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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생명( 잠3:11- 35) 본문

구약 QT

내 영혼의 생명( 잠3:11- 35)

주하인 2007. 7. 7. 10:45

제 3 장 ( Chapter 3, Proverbs )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 주님의 징계를 오해했던 이 닭대가리 주하인 ~!! )

 

 아들이랑 같이 출근했다.

엉터리 같은 아들이 그래도 시험기간이라고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았다가 시간가는 줄 모르더니 늦었다 한다.

그래서 태우고 왔다.

차 안에서 책 본다는 걸

10분 동안 아빠를 위해서 오늘 묵상 구절을 읽어 달라 하니 투덜댄다.

 아빠는 버스 타고 가야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걸 못하게 되니

네가 감당해야할 몫이라 하고 하니 순종한다.

 

 징계..란 단어가 먼저 귀에 들어온다.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한다.

세상의 실패라는 형태로 오는 징계도 그냥 싫어할 것 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아들.

공부도 못하고

지독히도 엉터리라서 내가 혼을 내기도 많이 했지만

난 이 놈을 지독히 이뻐한다.

내 아들이기에..

 그러나, 역으로 내가 그 아들의 입장이었으면

아빠인 내가 미웠을 수도 있다.

최소한 속이 상했을 수도 있다.

어찌 받아들여졌건 난 내 아들을 사랑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날 혼내실 때

내가 징계를 받는 걸 싫어하는 개인적 예민성 때문에

하나님이 날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혹시 실망하셔서 날 모르는체 하거나 관심이 덜하실 거라는  

나름의 좌절로 힘들어 했지만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 인것처럼

난 주님의 허락하신 고통을

그리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주님이 그 말씀하신다.

감정은 아니지만

진실은 늘 그렇다.

내 잘못 인지되어온

인식의 체계는 속상하다, 아니다.. 자꾸 부르짖지만

주님이 날 사랑하는 아들로 보고

고통도 허락하시는 사랑의 징계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난, 그 아들이 멋지고 긴 롱다리로 자기 학교 정문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백미러로 지켜보며 기쁘게 병원으로 향했다.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 말씀의 지혜를 온전히 받으면 세상이 다 시원해 보이게 됩니다. )

 

 

얼마 전까지

못하는 아들,

거짓을 잘 하는 아들,

PC방 잘 가는 아들...로 잡아야 하고 고쳐야 할 아들로 주로 혼을 내려 했지만

주님의 은혜와 지혜에 대한 생각이 날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좀 여유로운 눈이 생긴다.

그냥 못해도 내 아들,

성경을 읽어주니 귀한 아들,

다리 길고 잘생긴 내 아들

혼나도 그리 많이 삐지지 않고 금새 풀어지는 순수한 아들,

그래도 머리는 비상한 듯, 외우기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들...

앞으로는 주님이 더 축복을 허락하실

축복의 덩어리 아들...

 

 지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이것의 확장이 복이다.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아들을 통해

일부의 하나님의 지혜로 인한 장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지만

주님의 지혜라는 것은

말씀이 내 속의 영혼의 운행 원리의 틀을 조절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체험을 통하여 보면,

삶의 나머지 부분을 알아서 채워주시는 것이고

그 채워주신 부분에 대하여 심적으로 강한 만족을 누리게 하시고

외부적 압력에 대면하여서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쉽게 대처해 나갈 삶의 원리를 자연스레 표출케 하시고

상황적으로

주님이 필요하시면

예기치 못한 번득이는 생각과

기적적인 현상의 변화를 통해 가져오게 되는

그러한 운행 원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정금, 순금, 순은, 보석, 재물, 명예, 성공, 자존심, 경쟁의 승리......등으로 얻을 수 있는

충만함의 '대체물' 로 인한 만족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이고 유한하며

내적인 공허는 상대적으로 더 커지고

결과물인 것을 목적으로 착각하게 하여

진리의 왜곡을 가져오고

결과론 적으로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당연히도 멀어지게 하는 반면

주님의 지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들은

절대적이고

결과물로서 금,은...으로 오기에 그것은 목적이 아닐 뿐더러

내적인 충만감으로 채워진 후 오는 것이기에

행복은 한없이 확장될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런 유한한 결과물들은

하늘나라 하나님 아버지 곁의 평강과 희열에 비교하면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기에

오늘 잠언의 이러한 표현은 당연하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22.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 이 아름다운 생명력..! )

 

 내 영혼의 생명이 된다.

지금 손이 나가는 대로 쓰고 있지만

위의 표현이 영혼의 생명이라는 표현과 어찌 그리 유사한지...

 

 주님은 주님의 말씀에 준행하고

그것을 끊임이 없이

들여다 보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발견하려 집중하고

어느 순간

그 분이 말씀 속에서 살아서

운동하시듯

전율을 동반한 감동으로

쳐다보는 눈을 향하여 튀어 들어오시듯 들어오셔서

내 영혼이 떨리며 흔적을 가지게 되고

그 말씀이

이미 한번 보혈로 씻기워 졌지만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습성으로 인하여

다시 씌여진 먼지를 

마치 프라이팬의 기름 때가 세제에 녹아나듯

하나하나 녹여나가져

어느 순간에 온전히

주님의 말씀으로 닦여져 가면

그게

영혼이 주님의 생명으로 온전히 덧 씌워진 그런 상태일 것이다.

 

영혼의 생명.

주님의 지혜.

말씀.

 

난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을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 구습을 유도한 인지의 오류들이

이제는 주님의 지혜로 인하여 수많은 체험을 통해

평강과 진리는 오직 주님임을 느꼈고 강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이제는

언제가 될른지 모르지만

주님의 생명으로 내 영혼이 온통 잠식 될 그날 만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다.

 

 

 

적용

 

1. 말씀을 다섯 장 읽겠다.

 

2. 인자하고 진리로 나를 지키려 노력한다.

 

3. 오늘 아버지 학교 , 불신자 대상 열린 아버지 학교의 대상자를 하나님의 안타까움으로 쳐다보기를 소망한다.

 

4. 기도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지혜가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살아계심이

내 아직은 찌든 이 영혼의 온전한 운영원리가 되시고

내 영혼의 생명이 되실 그 날까지

지켜주시고 도우시기를 소원합니다.

기왕 주님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볼 마음을 주셨으니

늘 저를 지켜서 흔들리지 않게

흔들려도 금세 돌아오게 하소서.

예수님 만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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