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들 모두도 아버지 것이었다( 요 17:9-19 ) 본문
제 17 장 ( Chapter 17, John )
목련이
손을 들어 기도하는 듯하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목련의 위세로서는 불가능함을 안다.
아마도
기도하는 목련이기에
가능할 것같은 상상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중보가 중요한 것은
선택 받은, 혹은 선택 받을 '저희 모두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중보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로 인하여 내 영광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기도 하다.
주님이 날 위하여 돌아가심은
나로 구원받아 성화되는 모습으로 세상의 삶을 살며
그것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목적이다.
중보를 하고 그들을 위하여 삶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시다.
그것은 내 영광의 길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당직을 섰다.
한달에 세번 정도 목요일 마다 당직이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TV를 켰다.
마침 CGN TV에서 '옥한음 목사님' 설교가 나온다.
목사님의 이름은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그 분의 설교는 처음이다.
아.
힘이 있다.
감성적 설교시다.
사진을 찍기를 좋아하신다 하신다.
괜히 공감이 많이 된다.
그 분 말씀이 힘이 있게 직선적으로 이어지면서
정곡을 마구 찌르신다.
내용이 이렇다.
'기독교 인이라면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과 다르지 않으니 세상이 우습게 안다.
성도 배가를 이유로 각종 세상적 논리로 교회를 치리하니
세상과 다름없어져 가고 그러니 그들을 세상이 우습게 본다.
'감자탕 교회'란 책은 '감영사'라는 사장이 불교 신자인 회사에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사장이 책을 출판하게 된 동기가 '감동'이란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다른 높은 차원의 감동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기독교인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다른 것 조차 풀린다...' 라하신다.
맞다.
나도 그런 다른 가치를 위하여 살아가려 몸부림 치고 있다.
감동있는
내가 체험하고 있는 주님을 통한 감동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그런 바램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다른 자들을 위하여 그리 중보를 해야 한다.
내 자식들을 위하여
내 아내를 위하여
내 주위를 위하여.......
하지만, 왜이리 가까운 자에게는 더 걸리는 가?
꼭 조건적 중보가 되는가?
그 마져도 탈피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다른 삶이 되도록 중보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서도 분명히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와 중보될 우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다름의 정체는 이것이다.
'거룩'
도저히 더러워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내 영혼이
주님으로 인하여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을 체험하게 된다.
스스로 당황한다.
이전에 습관처럼 해오던 부정적 생각의 틈을 뚫고
놀라운 생각들이 펼쳐 나오면서
내 가슴은 벅찬 환희와 감동으로 차오르고
그것이 주님의 살아계신 은혜이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고
그런 시간이 되풀이 되면서
어느새 내 인격의 한 부분에 '거룩'한 부분이 자리잡아 가게 되는 것.
그게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주님의 뜻이었음을 발견하고
그런 발견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곳곳에서
힘있게 증거되어 보여지고
날 살아 있게 하시고
결국 죽어 주님을 향해 가는 그날까지 보아주시고 오래 참아 주시는
유일한 이유가
이 더럽기가 말도 못하는 나를
주님이 인도하셔서
거룩히 성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당신의 기쁨을 누리시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때
난,
'거룩' 이 내 인생의 목표임을
자주 잊기는 해도
확신을 해 가고 있다.
이제
주님은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신다.
그런 거룩함은
나 혼자만 누리다가 조용히 세상을 뜨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모든 자들의 거룩함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이야기다.
또한 그를 위하여 내가 더욱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난 아버지다.
아버지.
내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지만
나의 모본이 되실 만한 아버지로서의 방법론은 잘 모르셨다.
난
내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랬었다.
지금껏......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려고 애는 썼지만
가슴 깊이 깊은 사랑으로 채워있었던가에 도달하면
글쎄이긴 하다.
얼마전 둘째 아들의 사건을 통하여
난 내가 깊이 사랑을 하고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방법론에서
중보기도의 깊이에서도
그리 모본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중보의 이야기가 도달하면
생각이 흔들릴 때가 있다.
'정말 난...
..............
......... .'
하지만 주님은 아신다.
중보하라신다.
가족의 거룩함을 위하여 그러라신다.
마음을 내려놓고
엉키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그들을 내 기준에 맞는 장래에 꿰맞추려는 의욕을 이제 그만 접어 두라신다.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을 좇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
그것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도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인도하실 것이다.
내가 할 중보의 기도와 그들을 위한 기대의 방향은 이래야 한다.
'거룩한 삶이 되도록 해 주소서. '
그리고 난,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상적 열심도 최선을 다하되
세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가치를 따를 지혜를 보여야 한다.
그럼에도 포기할 용기를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내 자아가 앞서면 안된다.
기도와 말씀으로 묵상과 고백이 되며
나머지는 이루어짐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이웃에게 보여야 한다.
그들을 주님이 허락하시는 감동으로 채워야 한다.
그 감동을 그들에게 주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욱 더 조신하고 열심히 이해하고 사랑하여야한다.
속상함은 내 자아의 살아 있음이다.
주님이 그토록 주시고자 원하시는 생명의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전
정말 아무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중보한다면서도 깊이 있이 하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 맞지 않으면 그것도 잘 못했답니다.
용서하소서.
그리고 방향이 다른 기도와 방향이 다른 중보에 대하여 용서해주소서.
주님의 거룩함을 닮길 원합니다.
나 뿐 아니라 내가 기도하고 이름 부르는 모든 자들을 위해 그러합니다.
그들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게 하소서.
세상이 그들로 인하여 감동 받게 하소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감동이 있는 가치가 되게 하소서.
모든게 주님의 영광을위하여..라는 전제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이 그들로 인하여 감동하고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주님 앞으로 올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주님.
절 용서하시고 도우소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으로 날 바꾸소서.
신비한 생명으로 절 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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