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남은 식탁 위 떡부스러기의 주님 내음(행1:1-14) 본문
제 1 장 ( Chapter 1, Acts )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시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뚜렷하다.
구원 받고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것.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가지고 구원 받고 주님 주신 부활의 능력을 받아 매일 성령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제사인 믿음의 노력과 그에 따른 정화로 통해 성결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시기 위헤 주님은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많은 이적과 가르치심과 치유로
영혼
육체의 아픔을 치유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구원을 만드신 후
부활로
성결한 삶을 유지하도록 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에 준비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세상에만 관심이 머물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고
매일 매일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매다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 너무 이쁜 아이들, 절대로 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무섭지요.. ㅎㅎ)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주님의 그 귀하신 십자가 노고를 위해서라도
그 아프심과 외로우심을 생각해서라도
부활의 그 가슴 부푼 기적을 위해서라도
40일 동안 피묻은 몸으로
창피를 감내하시면서
그냥 돌아다니신 예수님의 깊은 속뜻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자라야 한다.
자랄 것이라는 결단,
즉 성화의 결단을 해야한다.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화라는 길은 좁은 길이다.
쉽고도 어려운 길이다.
본 디트리히 회퍼라는 분이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좌측으로는 '율법'의 낭떠러지,
우측으로는 은혜로만 한다는 착각의 '방종'의 낭떠러지 사이에
좁게 난 위태한 도로를 가야하는 운명에 있다"고...
내 의지 만으로 가려면 율법으로 빠지고
은혜 만사주의로 가면 방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 둘 사이의 중심이 중요하다.
의지로 가는 것이 두려운 자들은 아예 포기를 하고 주저 앉는 경우가 많다.
의지가 강하거나, 상처 투성이의 몇몇 분들은 자신을 쳐서 달려가려는 의욕이 앞서서
주님의 뜻을 앞서가다가 율법 주의에 자신을 꽁꽁 둘러싸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주님은 '성령의 세례'라는 말씀을 통하여
의지 우선에 대하여 아님을 말씀하신다.
분명히...
도우실 것이다.
그것은 쉬운 것이다.
고민할 일이 없는 것이다.
맡기면 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은혜 위주로 온통 자신을 떠 맡기는 것은 '유아의 발상'이다.
십자가 구원 받은 얼마 안되는 자들 - 3일 간 무덤 속에 계시던 때 지구 상에 거하는 믿는 자들의 상태-에 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와 '의지'의 중간을 선택해야함은 분명하다.
말은 쉽다.
그러나, 정말 매일 매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나갈 수 없는 힘든 일이다.
힘든 일이 아니면 주님이 허락한 길이 성화의 길이 겠는가?
힘들지만 쉽다.
우리가 해야할 부분은 선택과 의지다.
무엇을 선택하는가?
날마다
매일같이
주님의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일단, 구원은 받았어도
사단이 만들어 놓고 실족 시켜 더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호심탐탐 노리는 두 낭떠러지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매일 동행을 선택해야 한다.
순간 순간 선택해야 한다.
매일 주님과의 동행은
매일 마다 큐티와 묵상을 통하여
말씀을 건네 받아
그 말씀을 내 영혼에 받아 들여 하루의 지표로 삼는 노력이다.
이 단순한 노력의 선택은
주님이 하루를 운행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라 내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세상에서의 천국을 맛 볼 수 있게 된다.
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
아침 마다 찌부두둥한 몸둥이와 사단이 누르고 있는 영적 허탈감을 극복하는 약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몸은 습관으로 자리 잡히게 되고
영적인 충만감의 기쁨을 알게 되면 그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키지 않아도 매일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늘 매너리즘이라는 습관의 게으름에 빠지게 된다.
그러기에 같은 열심을 보여도
어떤 수준 -성장된 ..-의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이 되게 된다.
이때쯤 , 주님은 '결단'과 '절제'라는 걸 요구하게 된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인내가 요구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니다.
기쁜 아버지, 좋으신 어머니, 재미있는 형제가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을 위해 잘 해줄 수 있는 가 선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천국의 맛을 보게 된 자들은 알아서 하게 된다.
힘든 만큼 더 큰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게 되니까...
반면 , 이때 쯤 조심해야 할 것이 좌측 낭떠러지인 의지 우선 주의이다.
하지만
벌써 심령천국의 기쁨과 원리를 안 자들...
묵상을 통해-특별히 관상적 묵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체험을 하는 자들은 염려가 없다.
