 가고 있고

내 외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정도로 순화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진솔한 삶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게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이러한 표현과 어찌나 흡사한지

읽어가며

나도 모르게 '그래'한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발아 되어

지혜로 꽃을 피우고

그 지혜의 말씀에 하나하나 감동하기 시작하면서

지혜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때가 오면

나도 온전히 선한 자의 행함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며

내 속과 겉은 똑같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의지와 노력과 바램과 상관없을 것이다.

그냥 주님이 인도하시고

난 따라가고

그 과정이 그냥 편안하고

아무런 갈등이 없을 것이며

음란이나

포악의 죄가

날 더 이상 가로 막지 못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다.

 

 주님으로 인한

이 자유는

거침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게 평화로울 것이다.

어느 것도 갈등이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세상을 도피해서 혼자 '도'를 닦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냥 세상에 살면서

그들과 연합하면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까지 끼치고

그들로 하여금

나와 비슷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전도도 하게 되고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삶에 밀착되어 눈물로서 조건없이 아파해줄 수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거침이 없어지고

간혹 생길 갈등과 혼란에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자연스레이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자유 다.

 

 

적용

 

1. 말씀 다섯 장 읽겠다.

 

2.  착한 자가 되겠다.

 주님을 위하여 성질을 덜 부리겠다.

 주님을 위하여 걱정을 내려 놓겠다.

 주님을 위하여 남을 돌아 보겠다.

 

3. 주님의 자유를 생각한다.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주님이 날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 것을 믿는다.

 지키실 것을 믿는다.

 

 

기도

 

주여

아직은 멀었지만

그래도

비교해보니 좀 나아 졌습니다.

제 의도와는 상관없고

인격이 바뀌기 힘든 나이임에도 조금 바뀌어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선한 길로 행하게 하시고

의인으로서 길을 지키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끝까지 주님 말씀 놓치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아울러

아직은 부족한 나이지만

곧 있을 이러한 축복에 의해서라도

감사하고

나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도우실 나,

그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길 원합니다.

모든 자랑은 주님께 있음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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