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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예수님은(히1:1-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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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예수님은(히1:1-14)

주하인 2014. 12. 1. 09:30

 

(카파도키아 동굴 도시 )

 

이런 환경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그 모진

수백년의 시간을 지냈을까

 

거기에도 희망이 있고

그곳에도 기쁨이 있으며

사랑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삶을 위해

굴을 파고

살아 있음을

교육으로 보였다

 

왜 인가

예수의 생명을 

매시 매초

날 것의 적나라함으로

만날 수 있기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

 

예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직접 볼 수 있는 길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러할 수 있길 바란다

 

이제는

이 고난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날 것으로 만날 수 있는

온전한 행운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제 주일 예배에서

'사계'를 작곡한 비발디에 대한 예화를 담임목사 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다.

 심한 가난 속에서

목수이셨지만 독학으로 바이얼린을 배워 연주회를 가질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음악적 영감을 물려 받았지만

중세, 그 중에서도 더욱 가난하였던 형편을 탈피하고자

카톨릭 수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부모의 의견을 좇아

신학교에 갔으나 결국 음악적 능력을 위해

모든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예술가로 전환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는 세상에 위대한 작품인 '사계'를 쓸 수 있었다 한다.

 

 난..

병원에서 시행하는 '전인치유'에서

찬양을 수년간 리드하기도 하고

그 후 뒷좌석에 앉아 찬양을 따라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이 곳에서 많은 은혜를 받아왔다 .

그러다가 문득,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깨달았다 .

 

 '아픈 '것.

그것을 위하여 사람들이 기도를 하게 되지만

아픈 것을 낫는 것이 기도하는 유일한 목적이 된다면 (물론 그럴 수는 없다 ^^;;)

아프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필요치 않다는 논리.

세상의 것들은 안그런가?

고난은 필연.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은 '기도'를 더 하게 되고

예수의 이름을 조금은 더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낫거나 회복이 되면

그들은 ,

아니 나도..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본다 .

예수께서는 아프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인가?

 

 한동안 많이 편했다 .

주위에서 칭찬도 많았고

나는 나름대로 깨닫는 바,

영적인 우월감이 없지 않아 있었던 모양이다.

'청빈'을 통해 심리적 청결한 느낌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상황을 '말씀'을 통해 이해하고

삶 속에서의 영성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갖지 않음도 내게는 그리 큰 부대낌이 아니고

비교의 상대로 세상은 서서히 내게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고

그 여유로운 내 영혼의 틈을

'감성'이 비집고 들어와

사진과 글

찬양과 다양한 기술적 진보를 위한 노력들이

서서히 결실을 보아가기 시작했다.

 난.. 가져도 가지지 않아도

하나님으로 자유롭다는

그래서 그런 사실을 깨달아 앎이 '감사'하고 기뻤다 .

 

그런데

그것도 변화 없이 오래되면

기름때가 끼듯 어딘지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

그렇다.

어느새 난 '태만'과 '교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장하고

그안에서 내 자아가 그득히 자라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근래.

아마도 내 방을 드나드시는 분들께서는

이전과 같은 영적 민감함과 밝음 보다는

조금은 변화 없는 지루함 같은 것을 느끼셨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

그게 내 현재의 상태다.

 

내 인생의 변곡점을 위해

난 선택을 여러번 해야 했다.

그런데 질걱 질걱한 듯 시간 만 여기까지 끌려왔다.

그러할 때

난.. 이전 같은 좌충우돌 , 상하의 번갈아 올라갔다 내려오는

화끈한 것이 없었다.

말씀 앞에 그냥 변화를 기다리고

상황에 맞추어 세미한 소리를 기다리느라 그랬다.

그런데 그러한 길어짐은

어쩌면 내 안의 영적 상황과 차이가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

 

마치 .. 병이 회복되어 가면

하나님을 덜 찾다가

어려우면 다시 아뜨거...하며 조금 다시 기도하고

말씀에 침잠하려다가.. 다시..

 

 

이전 '전인치유'의 찬양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난.. 내 깊은 고난 속에서 두 손들며

하나님의 영광이 내 속에 강하게 쏟아지는 듯하며

더 큰 깨달음의 기쁨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너무 당연하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여 회복되고

그것을 세상에 떠드는 것..

그러다가 다시 아프지 않은 자로서 그럭저럭 살게 하기 위하여

그려면서 조금씩 , 아주 조금씩 '성장' 하는 게 다행이기만 한

그런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아니시고,

그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그 십자가의 '고통'이

고통 만이 아니고 더 깊은 하나님의 임재에 다가가는 기회이고

그것을 위하여 고난은 허락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 영혼 깊숙이 받아 들이는 시간이다 .

 고난의 진정한 뜻이 바로 그것이다.

 

아멘이다.

아멘이고 많은 선지자들과 선한 믿음의 선배들이 말했지만

그때는 그게 진실로 가슴에 느껴졌었다.

잠시였지만..

 

이전에 목사님께서

'예수님의 날것 '

'십자가의 뚝뚝 떨어지는 선혈'이란 표현을 하신 바가 있다.

 

그것.

그것은 그 분이 주신 '외적' 현상을 매개로

하나님을 기쁘게 깨달아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표현처럼

주셔서 감사한 하나님이 아니고

주셔도 안주셔도 감사하신..

임재 자체가 기쁨이고

그 기쁨을 위해서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그런 '하나님' 의 영광 ,

그 자체를 체험케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고난은 허락되어 졌다는 것이다.

 

오늘.. .

예수님에 대하여 정의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이시다.

인간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그 분은 2위이시지만

하나님과 동체시다.

그런 하나님을 직접 만나

그 분의 날것의 십자가 하나님을

내 영혼이 전율과 함께  

느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은 무엇인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온전한 십자가

그로 인한 부활

불성령.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고난은 그를 위한 가장 가까운 매개체다.

기뻐할 것은 더 기뻐하여야 한다.

말씀이 그대로 내게 다가와야 한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그 분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을 내 맘에 온전히 되 살아나시게 함이 오늘 내가 할 일이다 .

 

주여.

이 부족한 자..

주하인이란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음에도

하나님은 늘 제게 주시기만 하는

기복의 존재이시고

전 그런 하나님을 드러내기만 하여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여 온 것 같습니다 .

아닙니다 .

주여.

이 땅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의 장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온전히 십자가를 사모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러지 못햇음을 고백합니다 .

 

주여.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모든 것을 기뻐하고

곤란과 핍박과 .. 을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예수 만나는 기회가 됨을 알아서 그러하게 하소서.

 

이 앎과

실제 속에서의 내 감성의 변화의 간격을

주여.. 온전히 십자가로만 극복하게 하소서.

 

저를 아시는 하나님.

이제 온전히 주님 예수님 만을 기뻐함으로

나머지는 다 이루어 지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바뀌길 원하나이다.

 

주여.

제 일상에서

예수님만 바라보이게 하소서.

더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말씀대로

제 마음을 운용하소서.

 

주님 영광의 빛을 바라 보는 자로

행동하고

마음이 밝게 하소서.

 

모두 맡깁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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