그들은 가슴의 사랑탱크가 주님의 에너지로 차서야 움직이는 자들이니 말이다.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주님이 살아 돌아 오셨는데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하여
40일 간 설파하시고 다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미련한 제자 -누구냐? 주하인같은 자가... - 는
세상의 일에만 매달린다.
열심을 보이는
교회적 일이
혹시
실적에만 머물고
은혜의 감각에만 머무는 유치한 수준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세상의 실적 위주의
프로그램 위주의
물량 위주의
이런 하나님 일이라 치부되는 현상 들이
혹시 이런 제자들의 어리석은 일과는 다름이 없는 현상이 아니지 않는가?
언제쯤이나 내 사업 성공하겠어요.. (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할말 없음
.............................................................
늘 위엣것을 바라자.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주님은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
참 서늘한 말씀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일을 걱정하여
돌아가시지 말 것을 권유하자...
'사단의 자식아'라는 무시 무시한 말로 경계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뉘앙스다.
그것은
자라야할 자식이
자라지 못하고
아기 같이 우유 빨고 기저귀 차고 있을때 그를 쳐다보는 아비의 심사를 대변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자라라 , 주하인 ~!! '
"정신 차려라. 기복주의 너희들아 !! "
무섭지 않는가?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오신 분들.
그들의 선교에 대한 방법 론에서는 비록 무모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행위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기독교 인내에서도
무조건 비판하는 자들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
그들은 그렇게 볼 수 도 있다.
의지 우선,
인간적 판단 우선이면
선교 자체가 미련한 일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땅끝까지 전하라 하신다.
단,
난 아직은 아니다.
땅끝에 나가기 전에
조금더 주님 안에서 충만해 지려 한다.
사람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다.
어떤 이는 선교의 일을 하며 주님 나라 확장시켜가며 자신의 성화를 이루어 가는 자들도 있고,
못된 자들 - 주하인 이 특별히 월하랑 이었을 시절.ㅎㅎ..-은 성화를 우선하고
그 성화의 향기, 그리스도의 내음을 통하여
주위와
그보다 훨씬 널리 퍼지는 자연스러운 선교와 전도와 부흥의 도구가 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후자 보다는 전자가 더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가 부족하고 못된 인간이라는 자의식에 따라 깨지는 일은 드무니까...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 내 환자 아이, 귀엽지요? )
이걸 보면서
비디오 장면 같이 스치는 영상이 있다.
밥먹고 나서 올라가셨을까?
먹다가 가셨을까?
그렇다면 밥풀이나 빵조각은 예수님 볼에 뭍으신 채로 올라가시지는 않았을까?
옥상에서 식사하셨을까?
지붕이 있는 다락방이라는데
집이 깨졌을까?
쩍 갈라졌다가 다시 오물어 드는 기적이 더욱 연출 되었을까?
올라가실 때 신비한 현상으로 구름이 먼저 싼 다음에
순간적으로 지붕이 없어졌다가 주님이 뿅하고 순식간에 승천하셨을까?
하늘 어디까지 그 분의 승천 행로가 그려졌을까?
비행기 궤적 처럼 흔적이 남았을까?
마치 심형래의 '디워' 마지막에 승천하는 용처럼 구름을 뚫고 끝없이 올라갔을까?
아니면 순간적으로 뿅하고 어느 지점에서 없어지셨을까?
남아 있는 식탁은 어떨까?
숟가락은 있었을까?
손으로 먹었다면
예수님의 흘리신 떡 부스러기는 어땠을까?
하늘로 올라가실 예수님이 과연 무엇하러 식사는 하셨을까?
올라가시는데 배부르면 좀더 부자연스럽지는 않으셨을까?
남은 자리를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땟을까?
아무렇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빈자리가 그리도 크게 느껴지었을까?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시는 분이
육신의 것을 먹으심은
곧 있을 이들과의 이별에
훨씬 정겨운 추억을 남기시려함이 분명하다 .
그래.
그 분은 그러신 분이시다.
세심하시다.
전혀 하실 일이 없고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식사를 하셨다.
그것도 피묻고 창구멍 난 육신의 틀을 가지시고 말이다.
남아 있는 자들을 아쉬워 하고
그들과의 가장 인간적인 시간인
'식사'를 나누신 것이다.
이러시다.
이렇게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자처하시는 분이 그 분이시다.
그 분은 그렇게나 나의 어리석음을 깊이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난 그 분이 너무 좋다.
