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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만의 복[신33:1-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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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만의 복[신33:1-17]

주하인 2013. 10. 29. 10:09

 

앞을 가리는 것은

방해물이 아니었다

커튼 처럼

날 꾸밈이었다

 

 

내 주위를

흔드는 일들은

저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복이었다

나를 위한

진정한 복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자가

맞을 것만 같다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모세는 곧 죽을 자다.

그는 그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다.

"축복함이 이러하나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죽을 자가

축복의말씀을 전했다.

 

모세에게는 '죽음'을 앞두고도 '복을 전하는 자격'이 주어졌다.

모세는 죽음을 넘어서는 자였다.

모세는 '하나님 일'을 하다 죽어갔다.

죽음조차 모세에겐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서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세'에게 죽음도 의미가 없다.

모세가 부럽다.

그런 내가 될 수있길 간구한다.

 

 어찌되었든 모든 백성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한다.

 

 

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그분 하나님은 백성을 사랑하신다신다.

모든 '성도'가 그분의 수중에 있다신다.

당신의 백성을 모두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6. 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

    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어느 족속, 예를 들면 요셉등에게는

기가막힌 복을 이야기 하시지만

르우벤과

유다의 경우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복'의 내용이 조금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

 

 르우벤은 겨우

"죽지 않고..살기를 원한다'

 사람 수가 적지 않기를 원한다"

그게 복의 근거다.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이 죽었으면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 복이던가?

유다는 또 어떤가?

"싸움을 대신 싸우셔달라, 대적을 대신 치셔달라" 라 한다.

싸움을 싸우는 것도 '복'이다.

싸움을 이기는 것이 복이다.

 

그렇다.

우리가 바라는 복은

'요셉'의 만사 형통한 순간... 오늘 같은 축복 만 '복'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던가?

그러나,

요셉은 죽도록 고생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죽음' 같은 연단의 시간들이 있은 후에

오늘의 현상이 이루어짐을 잊으면 안된다.

르우벤의 복은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을 거친 과정의 산물이고

유다는 앞으로도 있을 싸움에서의 승리를 '복'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풀리고

마음이 평안하고 매사 따사로운 환경 만이 아니시다.

 온실의 꽃은 향기가 덜하다.

뉴질랜드의 화려한 꽃들이 향기가 적다한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목의 풀꽃들의 생기는 지난 밤의 이슬을 이고 있음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복'에 대한 근거는

지난 며칠을 묵상하며 '저주'와 '복'을 왔다 갔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수 있었다.

저주 마져 하나님이 이유가 되는 선택을 하면 '진정한 복'임을 알 수 있었다.

 

나.

저주와 복 사이에서

저주가 저주가 아님을 마음 속에.. 그리고 영혼 속에 앉히시려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뭘 그리 어려운 소리냐? ^^;; 하겠지만..

 지금 ..

갑자기 불어닥치는 환경의 변화에

예견되었던 불안감... 들이 자극되려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익숙한 빨간 불과 부정적 대처 메카니즘과 저주라는 공식 이외의...

다른 반응을 연습하는 것이다.

연습시키시는 하나님 안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으실까?

모두 다 아시면

모두 '선'이됨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면 '불안'해야 하는가?

아님이 너무도 당연한 논리이고

오히려 '복'임을 알고 받아 들여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여 왔음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오래된 내 판단 근거의 오류' 탓 아닌가?

그런데 그 판단 근거가 과연 '논리적으로 잘못'이 있던가?

아니다.

분명코 '세상의 합리적 기준'으로 보면 가능한 일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서 살아가는게 내 정체다.

그것..

예수님 구원을 얻는 순간 난 그리 운명지어진 자다.

그러기에 세상의 가치는 나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다.

모두 그리 나가야 하는 온전한 진리.

그렇게 되는 것이 복이다.

날 사랑하사 날 붙드시고 날 이끄시어 날 연단하시는 대로

어서어서 그 분의 뜻을

내 영혼에 받아 들이고

그리 기뻐하고 그리 느끼고 그리 감동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 묵상의 주제를 '나 만의 복'이라 정했다.

나는 '이 때도 복이다' 라 썼다가

아침에 묵상 주해의 글을 보며

'나 만의 복'이라는 표현이 좋다는 느낌이 들어 그리 잡았다.

 

복.

누가 누구의 상황을 '복'이다 '저주다' 할 수 있는가?

