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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도피성 ( 민 35:1-21 ) 본문

구약 QT

나를 위한 도피성 ( 민 35:1-21 )

주하인 2011. 6. 5. 17:14

제 35 장 ( Chapter 35, Numbers )

 

어두움 만 보이던가

거추장스러운 줄만 보이던가

거친 경쟁 만 눈에 보이던가

 

이제 내 안에

세상 모두를 녹일

도피성을 만들긴 원한다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 긍휼을 확장시키고

타인을 사랑으로 이해코 싶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아내고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평강으로 내 주위를 확장시키고만 싶다

 

 1.   여호와께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돌아가실 모세님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주님.

모세의 마음은 어땟을까?

헤아리지 못하실 주님이실까?

모세는 어떤 생각으로 말씀을 듣고 레위인에게 알릴까?

아무런 회한이나 반발없는 '청정지심'이 정답 아닐까?

 

 주일날.

난 넥타이를 매고 교회에 오시는 분들과는 달리

아주 스포티 한 차림으로 간다.

목사님께서는 가끔 설교 중 정장을 말씀하시지만 강요는 하지 않으신다.

 본향에 돌아갈 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다 정리를 하고 이것 저것 타인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뢰는

그 기분은 아마도 이런 내 스포티 한 차림으로 교회에 가는 마음 위에 내리쬐는

오늘의 따사롭고 청명한 봄 하늘의 그것 아닐까?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레위인에게 '도피성'을 여섯 곳 만들라 하신다.

48곳 중의 여섯곳 12.5% 정도를 살인자들을 받아 들이는 곳으로..

그 말씀의 진의,

그 하나님의 공평하고 귀한 의미를 안다.

예수님의 죄인의 피할 곳으로 의미되시는

도피성의 뜻을 모름도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소유로 배정되는 부분의 상당 부분이

살인이나 나쁜일에 본의 아니게지만 연루되어 들어오게 됨은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낮은 자.

특별히 아직도 '상처'의 아픔을 깊게 짊어지고 있는

과거의 '나' 같은 마음이 아니던가?

 

 '너희를 위하여' 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님이 저 찝찝할 도피성의 말씀을 하신 것이 결국 그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임이 된다.

 폭이 넓어짐에 따라 타인의 아픔이 눈에 들어온다.

기도의 제목이 점차로

' 하나님에 대한 순종' 이 당연한 것을 넘어서

'타인에 대한 긍휼'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으로 나온다.

거기에 '스스로의 겸허함'.. 이 세가지가 언제부터 내 회복해야 할

앞으로의 내 원할 원함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조금씩 마음이 넓혀 지며 꼭 100% 완전해야 만 주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강박적 원함을 넘어서 내 부족한 부분 마져 그냥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도 받아 들여야 함을 기도하고 있다.

그것을 이리 기도 한다.

' 80점 만 맞는 것을 목표로.. '

20점 더 맞아 온전한 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 그 20점 안에는

인간의 속성상 이루어낼 수 없는 원죄적 속성과

알면서도 '삶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시간에 좇기어 어찌할 수 없는 부분...

내 성품적 특성상 더 시일이 필요하여 어찌 할 수 없는 결점의 부분 들이 포함이 되어 있다.

그게... '도피성'에 들어가야할

아직은 보호받고 용인 받아야 할 내 특성적 결점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져 간다.

내 소소한 잘못에 대하여 그리 크게 당황해 하지 않는다.

 주님 말씀하신다.

' 의도적 살인, 죄'는 들이지 말라. '

맞지 않는가?

타인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고 틀린 점이 잘못이라기보다 다른 점임을 이해하고

내 영혼의 도피성에 받아 넣고

그 들의 부족함을 위하여 긍휼한 마음을 회복해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것이

정말 '도피성'의 의미가 아니던가?

그게 아니고

나에게도 남에게도 100점의 흑백적 논리만으로 다가서면

거기에는 아무도 견뎌날 자가 없다.

 주님은 그것을 아신다.

" 그러기에 '도피성',  타인을 위한 도피성을 자신 안에 만드는 것이야 말로

  '너희를 위한' 도피성이다.."라고 하신다.

그때 그 말씀을 받아드는 내 심성이 이래야 된다.

' 아멘'

' 아멘'

' 아멘'

 

내 수십년 굳어진 인지력의 한계로

비록 모세로 받은 도피성 명령이 어쩌면 레위인들의 처음엔 흔들렸지만

곧 안정되어 아멘으로 받아 들어

모세님이 늘 누리는 그 초연한 여유로움 같은 그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잠시의 흔들리는 흔들림을

주님의 가장 선하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그것이 가장 선한 것이 맞음을 느낄 때

영혼이 아주 나른한 기쁨으로 퍼지듯

그리 매일을 살아야 한다.

 

오늘..

주일..

도피성이 바로나를 위함 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다.

아주 귀하고 감사한 주일이시다.

 

 할렐루야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경배합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제 안에 자꾸 도피성을 만들게 하소서.

타인을 위한 도피성을 만들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이해로 받아 들이게 하시고

그들 내 안에 들어온 어쩔 수 없는 실수와 어려움을 긍휼로 받아 중보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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