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를 깨닫기는( 민24:105) 본문
(視線)
아들이 휴가 나왔네요.
젊음이 부럽습니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아이의 멋진 모습이
화려한 바탕에 잘어울리는 듯 해
사랑스럽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아이가
주님 안에서 더욱 지혜로와 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밝은 면을 기뻐하고 인정하되
혹여 눈감아왔던
자신의 부족한 면도
주님의 뜻 안에서
받아 들이는 자 되길요.
모두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리되길 원합니다
제 자식들.
주님 안에서 올바른 정체성으로
자신의 인생의 알참과 더불어
타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온전히 올리는 자 되길 원합니다.
제 24 장 ( Chapter 24, Numbers )
15.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노래를 한다는 것.
그 , 발람이 복술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다.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나가수'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
그 가운데 '임재범'이란 가수가 초미의 관심사다.
노래.
정말 잘한다.
비록 나와는 '감성'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꼭 공감되지는 않지만..
그 분은 세상의 감성으로 -난 하나님이 주시는 감성으로.... .지만... - 어찌되었든
'나가수'가 히트를 침은 그들의 감성 안으로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감성으로 끌고 들어간다 함은
'목소리'의 칼라, 가사,
그리고 그가 가진 사람들이 동감할 수 있는 삶의 배경
- 임재범이 그랬다.
그는 손지창의 이복형이고 힘들게 살아온 지금까지의 과거가 있고
가수가 무대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아픔이 있다 - 과 더불어 무엇보다
자신의 느낌을 '강약'과 '느림과 빠름'을 통하여
그들의 영혼에 흐르는 그 흐름을 강렬하게 외부에 표출해 내어
사람 들을 같은 흐름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 속에 그토록 갈구하는 '막히지 않고 ' 흘러갔으면하는
그 '흐름'을 흐르게 만드는 능력이 바로 '노래 잘하는 자'들의 비결이다.
발람이 비록 노래라 표현되는 '시같은 선언'을 하고 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은 어제 부터 아주 그윽하게 나온다.
이전에 그의 욕심이 사로잡혀 있을 때는
조금은 더 세상적이고 메마르고 변명과 논리 투성이 였다면
어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마자
이스라엘 군대가 서 있음을 아주 아름다운 '시'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에게서 '강하고 폭넓은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게 오늘 '노래한다.' 로 표현되고 있다.
그 정체가 '성령의 임재'시다.
아침에 묵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라는 찬양이 흘러나온다.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 '
그의 노래가 이제 이렇게 시작된다.
" '눈을 감았던 자' 가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누구인가?
눈을 감았던.. 과거의 표현은 무엇을 이야기 하던가?
그 뜻은 무슨 뉘앙스인가?
'과거'의 자신이다.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여 자신의 입을 노래로 표출시키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인하여
그 영혼의 폭팔적인 '확장'으로 인한 견디지 못하는 전율 이전의 자신,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점철 되어있던
아주 아주 세상적인
세상적이지 않아야 하는 제사장의 자신의 모습을
'눈을 감았던 자' 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이제 '눈을 뜨고 있는 자'임을
곧 다시 선언한다.
'말하며'는 무슨 뜻인가?
감동을 표현한다.
자신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모든 영혼의 순수함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동맥이 힘차게 흐르듯 흐리기 시작하는 그 감동을
'제 3자'이야기 하듯 이야기 해가는 표현이다.
'말하며.. '
계속 계속 아래에 그렇게 표현이 되는 것을 보라.
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자신이다.
남을 이야기 하는 듯 하지만
어쩌면 '박수를 쳐가면서 ' 자신의 안절부절함을 찔러대려하는
세상의 발락왕을 앞에 두고
이렇듯 혼자 감탄에 외치듯 '3인칭 기법'으로 선언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정말 맞는가?
성경에 나온다.
성령이 임하시면 말할 바를 가르치시리라.
당연하지 않던가?
누구도 모르는 하나님 만의 깊은 비밀까지 성령이 일러 주신다 하셨다.
