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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다 주님 앞에 고하는가(삿 11:1-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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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다 주님 앞에 고하는가(삿 11:1-11)

주하인 2007. 12. 11. 12:00

 제 11 장 ( Chapter 11, Judges )

 

 

퇴근 길

아파트 담벼락의

크리스마스 트리.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큰 용사

 입다.

기생 모친의 서자.

 

 갈등의 소지가 많다.

 하지만, 큰 용사다.

큰 용사라함은

그릇이 크다는 얘기다.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쫓겨 났다.

많이 억울 했을 것이다.

성장과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쫓겨나서
돕 땅에 머물게 되었는데

잡류가 그에게 모였다.

 사람이 모인다.

사람이 모이는 데는 무엇인가가 있다.

배울 바가..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곤란이 오면

그릇이 되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게  기회가 된다.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보라.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

    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장로들이 인정하지 않는가?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주판을 두드린다.

산수를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입다가 모든 걸 다 내다 볼 수 있는 만큼

지혜가 있는 자였던가?

암몬이 처들어 올 줄 아는 예지력을 가지고

기다렸던 자인가?

 

오히려 산수보다는

일종의 한풀이 같은 개념 같다.

 

어찌 되었던

그게 산수던,

화 풀이던,

그는

여호와를 의식하는 자이다.

 

어쩌면,

그의 그릇은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생기는 결과물 일 수도 있다.

비록,

그의 허락이 조건부였어도

그릇이 크기에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닌가?

주하인이

입다라면,

'입다'만 옷을

벗어 던지는 '벗다'가 되었을 것이다.ㅎㅎ ^^;;;;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보라.

입다는

무슨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자다."

자기의 말을

여호와 앞에

고한다 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난,

내 할 말 숨기지 아니하고

모두 다

주님께 고하는 삶을 사는가?

잘 못 ,

필요한 것

잘한 것

단 일분이라도

그 분 앞에서 떠나지 않고 사는가?

 

 동서가 아프다.

심히..

 어떤 분께서 힘들어 한다.

심히..

그들의 아픈 후 의지하려함을 보면서

난,

속에서 이상한 분노가 올라오려 한다.

며칠 전

충만했던 '酒령'  충만했던 탓인가...

옛 감정이 자꾸만 건드려 진다.

분명코

주님의 원리로 잘 다져오던 마음이

쉽게...................

엊 저녁,

기도원에 가서 많은 부분 기도하고

내려놓았기에

덜 하긴 하지만...

 

오늘

입다에

날 대입시키면

난, 틀림없이 폭팔을 시켰을 줄 모른다.

 그래서,

기도를  했다.

다시,..

그리고, 병실에 올라갔다.

성공했다.

기도해 주고 내려왔다.

더 가슴으로 감싸 안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입다는

배울 점이 많다.

 

 기다릴 줄 안다.

언제가 되게 될 지 모르지만

그는 도망한 곳에서

마냥 기다렸다.

 

 하나님을 놓치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 들의 되풀이 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의식함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을 의지 하지 않았다.

사람 들이 모였다.

비슷한 용사들이 모인 것이 아니다.

잡류가 모였다.

사람을 의지하였다면

그는 찾아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는 비슷한 유형의 용사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잡류.

시시껄렁한 잡배들이 모여들면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으며

자신의 신세를 신나게 한탄 했을 것이다.

속이 좁은 상처 투성이의 사람 같으면..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이고

힘이 생기면

무엇인가 이루어 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그냥 기다렸다.

내려 놓고

하나님이 하실 때를 기다린 것이다.

 

 긍정적이다.

만일 부정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많은 부분 자책했을 것이고

길르앗 장로들이 오자마자

'조건'을 내세울 만큼

내적인 힘이 없을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굉장한 역기능 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깊지 않은 사람이다.

그것을

주님은 성경에서 '큰 용사'로 표현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 되지는 않았겠지만

입다는

자라는 과정에서

힘을 잘쓰고

지략도 있으며

리더로서의 자질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저 아이는 크게될 아이야'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자질을 가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큰 용사는

그러한 외적인 조건 보다

홍길동을 연상시킬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상처가 깊지 않은

행동양식을 보임으로

그의 영적 그릇의 크기에서 붙혀진 칭호였음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그릇이 그러했고

그의 그릇에 채워진 영의 에너지가

세상의 우상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고정된

그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하인이

오늘 묵상을 통하여 하나 더 배울 것은 분명하다.

 

주님을 의식해서

주님이 이제는 떠나 보내길 원하시는

상처는 보내 버려야 한다.

아니..

솔직히 이제는 상처가 아니다.

상처의 흔적일 뿐이지..

다 나은 흔적을 잡아 붙들고

아프다 소리 지르면 되겠는가?

물론,

팬텀 현상이라고

짤라진 다리에도

마치 다리가 있는 것 처럼 통증을 호소하거나 가려움 증 호소하는 경우는 없지 않아 있다 한다 .

그러나,

굳이 억지로 그 현상을 갈구할 이유는 없다.

난,

입다와 같은 회복을 원한다.

입다와 같은 하나님 집중을 원한다.

입다와 같은 용사가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오늘 그렇다.

 

 

적용

1. 아픔은 내려 놓는다.

 속상하면 착각이다.

 주님 안에서 십자가에 다시금 내려 놓는다.

 

2. 사랑한다.

 난 원한다.

주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이 내 인생에 적용되기를 원한다.

주님이 나머진 다 책임 지신다.

원함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3. 약해지길 기뻐한다.

굳이 약해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면 가만히 있겠다.

입다가 그랬듯이

그냥 가만히 있느다.

 

4. 찾아 다니지 않겠다.

 주님의 원리는 원하는 바를 기도하고

이루어 진듯 기다리는 것인 듯 싶다.

굳이 앞서 나감은 원리가 아니다.

 

5. 가만히 있는다.

 초조함은 사단이다.

 

6. 성경을 다섯 장 읽겠다.

 

7. 늘 주님을 의식한다.

 항상 주님 앞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한 입다를 닮겠다.

마치 우리 둘째가 조잘 조잘 내 앞에서 얘기하듯.

 

기도

 

하나님.

입다를 봅니다.

속이 상하려 합니다.

그의 입장이 얼마나 안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을 잘 인내 합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

아마도

그 과정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보고

원함을 기도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그를 보며

기도하고 기다리며

인내하고 원망하지 않는 모습을 배웁니다.

이게

제 일생의 원칙이 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도망 나오는 듯

잡류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듯

속이 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주님의 원리이면

약함을 기뻐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제가 되길 소원합니다.

예수님 도우소서.

주님의 뜻안에서

겸손하고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써있는 입다의 오늘 믿음을

흉내낼 수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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