그 분이 너무 사랑스럽다 .
그 분은 내 열정의 원천이시다.
내 눈물의 보고이시다.
남아 있는 식탁의 떡 부스러기는
그 분이
승천하신 지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온기가 남아 있는 증거다.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읽을 때 마다 재미있고 신기하다.
11명 제자들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그 중 일부분은 입에 김치 국물 -ㅎㅎ - 묻히고
어떤 제자는 먹던 부스러기를 옆으로 흘리면서
모두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불현 듯
두 사람이 저희 곁에 나타난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들.
양자 의학에서
강교수님이
물질과 파동은
서로 곁에 있기도 우주 끝에 있기도하고
사람 간 세포 속에도 존재하기도
돌에도..............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파동계의 천사다.
하얀 옷을 입고
...
주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의지'를 불어 넣으신 - 말씀으로 만드신 - 것이다.
왜 흰옷인가?
왜 두사람인가?
묵상할 바다.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곁에 계실 때,
바로 몇분 전까지
예수님이 올라가시기 전까지는
전혀 세상적 이야기만 하던 이들이
그 분이 올라가시고 난 후에야
그 자리가 너무도 크셨었음을 알고서
달라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전혀 기도에 힘쓴다'는
의지의 차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수년 간 뫼셨고
그 분의 살아나심을 뵙고
그 분이 올라가시고 남은 자리에 빵부스러기가 휑하니 그 분의 계셨었음을 증명하며
그들의 심사를 허전함과 안타까움으로 채우고 나서야
의지가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은혜로만 가다가
선택과 의지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야 그들은 마음을 같이한다.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우린 세상을 산다.
그러나 세상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철저한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기만 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세상을 살면서 선택과 의지를 발휘하기를 원하신다.
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선택을 하고
성령이 깨끗하게 자리잡으실 자리를 마련할 의지를 발휘하여
성령님이 끝까지 인도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연습하길 원하시는 것이시다.
그게
이 세상에 물질의 육신을 입고
그 껍질을 강제로 십자가에 달려 찢으시는 고통과
수모를 감내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후
철저한 40일의 증거와 교육하신 후
하늘 나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그 어이없는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유일한 길이다.
적용
1. 조금은 큰 사람 답게 행동할 것이다.
덜 흥분한다.
남 입장에서 더 생각한다.
2. 하나님 나라의 삶
얼마나 좋을 것인가 솔직히 은혜 충만할 때는 감이 잡히지만
자꾸만 잊는다.
기도원 철야 예배에 가니
계속 '재림 예수님 ' 말씀하시는데
그 딱딱한 내용이 너무 은혜롭게 온다.
절제하고 성장해야할 당위성이 충분한 듯하다.
재림예수님
그분의 살아계심을 늘 묵상하고 감사하며 산다.
3. 성경 다섯 장 읽겠다.
4. 이해하고 용서한다.
오늘 하루 만큼은 누구나 이해하고 용서하겠다.
주여 도우소서.
5. 주님의 남은 자리
그분의 흘리신 떡 부스러기를 생각한다.
나의 약한 부분 모두를 알고 어루 만지시는 그 분을 감사한다.
6. 전도의 말을 전한다.
땅끝까지 전하라 하신다.
한명 벌써 전했다.
그 분 뒤 모습을 보며 기도했다.
다시금 기도하련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특별히 사도행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흔적을 명확히 들어내시고
나의 나아갈 바
마땅히
이땅의 기독교인이 살아나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주님을 그리 깊이 체험했음에도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만 관심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좀더 크고
좀더 진리이신
하나님의 나라의 삶에 대하여
진심으로 깊이 사모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이 땅위의 삶.
당신이 알아서 하소서.
하지만
아굴의 기도처럼
조금은 감해주시고
조금은 넉넉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너무 힘들어 주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배불러 잊지 않게 하소서.
특별히
엊저녁
은혜의 철야 예배를 감사드립니다.
고백하건데
프라이드 구경에 빠져 주님의 기도에 늦게 간것
용서해 주시고
다음에 좀더 멀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이는 하늘처럼(행2:14-21) (0) | 2007.09.04 |
---|---|
하나님의 큰일, 그리고 가시연 (행2:1-14) (0) | 2007.09.03 |
난!(갈1:1-24) (0) | 2007.05.29 |
부활은 상쾌한 희망이다(막 16:9~ 20) (0) | 2007.04.09 |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막15:38~15:47) (0) | 2007.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