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날 징계 하소서 날 사랑하소서(잠12:1-14) 본문
제 12 장 (잠12:1-14)
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Whoever loves discipline loves knowledge, but he who hates correction is stupid.
슬기로운 자식은 그 아비의 꾸지람을 달게 받지만, 미련한 자는 아무리 꾸짖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
오래전 부터 아들에게 '가족여행의 계획을 짜라면서
갈 곳을 정하고
자료를 찾아다 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아이에게 격려를 하면서 하길 권유했었다.
대답은 잘하더니
저녁 먹고 가족회의 형식으로 둘러 앉아 계획을 얘기해 주길 권유했더니
아이는 정말 백지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것 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래서 혼냈다.
자꾸만 커가는 아이에게 혼내는 것도 그렇고
한번 혼내면 이 급한 성질에 자제력을 놓치기 일수라서
가능하면 안하려 했지만
또 혼냈다.
내 딴에는 징계라고 생각하며 시작하지만
하다보면 그건 아이를 완전히 주눅들게 하는 감정적 언사가 다분히 섞여 들어가고
그 강도의 수위조절이 스스로 힘들 때가 많았다.
내가 그리도 싫어하던
울 아버지의 그 말투가 내 소리에 섞여 들어가고 있음을 발견하면서도
난 그 순간에는 화를 자제하지 못하고
혼내고 만다.
그래서
징계에 대하여
난 두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징계를 싫어하면서도
징계를 한다.
징계자가 되어서
아이를 Correction 해주는 -NIV에서는 분명코 Correction이라 나와 있다 .- 현명한 처사를 행하는
아빠가 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어느새 징계를 위한 징계자가 되어 버려
마치 윗그림의 저 남자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은
그토록 안닮기를 간절히 원했던 우리 아버지의 그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게 되어 있으니
스스로 굉장한 자괴감을 가져온다.
비록 이제는 예전과는 객관적으로 돌아 보아도
많이 달라져 있다고 생각은 되나
그 모습이 여전히 내 안에 투영되어
한번 징계하고 나면
가슴앓이가 많이 된다.
그래서 어느 때는 징계자의 모습을 취하는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혼란 스럽기도 하다.
그 아이가 너무도 안스러워
옛날 내 모습 처럼
쪼그러진 저 아이의 모습을
아들에게 투영시켜 그냥 두는 경우도 없지 않아
스스로 일정한 징계자
즉, Corrector로서 아이의 일생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올바른 가치관을 부어주는데
일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초조하기도 하다.
다음은 '징계 받는 자'로서의 생각이다.
이미 여러번 써왔지만
난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해오면서
감정적으로 쓰레기통 역할과
한편으로는 우상의 역할을 동시에 해온터
징계와 칭찬의 극과 극 사이에서
칭찬에도
징계에도
양가 감정을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것은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안느끼려하는
감정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며 커왔다.
그러다 보니
징계라 생각되는 상황 - 이제와 생각해 보면 실제는 사랑에 찬 지도조차도 징계라 오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오면 그것은 또 한번의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상황으로 판단되고
마음 속에서는 빨간 불이 켜져 대처하기에 힘이 들어 했다.
그것은 'Correction'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오직 현재의 내 논리를 사수하기 위한 강력한 성을 쌓기에 바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오직 제한된 경험에서 쌓여진 지식만 자꾸 부풀리기에
일정한 부분에서는 굉장한 지력을 발휘하기는 하게 되지만
평범한 부분에서 오히려 엉터리 같이 부족하게 되었다.
오늘 징계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NIV 에서는 correction, 즉 교정이라 나온다.
징계를 싫어하는 게
내 내적인 원인이든
외부적 결과로 멍든 심령의 상태이든
마음을 바꾸면 된다.
그래야 내 영적인 변화, 수정 교정이 일어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받아들일 때
마치 위의 그림 같은 오랜 거부감이 날 사로잡을 수도 있지만
오늘 주님이 특별히 말씀하신 것처럼
징계를 '수정하는 지름길'로 인식하면 된다.
징계라 생각되는 것이
징계가 아님을 알면 된다.
그것은 수정을 위한 사랑의 표현임을 깨달으면 된다.
"날 징계하소서" = "날 사랑하소서"
같은 말임을 알면된다.
여전히 징계에 대한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쉽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주님의 도우심은
이에 대한 생각을 내 영혼에 각인 시킬 수 있으리라.
아울러
내 모습이 어떻게 되어 왔든
우리 주께서는
우리 가정에 역사하셔서
우리 아들이
징계를 수정과 교정의 도구로 인식하게 되고
그 혼남을 사랑의 또다른 표현으로 인식하게 되도록 해 주실 것임을
믿는다.
어제 저녁 혼내고서 아이에게
마음의 독립을 준비하라고 훈계했다.
조금 더 부드러운 표현을 했었을 것을 ..하며 지금 후회는 하지만...
방에 들어가 있는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는
같이 지도를 들여다 보고
하나하나 대화를 하면서 여행 계획을 짰다.
아이가 얼굴이 벌개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빠, 이렇게 쉬운 걸 괜히 겁냈어요'
나름대로는 오래 참고 말로 격려를 했지만
아이가 그걸 징계 받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자료를 읽고도 파악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이가 어쩌면 나를 그리 닮았는지?
가계의 유전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섭다.
난 주님 때문에 어제는 아이를 좀더 유한 모습으로
징계가 다른 모습일 수 있음을 가르쳤다.
늦게 잤지만
아이에게 방법을 가르친 하루다.
요번 휴가철의 여행은 그 아이가 다 할 것이다.
난 뒤에서 아이를 쳐다볼 것이고...
적용
1. 모든 훈계를 '발전의 기회'로 인식할 것이다.
잔소리를 모두 기쁘게 받을 것이다.
2. 모든 훈계를 수정해줄 기회로 할 것이다.
따라서 성질을 내지 않을 것이다.
3. 우리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하겠다.
4. 내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겠다
5. 적응 안되는 상황도 주님께 올려서 오늘 말씀에 붙들고 기뻐하겠다.
기도
주여
오늘은 내 오래된 문제점에 대하여
상고할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남의 지시를 싫어 했었습니다.
그게 내 발전을 막는 것을 알면서도
극히 싫어 했었습니다.
주여
남에게 지시하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주여
징계자와 피 징계자 모두에서
잘못된 인식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허락하신 말씀대로
날 수정하는
주위의 말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타인을 징계하려는 어리석은 의도를 내려놓게 하소서.
징계보다는 수정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 조차
가능하면 내려놓게 하소서.
난 도저히 안되어요.
주님하소서.
주님 하소서.
주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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