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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다 내 죄를 보다(눅6:39-49) 본문

신약 QT

나를 보다 내 죄를 보다(눅6:39-49)

주하인 2012. 2. 6. 10:32

(눅6:39-49)
42.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보다' 라고 되어 있다.

자신의 눈의 들보.

눈에 낀 색안경 .. 그것도 아주 아주 진한 색안경.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타인을 보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보지는 않겠는가?

이구..

 

내 눈에 들어 있는 그 '들보'를 보아야 한다.

 

오늘은 '본다'는 단어에 눈이 간다 .

내 눈 속의 들보....를 오늘은 보길 원한다.

내 속에 있는 것.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

내가 색안경을 끼고 있는지 모르면 어찌 내가 보는 세상이 잘못되어 있는 지를 알겠는가?

내 눈에 들보가 들어있는 지 '보지 ' 못하면

타인이 생각보다 잘못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까?

 

 '본다'라는 단어가 의미 심장하게 온다.

'see'

내 것,

내 가진 잘못된 왜곡.

내 속의 잘못돌아가는 오류.

잘못된 소리들.

그것을 '본다'고 한다.

느끼고 아는 정도를 떠나서

'보고' 확실히 깨닫는 하루.

 

 그 날이 되어야 한다.

 

 

43.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를 보아야 하는 이유.

'열매'를 잘 맺기 위함이다.

 

 열매는 무엇인가?

영적 성숙과 성화의 열매.......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는 영생을 누릴 천국에  가야지 않겠는가?

 

 세상의 열매도 있다.

관계의 선한 열매.

물질의 열매

...

하지만 그 모든 바탕에 '영적 평강',

즉 주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기쁨이 동반되지 않은 절름발이 축복은

'열매'가 아니다.

어느 것이 되든 '내가 가장 선하게 느끼는 ' 열매를 주신다.

세상에 열매를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게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자의 축복 아니던가?

 

내가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할 이유.

'열매'를 좋게 맺기 위함이다.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더욱 진정한 바탕은

'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열매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사는 자의

받을 '축복'인, 현상일 뿐이다.

그게 목적이 아니고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본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

'이땅에 살면서 나를 들여다 보고

 회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살면서

 성령으로 충만해 져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육적으로 열매를 누리는 것'이다.

 열매에만 집중하면 '비본질'이다.

 

 

 내면을 들여다 봄.

세상을 살면서 이루어야 할 것도 많고

가져야 할 것도 많다.

주님을 믿으면서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러기에 하루 하루가 '내적인 싸움', 영적 전투만 하기에는

너무 짧고 바쁘다.

거기에 당연히도 세상은 정신없이 변하면서 우리를 묶어간다.

스마트 폰..........으로 단 일초도 그들 없이는 아무 일도

심지어는 생각하지도 못하게 만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영적인 사명' 조차도

'사역'이라는 이름 하에 외적인 성과,

즉 열매 만 향유하도록 정신없이 몰아가게 된다.

그것이 옳은 지 그른 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자에게는

' 좋은 열매 ' 맺지 못하는 자는 ................ 불신자.......처럼 몰아간다.

과연 옳은가?

 

오늘 말씀은 분명히 '자신'을 들여다 '보라'고 하신다.

보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하면 열매는 맺어지는 게 옳은 순서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힘듦'을 초래할 것임을 바로 위에 썼다.

 

 내적 성찰은 속도와 성공과 외적 이룸 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삶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내적 성찰은 청빈의 삶, 청지기의 삶과  손해보는 삶을 먼저 각오하기를 전제한다.

빨라지는 속도에

내려 놓고 느림을 전제로 한다.

 

 남들하고 다름을 전제로 한다.

 

 가만히 있자.

지금은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소리 내고

자기 뜻대로 소리소리 내고

각종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고

심지어는 제자가 스승을

공직에 있는 '판사'가 '대통령'께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소년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마구 ..............대드는 세상이다.

격한 언어로 '모든 권위'는 무너지고

자신 만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가는

정말 무서운 '개성'의 시대인

초 스피드의 시대인데

정말 그들이 개성대로 살라고 하면 그럴까??

 남들하고 다른 삶을 이야기 하면 마음대로 도덕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 이외에

정말 개성적으로 살까?

 

 개성이 '개(犬)'성..이외의 어느 것도 아님을 알 수있다.

그들이 다르다고 떠드는 것은

'네티즌'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집단 에 파묻혀 마구잽이 소리내고

'인기'나 '여론'이라는 바람 불기도 전에 흩날려 버릴 허깨비의 뒤에서

마구 소리를 내는 자들이다.

다른 척하고 '도'를 넘나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의 '악'을 흉내내고 개발하고 있을 뿐

더 큰 집단, 형체도 없는 악에 묶여서 '탈개성화'를 달려 가고 있을 뿐이다.

성공하기 위해 이리저리 명예나 돈을 향해 뛰지 못하면 '루저'다.

