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예수표 저울 錘( 잠11:1-15 ) 본문
제 11 장 ( Chapter 11, Proverbs )
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저울이 크다.
추는 저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추는 저울의 성능을 대표한다.
세상은 크다.
기독교인은 그 안에 몇 프로로 속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세상에 없으면 그 저울은 버려질 저울이다.
세태는 강력하다.
나는 작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세태를 누가 잡나?
예수님이 계시기에 난 그럴 수 있다.
세상은 속여서라도 성공하는 걸 정의라 한다.
능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커다란 불의의 세대에
기독교인은 정의를 밝히는 추의 역할을 해야한다.
공평한 추(錘)
그게 쉬운가?
왜 어려운가?
정의롭고 올바르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영 육적 악플러들의 악플에 담대해야 한다.
스스로도 옳아야 한다.
자신이 옳은 중심이 잡혀 있지 않고야 어찌 추의 역할을 감당하겠는가?
국제 표준 규격에 맞는 추의 규격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예수표 저울 추로서
표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아니
솔직히 말하면
누구도 되어 있지 못하다.
인생은
예수님 표 공평한 錘 로 되어 가는 '과정'이 다름 아니다.
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공평한 추로서의 자격에 대하여
오늘 묵상에서 여러가지가 되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나에게 힘든 것.
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그게 바로 '겸손'이다.
많이 교만하다.
교만하면 그게 욕이 오는 지름길임을 막연히 알고 있어도
귀를 닫고 눈을 잠궈버리고
속의 어리석은 자존심을 크게 열어놓으면
틀림없이 남 들의 칭찬만 원하게 된다.
마치 파리가 꿀을 얻으려 달려들듯이
속의 자존심을 가장한 사단의 세력들은 내 영혼이
여지없이 그들의 칭찬과
감탄의 눈빛을 찾아 허덕이게 한다.
이게 바로 교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고
그 교만의 행위가 바로 욕을 불러오는 순차적인 방법이다.
겸손해야 한다.
귀를 열고
눈을 들어
현실을 보고
주님을 보아야 한다.
칭찬하고 박수는 치지만
돌아서면 공중에 흩어지는 연기 같은 것이 세상의 그것이다.
그 허무하고 일시적인 영광을 위해
갈급해 하지 말자.
겸손이라는 것은
내 속에 눈을 돌려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스스로 위로하고
주님이 날 위해 돌아간 사실이 너무도 귀하게 다가와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되어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는
칭찬에 대한 과도한 만족도 없게 되고
남의 질타에 대한 흔들림도 별로 없게 된다.
오직 관심은
주님 예수님의 칭찬과 그 분의 위로에만 있을 뿐.
난 이러한 겸손으로 무장되어진 錘가 되길 원한다.
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주님을 믿어가며
주님께 가장 빨리 다가 가기 위한 도구가 '정직'이다.
공평한 추.
이 세상에 좋은 영향, 선한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Fragrance)가 되기 위해서는
겸손할 뿐더러
정직해야 한다.
특별히 주하인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어제 저녁 퇴근 10분 전인, 5시 20분 경에
갑자기 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부인이 다급히 내원하여 보니
뱃속에 피가 그득한 '혈복강血腹腔'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유로는
산부인과 적으로 주로 난소가 파열, 자궁외 임신, 그외 소수로 월경의 역류 등이 있다.
실은 원인은 무엇이든 간에
수술은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경의 역류라는 걸 환자들에게 설명하기 복잡한 부분이 없지 않고
혹시나 있을 나중의 불편한 부분들을 위해
난소 파열로 설명하면
쉽고 편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어쨋든 수술 방법과 결과에도 전혀 차이가 없으니 ..
수술하러 가서 배를 열어 보니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고여 있었다.
잘 닦아 주고 보니 역시 역류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 속에 설명하는 문제에 대하여
편하게 갈까? 라는 유혹이 생긴다.
잘 마치고 복막을 닫고
나오다가 '아차' 했다.
아기를 다 낳으신 분인데
한번 불임 수술을 권유해보았을 것을...
그러나, 원하면 다시 풀고 들어가서 또 시술을 해야 하는 귀찮은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응급수술이니 보통은 그런 것 잘 안해주긴 하는데...'하며.
난, 잠시지만
불신자 시절부터 최근까지 오랫동안 연습해 두었던 (^^;;)
사사로운 거짓말에 대하여
몇 번이나 멈칫 멈칫 하다가
솔직하기로 결정했다.
간호사 통해 멀리 가 있는 보호자를 연락해서 오라 했다.
상황을 다 보여주고
설명하고
불임 수술에 대하여도 장단점에 대하여 설명하고
선택을 권유했다.
잘 알아 듣고 이해하시며
피임은 본인이 하시겠다 하신다.
작은 '진실'의 승리다.
난 하나하나 내 습관을 바꿔 가고 있다.
수술은 무사히 잘 끝났다.
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아침에 홀몬제 타가시는 고우셨던 부인이 몇달 만에 외래에 오셨다.
수척해 지셨다.