그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내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그는 방금 전까지 돈의 욕심으로 시달려 당나귀에게 빈정거림 듣던 짓 선지자고
나는 지금도 눈 만 뜨면 미워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죄덩어린데..
근데 그러한 발람이 저렇게 선언한다.
나..
나도 선언할 수 있다.
이제 그렇다.
하나님은 '나의 정체'를 이렇게나 바꾸어주신다.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안그렇겠는가?
정말 부러운 부분이긴 하다.
그러한 발람의 선지자로서 기도분량이 부럽다.
'엎드려서 눈을 뜬자'
이 정체성이 가슴에 온다.
그렇다.
그는 아직 엎드려 있는 자다.
자신의 죄를 안다.
자신의 처지를 안다.
그러나 정말 두려워 하고 비굴한 자는
엎드려서 덜덜 떨면서 눈을 감고 처분만 바라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힐끗 머리를 비틀어 한번 얼른 눈치를 살피고
다시 달달 떨며 그 자세를 지속한다.
하지만 눈을 뜨는 담대한 자가 발람의 스스로를 이해하는 모습이다.
그는 발락에게 어쩌면 당할 수도 있지만
눈을 뜬다.
주님의 영 때문에 그렇다.
그는 겁이 안난다.
당당하다.
기쁘다.
겸손이다.
비굴이 아니다.
그게 가능하다.
오늘은 발람의 감동이 읽혀진다.
그 감동은 '성령 충만함'으로 인한 영혼의 지평이 팽창됨이다.
그것은 '자신을 확실히 깨달음'이다.
자신을 확실히 깨달음은 지혜의 바탕이다.
지혜는 그 바탕 위에 하나님의 영으로 더욱 확장된다.
'진실한 자아 정체성'은
시가 나오고 노래가 나오게 한다.
당당함이 나오게 하고
두려움이 없게 한다.
그의 삶은 이제 더욱 뚜렷하고 힘이 있어질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가 '발람의 거룩함이나 옳게 해왔음'이 아니었고
오랜 면벽이나 금식 기도 등의 결과가 아니란 점이다.
본인도 고백했듯
'눈을 감았던 자'가 '갑자기'다.
그렇지 않던가?
성경의 원리가 아니던가?
늦은자가 빨리된다 했다.
늦게 부름 받은 자도 같은 삯을 받는 비유가 나오지 않던가?
주님의 전적 주권이심이 맞다.
그게 은혜롭다.
그러한 사랑을 받음,
그러한 정체감의 변화를
이 부족하고 부족한,
계속 고백해오지만 너무나도 결점이 많은
소심하고 소시민적인 '나' 같은 자에게도
동일한 감동으로 인도하심이다.
아니.. 아직 부족하다 느끼는 그 허전함 조차
내 더 열심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발람님 처럼,
발람같은 사람도 그랬는데
조금은 덜 이중적인 나 같은 자에게
일상에서 슬그머니 내가 예상치도 못했던 시간에
주님의 저러한 깊은 사랑으로 인한
깨달음에 도착하지 않을 것인가 기대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도 주님을 늘 인식하고 살려는 몸부림이다.
참 여러 일과 유혹으로 인하여
주님을 매일매일 집중하는 게 어렵다.
시간은 나이가 들어가니 어쩌면 그리도 빨리가는 지..
어제였던 것이 벌써 오늘이 되어버렸다.
오늘이던 것이 또 한 것없이 또 내일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니던가?
나도 한번 조금 멋지게 살고픈 노력을 해야 하는데
주님을 기억하려면 기도도 더해야 하고 .....아......
그런데 그러함에도 아주 적은 시간의 묵상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처럼 아직도 날 붙드시니
그 얼마나 희망인가?
이제 바랄 것은
나의 나 됨을 확실히 인정함이다.
그는 입을 다물었던 자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 부족한 자다.
잘못 살아왔던 일들이 많다.
그것을 고백한다.
죄 속에서 살아 왔다.
