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이젠 복도 주소서( 잠10:18-32 ) 본문
제 10 장 ( Chapter 10, Proverbs )
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말을 줄여라.
말을 안하면
무언가 손해 보는 듯하고
내 속의 이야기를 해야 시원할 듯한 욕구에 부대껴
자신도 모르게 뱉어 내지만
말은 하면 할 수록 더욱 손해 임은
비단 좋은 글에서 뿐 아니라
스스로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서 그렇다.
오늘은 묵직하련다.
말을 줄이고
입술을 제어하라 신다.
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福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오랜 습관 중에 복조리가 있다.
복주머니도.
복을 달라고 치성드리는 일도 있다.
기독교인 들의 대부분이 '축복'에 대하여 빠지지 않고 기도한다.
상대적으로 '복'에 대하여 치를 떠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받기 싫은 게 아니고
'기복주의'의 집산지인 한국의 교계를 한탄하며 그렇다.
개인적으로 '후자'에 속했다.
더구나 물질에 대한 충족이 커지면 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자꾸만 경험 한 이후로
이 복에 대하여 더욱 빌지를 못했다.
대부분 주위에서 비는 복에 대한 개념이 물질에 속했고 기복에 가깝게 느껴졌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그랬다.
영적, 심적 복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기도 중에 '이젠 주님 이젠 저에게 복도 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복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던 느낌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기복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하다.
오늘 주님이 분명히 '복'을 주신다 하신다.
그러면서도 나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런 복에 대한 이중적인 눈초리가 이상하지 않은가?
뭔가 주님이 이 양측에 간격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 것이다.
이 빈 공간.
바로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진실이고
그 진실을 찾아서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보시기 위해
이런 이중적인 양 시각을 허락한 것이며
지식으로 알것 같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실의 변화나 마음의 태도가 변하지 않도록 허락하신 주님의 이유이다.
福.
이 세상의 것 뿐 아니라 하늘의 것을 포함하는 광의의 편안하고 풍성함.
물질의 풍요와 가정의 평안함, 사회적 성취, 인간관계의 원할 함 등 모든 것의 형통함.
거기에 심리적인 안정감
영적인 확장으로 성령의 충만함이 늘 유지가 됨
하늘 나라의 상급이 크게 쌓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사는 우리는 얼마나 물질이나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이 집중이 된 개념이던가?
여기에서 복의 개념은 양 극단적인 반응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영적이고 하늘 나라의 것이 다다..라는 파와
물질과 현시적인 것이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이다..란 파.
그게 둘 모두를 통합한 개념이 진짜 福이다.
그러나, 정말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그러는가?
몰라서 그러는 것도 있다.
기복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당연하다.
삶에 지쳐서 하늘을 생각할 여지가 없기에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물질에 매달리기도, 오히려 반발로 현실도피의 이유도 있다.
성령의 소욕과 물질의 소욕이 같이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 이유로 제시되기도 한다.
실제로 물질을 추구하면 마음이 평안이 사라지지 않는가?
심적인 이유로 감정의 혼란을 피하고자 주님의 평안 안으로 도피하다가 반대로 나가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주님은 오늘 말씀하신다.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그 부한다는 표현이 물질일 수도 있겠지만
뒤에 따르는 표현이 분명히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하신다지 아니하시는가?
난 복 얘기만 하면 속이 울렁거리던 만큼 근심이 없지 않아 있었다.
후자의 영적 복 만 복이라 생각하고 그것 조차도 복이란 단어를 극히 회피하던 자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온다.
복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소욕과 어긋나서 근심을 가져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그 이 '복'은 '성령에 의한 복'이라는 것이다.
또 다시 그렇다면 우리가 '복'이라 비는 그 복은 '우리가 비는 복'이었다.
우리가 비는 복과 성령에 의한 복은 어떻게 차이가 나고 왜 차이가 나는가?
성장에 있다.
어릴 때는 천방 지축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달라고 떼쓴다.
그 떼씀에는 우유통의 우유가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차분하게 성장하는 자들은 부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 분들이 원하는 것에 내 욕구를 맞추어 차분히 날 내려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 분들이 공여하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우유통'보다는 수백 수천 만배 큰 분량이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는 부모님과 효와 사랑이라는 개념하에 하나로 연합된 안정된 기쁨도 있다.
주님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오늘 말씀하시는 '福'은 그런 개념이다.
주님이 주시는 복.
내가 악을 써서 바라는 우유통을 넘어서서 주님이 공여하시는 복.
그것은 근심이 있을 수가 없지.. 당연히.
복이 목적인 기도보다
기도와 주님의 동행체험이 목적일 때 주시는 복이 진실한 福이다.
이제라도 커야한다.
이제라도 성장해야 한다.
오늘 주님은 예전에 보지 못하던 '福'에 눈이 가도록 허락하신다.
조금 컸으니 우유통 떼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들린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복을 누리도록 해주겠다는 예언성 응답으로도 들리니,
이거 축복이 맞나?ㅎ
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원하는 것이 뚜렷지 않던 나.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늘 부정적으로 패배의식에 젖어 있던 나.
그러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구절과
'의인'이라는 구절이
긍정적으로 느껴지고
'그래 나도 의인이고
나도 주님 안에서 이루어질 거야'라는 생각이 솔솔 들어오는 것이
나의 큰 변화다.
이것이 나에게는 '福'의 일부분이다.
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 주여 ! 성령의 회리 바람으로 내 속을 한번 쓸어 내소서 ! )
내 속의 온통 거멓던 것들이
회오리 바람이 불고 나면 맑아지는 대기 처럼 맑아져 버렸으면..
기도하며
주여'할 때 벌린 내 입을 통하여 다 빠져 나와 버렸으면
주님을 묵상하며
감고 있던 두눈을 통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안에
쓸리워 내려와 져 버렸으면...
그리하여
내 속의 악한 것들은 사라져 버려
의로운 주님의 그것 만 날 가득 채웠으면..
이제 주여.
당신이 뿌린 그 귀한 보혈로
내 속을 회리로 온전히 씻으소서.
이전에 그랬듯 다시 한번 그리하소서.
주여.
귀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주여 나도 복 주소서.. 기도한다.
주님이 주시면 주세요.
2. 침묵을 한다.
3. 들어 준다.
4. 겸손하겠다.
5. 성경 다섯 장 읽겠다.
감사하며 읽겠다.
6. 주님 주실 복을 감사한다.
감사하며 살겠다
오늘 하루.
난 의인이다.
날 생명의 길에 들어 서고 있음을 뿌듯히 생각할 수 있음을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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