적은 돈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고

없는 살림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자녀가 많아도 행복할 수 있고

한두명의 자녀로도 많은 마음고생할 수 있다.

 오늘 '르우벤'이 죽지않고 살기, 자손이 늘려지기... 만 가지고도

'복'으로 인식할 수 있고

유다가 끝나지 않는 싸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싸움'을 복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보아도 알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모두 '사랑'하시어서

모세를 통해 복을 내리시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사랑'받고 있고

그들은 그러하심을 '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나...

나의 상황을 세상에 맞출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전의 상황과도 맞출 이유가 없다.

얼마 전까지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이룸,

환우 수의 증가, 그들의 칭찬, 복강경 기술의 증가

사진.. 찬양.. 기타.. 블로그.. 등을 복의 근거로 인식하며 가려 했다.

인식의 근거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또 그리하려 했다

맞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 맞다.

그것도 '복'이다.

그 당시 그때의 복.

'그렇다고 지금 달라져가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현상들이 '저주'는 아니다.

내가 부족한 것을 인식은 못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매일 말씀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한

난...하나님의 저주에 있을 이유는 없는 자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근거의 소리들은

더더구나 어이가 없다.

하나님은 위의 예를 빼더라도

나의 삶속에 간증거리로 그득채우셨고

매일 매일 말씀으로 날 인도하시고

내 영혼의 흐름 조차 돌리시는 기적을 지금도 매사에 보이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이제 내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

그런데도 하나님이 안살아계시다고 속삭이며

'저주'를 운운하는 것 말이 안되지 않던가?

 

흔들리긴 하지만

난 중심을 곧바로 잡는다.

점점 더 난 내 영혼에 주님의 함께 하심과 살아계심의 확신이 커져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근거가 말씀이 중심이 되어간다.

말씀이 성령의 검이심이 점차로 '체득'되어간다.

그럴수록 내 어이없는 심령의 거침은 잦아들고

겸손한 언어가 조금씩 내 입에서 나오는 빈도가 높아지며

머리는 점점 높이를 낮추게 되고

고개를 숙이며 땅을 보는 빈도가 조금씩 늘어난다.

나를 핍박하려는 자들에 대한 무조건 적였던 반발에 대하여

한번은 걸르려는 시도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얼른 받아 들여 날 변화시키려는 양식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고는 대견해 하기도 한다.

 어려움을 통해

그러한 나의 변화,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아주 조금이나마 다가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이

또 행복이고 '복의 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니.. .

그게 진정한 복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그래서 그 분이 우리를 '축복'하심을

심령으로나 실제로나 삶의 여러 환경으로 ......느끼는 것. !!

말씀에 근거한 '복'.

그래서 난 오늘도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려 한다 .

 

감사하다.

 

 

 

귀하신 내 하나님.

내 아버지 하나님.

저의 현상을 눈을 들어 보면

마치 꿈에서 깬듯 '걱정'덩어리가 밀려올 듯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근거하여 다시 바라보면

그것.. 저주가 아니고 '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

주님 .. 확신은 아니어도 그러함을 느낌이 훨씬 이전보다 강함니다.

주여.

오늘 말씀의 주제..

나만의 복이란 주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나만이 알수 있는 복.

주님과 나 만이 웃음짓게 될 수 있는 복.

주여.

세상의 것도 풍성히 .. ..더 주셨으면 좋겠고

막히는 것도 다 요셉님처럼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어서

얼마전 복에대하여 말씀하실 때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집 안의 부지깽이도 알 수 있는 '복'을 주셨으면 좋겠지만

아직 제 때가 되지 않은 것인지

주님이 저를 위해 주실 가장 큰 복은 따로 있는지...

세상의 것들은 절 다시 조이는 듯합니다.

주여.

이때 유다처럼 빕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복을 주소서.

이 싸움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복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내 대신 싸우시는 그 생생한 현장을 목도하는

그래서 내 심령에 더 이상 주시지 않는 세상 것에 대하여 흔들릴 이유조차 생기지 않는

그런 영혼이 되는

성화된 영혼이 되는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조금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은 세상의 것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많은 우리 젊은 아들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

주여.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복을 주소서.

주님이 직접 찾아가서 그러시옵소서.

그러시리라 확신하고 믿지만

아버지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주여.

이 시대에도 그리하소서.

제가 입으로 전도하는 사람들...

아주 많지 않지만 자주 있사오니

그들에게도 예수님 영접의 '가장 큰 우주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도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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