그리고 지금도 알면서 홀가분히 털지는 못한다.
그러나 오늘 힘있는 고백처럼 나도 눈을 감았던 자였지만
주님의 뜻이 있으시면 저런 것을 과거로 흘려 보낸
새로운 나로 더욱 바뀌어 갈 소망이 생긴다.
또 나는 말씀을 매일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인지 검증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그 말씀이 오늘 내게 어떻게 적용 되어야 할까를 기도해야 한다.
묵상제목이 하루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묵상으로 내 하루의 등을 밝히고
내 인생의 결국을 이루어 내야 한다.
그래서 괜한 습관을 태워 없애야 한다.
걱정... 근심.. 부정적 판단.
설령 그래도 난 주님을 믿는 다..라 고백되어져야 한다.
그게 말씀을 듣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자가 되면 좋겠다.
나.
부족하다.
신비주의와 주님의 진정한 역사를 구분할 기회를 주시길 기도하자.
그게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자연스러운 구분이 가능하게 되어야 하고
내 주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덜 지혜로운 자가 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할 때만
선언하고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겠다.
그게 내가 되어야 한다.
그런 내가 되면 좋겠다.
지극히 높은 자의 뜻을 잘 아는 자 되면 진정으로 좋겠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내 상황에 대하여
더 몸부림치고 벗어날 려는 노력 보다는
주님의 뜻이면 그 자세에서
웃을 수 있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를 넘어 눈을 뜨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내 상황을 있는 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에도 비교하고 두려워하기 보다는
주님이 허락하신 상황에서 내가 남들을 위하여 어찌 섬기겠으며
나 자신을 통하여 어찌 주님 인도하실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자되야 겠다
그게 내 문제를 넘어
내 주위의 문제까지 확장될 지라도
그게 주님의 허락하신 상황이라면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자 되길 바란다.
그리고는 '감동 중에 선포할 수 있는 자 ' 되길 원한다.
계속 계속 발람이 외친다.
'말한다.
말한다.
말한다. '
나도 그리 되길 원한다.
적용
1. 주님의 때가 있다.
상황을 가지고 분석하고 결론을 내리지 말자.
희망을 놓지 말자.
어느 때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변한다.
나도.. 내 자식들도..
2. 눈을 감았던 내 모습을 묵상하고 인정하자.
잘못했던 것은 잘못했던 것이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그런 나를 눈을 감고 받아 들이 지 못했더라면
이제라도 눈을 떠 깨달아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듣자.
내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진정으로 나에게 합당한 이야기였던지 자주 묻자.
하루를 말씀 가운데 살자.
성경 세장 읽겠다.
4.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는 자,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자 되길 기도하자.
5 . 내 상황을 달갑게 받자.
엎드려 있는 자.. .. .맞다.
조금 있으면 일어날 수 도 있다.
그냥 엎드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을 뜨겠다.
주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다.
부끄러워 하지 말자.
두려워 말자.
6. 말하자.
내 의지가 아니고 주님의 성령으로 감동하여 말하자.
발람의 감동을 사모하자.
기도
주님..
발람의 선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주님
그 분의 나오지 않을 입에서 나오는 시가 참 감동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 만 드러내는 상황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
귀하신 주님.
그에게 임하셔서
자신을 깨닫는 그런 현상이 저에게도 있게 하소서.
조금씩 더 진실을 보는 연습을 하고
조금 씩 더 자유로와 지는 것을 보아
저도 그와 같은 과정을 감은 인정하오나
주님 더욱 깨닫는 속도와 폭이 넓어지게 하소서.
이 일상에서 주님을 인정합니다.
인정하는 만큼 제가 과거에 눈을 감았었음을 인정하게 하시고
이제 눈을 뜰것임을 기대하게 하소서.
더 주님 가까이 하게 하시고
주님 제 상황 모두 주님 인정하는 한
주님이 옳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 하소서.
더욱 화합하게 하시고
용서하고
주님 안에서 회복되어가는 자들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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