말씀인 바
수술도 하고
천식이 도져서 아주 힘든 기간을 보내셔서 이제야 나오게 되셨다한다.
교회 다니시는 분이시기에
기도제목이라 하시니
얼굴을 어둡게 하시며
'교회에 얼굴 내밀지도 못하겠어요.
상황이 좋아야 남들에게 보기도 좋지요.
아프기만 하고
심지어는 에어컨 바람이 힘들어서 뒤에 쪼그리고 앉으니
아무도 관심도 안두네요.
주님에게 장해물만 되겠어요.'
오늘 구절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 하고'라는 구절이
자칫 그 부인의 그것과 일맥상통한 듯 하여
오싹하기도 했다.
실은 어느 사이엔가 교회에도 세속의 원리가 스며들어
물질이 풍요하여 헌금 많이 하고
당당하고 소리 큰자들의 축제장이 되어 가고 있으며
힘없고
아프고
소외 받은 자들은
그들의 중보외침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내세우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몇 기복교단에서는
' 예수 믿고 돈 못벌면 그것은 예수님을 욕먹이는 것'이라 하기도 한다.
물론 맞다 .
예수님은 축복의 근원이니 그런 것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게 선후가 바뀌면 안된다.
주님은 ' 그 나라를 바라'고 나서
의인이 된 후에 자연스레이 받은 '축복'을 말하지만
축복을 먼저 바라는 게 현 기복교단의 어리석음이다.
이러니.
역으로 오늘 부인같은 처지처럼 아프면 소외되고
주님의 공의의 매를 맞는 것 같은
죄책감만 더 떠 맞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게 교회인가?
그들에게는 '고통'이지만 거부도 하지 못하는
드러내놓고 말하다가 몰매 맞을 듯하고
진한 외로움 만 강요 받는 위험한 장소이지..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오인 받을까봐
전전 긍긍하는...
이게 그들에게는 지옥의 그림자가 아닌가?
오늘 말씀하시는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라는 말씀은
분명코 주님이 기뻐서 허락하시는
순서가 제대로 된 믿음이다.
그것은 꺼꾸로 의인이 안되면 버린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주님은 수없이 많은 성경의 예와 구절을 통하여
고난과 환란은 축복의 또다른 모습이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길이 되기를 원하시는 도구시며
또 몇 몇 분들에게는 성화로 달음질 하는 발판이 되게도 하신다.
고난과 환란이 있어야 은혜가 더욱 커진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모습에 참예하는 영광의 길이기도 하다고 하신다.
야채가 비닐 하우스에서만 자라면 맛이 없듯,
너무도 환경이 좋은 뉴질랜드 꽃이 향기가 없듯,
양식의 장어가 심해에서 자유롭게 자란 그것 보다 덜 맛있는 것 처럼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형통을 더 크게 맛볼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의인이 되는 지름길이며
성읍 모두 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공평한 추가 되고 싶다.
나 자신을 재는 올바른 추가 되어 행실과 마음가짐이 바르게 되길 원한다.
난 공평한 추가 되고 싶다.
남들이 아무리 저울을 가지고 장난을 해도
나 만이라도 이 어려운 세대에서
추의 표준적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저울을 흔드는 세대의 힘이 너무도 거세서
숨죽이고 드러내지 못하는
비슷한 감성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그것을 보여주는
올바른 추가 되고 싶다.
아니
공평한 추가 되고 싶다.
그리하기 위하여
내가 날 사랑하길 원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믿기를 원한다.
주님에 의해서
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런 공평함이 되길 원한다.
교만은 있으되
교만을 즐기지 아니하고
교만이 붙들되
늘 내려놓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칭찬을 그리 기뻐하지 않고
불평과 불만에 그리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되길 원한다.
주님 앞에
늘 고착되어
시선을 그 분에게 만 돌리어
세상과는 다른 의로움을 맛보길 원한다.
세상 모두는 날 보고 어리석다 혹여 손가락질 해도
그 손가락질이 그리 아프지 않기를 원한다.
틈 만 나면 우리 주님께 눈을 맞추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늘
땅을 보는 듯 하지만
늘
십자가를 올려다 보고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한다.
머리는 숙이되
어깨는 올라가고
등은 굽히되
자주 세우는 힘이 필요하다.
주여
당신의 추가 되길 원하나이다.
제 손을 통하여 나온 저 위의 고백들이
주여 변함없는 제 삶의 원리가 되도록 하소서.
그 원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여
당신의 존재하심을 늘 인식하고 살 수 있도록 놓치 말아 주소서.
당신의 손 안에 절 꼭 쥐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감사 감사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분당 샘물교회 피납 선교일행을 위해 기도한다.
특별히 의료원장님 교회 일원들이기에 오늘 다섯시에 중보 기도할 겁니다.
같이 기도해 주세요.
2. 다섯장 성경 읽겠다.
3. 겸손하겠다.
4. 날 사랑하고 날 위로하고 날 이해하겠다.
그것이 주님의 원리다.
5. 덜 기뻐하고
덜 성질 내고
덜 당황하고
덜 변덕 부리도록 기도하겠다.
이것이 겸손의 지름길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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