왜인지도 모르게 초조하게 하루를 지낸다.

인맥이니 정보니 하며 하루 종일..........아니 전 인생을 매진하다가

영혼이 탈진하여 쓰러져 버린다.

조금 좋다는 것이 있으면 '이리 저리 몰린다. '

조금 소문난 여행지가 있으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다.

 

'제주 올레길' .

올레.......

프랑스와 스페인을 건너는 '야고보길'...

언제 부터인지 사람들은

그들의 내적 성찰을 무시한 외적 실적주의 삶에

영혼이 피폐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르고.......

그러다가 몇몇 현실에 밝은 자들의 '외적' 처방의 일환으로

'느림의 미학'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올레'다.

' 기와촌'이 인기다.

' 차 문화' ,

'사찰 체험'이나'명상'이 인기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이제 그들도 이유는 모르지만 '증상'의 심각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사회적 질병'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러한 수일의 처방으로 그들이 그러한 '내적 공허'를 치유할 수 있는가?

 

 

나.

난 어떤가?

난 진정으로 잘 안다.

내적 성찰과 성화가 내 삶의 기본 전제다.

그로 인한 '나'의 회복,

그것을 넘어서 '나'를 잊음.

정확히 말하면 ' 自我 否認'이다.

그것은 '말씀 묵상'이라는 진리의 도구를 통하여 가능했다.

하나님이신 말씀을 통하여 주신 하루의 거울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 '보는' 선택을 함으로

내 깨여질 부분들을 '삶에서 하나하나 투영'하고 깨뜨려 감으로

매일을 살되

그 삶과 그 삶을 사는 내 영혼이 점점 투명해지고 맑아져가

내 하루는 이유 불문하고 '기뻐져 가는 것'이 다.

그러함은 그러한 내 선택을 기뻐하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내가 선택해야 할 부분들이 있었다.

'읽지 않고 들고 다니는 책'을 내려놓고

분주함을 내려 놓고

'성공'하기 위한 '세상적 투자'를 내려 놓았다.

물론, 아직은...........아직은 이다....... 내 욕심을 채울

'부'와 '명예'와 '자식들의 성공으로 인한 만족' 등은 덜채워져 있다. ^^;

하지만 내 현실은

놀라운 변화들로 채워져 있음도 자신있게 고백해왔다.

이 블로그에서............

기적적인 의술의 변화..............               

 ..................      

..............

 

그러나

오늘 '본다'라는 단어에 내 눈이 걸림은

어쩌면 저리도 중요한 '성찰'에 있어서 게을러 져 있다던가

진실로 '느끼고 생각한다'를 넘어서는

'보는 정도'의 강렬한 것을 원하시는 것인 듯하다.

 

나를 보다.

내 죄를 보다.

내 죄를 보고 절절한 회개를 하다.

 

그게 쉬운가?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은

내가 결심 만 하면 어떻든 깨닫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 그래야 한다.

그래서 '열매'를 향유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좋은 열매를 향유하자.

기대가 된다.

가슴이 소망으로 벌럭임을 느낀다.

감사하다.

 

 

적용

1. 나를 보자.

 내 죄를 보자 .

 내 눈의 들보를 보자.

 보다.. 에 집중하자.

 정말 뚜렷이 보길 기도하자.

 

2. 기도하자.

 아버지 학교 가자.

 아버지로서 더 옳기 위해 가자.

 나를 들여다 볼 기회이기에 가자.

 

3. 성경 세장 읽자.

 성경은 거울이다.

 나를 들여다 보는 거울이다.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쓰인 책이다.

 

4. 나를 부인할 힘을 주시길 기도하자

 . 아플 것이다.

  참을 힘을 주시길 기도하자.

 

5. 지금의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뜻을 보자

 

 

기도

 

귀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은 본다는 부분에 눈이 갔습니다.

회개의 부분인 듯합니다.

그 회개의 범위에 대하여

이제 확연히 '눈으로 보듯이 ' 알게 하소서.

막연한 게 아니고 진정 그리보듯 그리 하소서.

성령님.

절 인도하시사

말씀대로 변하게 하소서.

주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정 변하게 하소서.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주님 깨닫는 지혜를 허락하시사

변화하게 하소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세상을

제가 핍박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의 잘못은 깨닫되 그들을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깨닫지 못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은 주시되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 미워함의 깊은 이유를 '보게 하소서.'

그게 교만 일듯도

혹여 과거의 투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막연히 짐작하지 않게 하시고

확연히 보게 하소서

내 내면의 왜곡을 보게 하사

깊이 회개 하게 하소서.

주님.

십자가 예수 보혈로 본 것을 깊이 씻음 받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소서.

그게 실로 나를 부인하는 어려움이라도

주님

성령의 도우심이면 전 가능할 줄 압니다.

주여.

이제 그리하소서.

본 것 진정으로 회개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특별히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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