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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정직히 유지하라(왕하15:1-7)

주하인 2006. 11. 1. 08:39

(열왕기하15:1-15:7) 

 

3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걸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오 필승 주하인..ㅎㅎ !! )

 

 어떤 신앙 행실을 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누가 얼마나 정직히 행했었느냐도 중요한 것도 아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은

왕 같이

목사님 같이

대통령이나 고위 대작 같이

높은 지위나 명예에 있는 자들이 행하는 일을 중요치 않게 보신다.

그냥 주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있음을 귀히 여긴다.  

이는 다시말하면

우리 인생이 성공한 삶인 거 같든

비천한 것 같아 보이든

마지막 날까지

주님 보시기에 정직한 것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랴왕은 정직히 행했으나...라고 된 것처럼

나중에 변했음을 의미한다.

그 만큼 중요한 것은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끝까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정직하다 할수 있을까?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큰 교육과 대단한 인도를 받아서 멋진 인품이 되고 훌륭한 치적을 남기는

인생의 성공자가 되어서도 이룰 수는 없다.

오늘 아샤라가 그런 분 아닌가?

아버지의 가훈과 스가랴의 지도..

정말 부러워 해야할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넘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누가 과연 주님에게 끝까지 정직하다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이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선택 받은 순간 부터 우리는 아사랴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렇기에 날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려고 노력만 하면

(대단한 선교와 업적 보다는 날마다 주님 앞에 묵상함이 그래서 귀하다...)

주님은 그걸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시다.

 묵상을 빠드리면 안된다.

더욱 귀한 것은 '성무일과'등의 절제되고 규칙적 생활을 같이 하면 더욱 좋다.

큐티가 일종의 관상생활을 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원죄의 상처를 영혼에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반드시 매일 같이 어떤 존재에 의하여 피드백을 받고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그 존재는  '선'과 '악'의 두 세력이다.

선은 하나님이다.

악은 사단의 세력이다.

(우리는 늘 선악의 싸움터에 나간다.  이겨라 !! )

 

무신론이나 불신론 자는 조종수 없이 마음대로 돌아가는 배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기독교인으로 선택 받은 자도 일상의 삶이라는 영적 전쟁터의 접점에 늘 서있기에

매일 주님을 선택하는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는, 바른 삶의 궤적을 그리려 노력하지 않는 한

영혼의 조정키가 언젠가는 사단에 의해 점령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날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려는 몸부림이 없는 의식없는 삶은

마귀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다.

 

 

 

4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사랴가 하지 않은 것은 별것이 아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살았고

높은 위치에서

주님께 맞추어 살려고 최선을 다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정직했단 칭찬을 주님께 들을 만도 했다.

그러나 산당은 제하지 안했다.

항상 산당,...이게 문제다.

 

그런데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어도 주님은 정직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게 없으신 주님이 산당의 폐해를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럼에도 왜 산당을 그냥 남겨 두셨을까?

왜 정직하다고 했을까?

 

이걸 보며

주님의 원리에 대하여 다시금 깨닫는다.

 

주님은 우리의 현상태를 보고 '정직'하다고 판명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성장도

거기에 따른 열심

그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순종하는 것.

 

 결점을 어느정도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어 어느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는가?

원죄로 덕지 덕지 더렵혀진 인간이 어찌 완벽할 수 있는가?

주님은 이해하시는 것이다.

' 그래 그정도면... '

 

 산당이라는 결점을 통해 극복하는 과정을 보시려는 의도이실 수가 많다.

어쨋든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오는 과정을 '찬양'으로 인지하시고 즐겁게 받고자 하시는 목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이 땅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결점이 될 산당을 미리 미리 없애려는 '결단'이나

혹여 알지 모르게 우리 속에 '가시'로 변해버린 산당이 있으면 제거해낼 '용기'와 그에 따른 주님 앞에 부복해서 납작하게 엎드리는 우리의 몸부림과 주님에 대한 귀한 태도를 중히 보시는 것이시다.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산당이 그런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것.

주님께서도 특별한 질책을 하시지 않을 듯한....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커가듯

영혼이 커가면서 신앙인격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내야 할 뿌리.

날마다 들여다 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고

어느 순간 영혼 깊숙이 마치 오래전부터 나 였던 것처럼

나와 구분이 전혀 안가고 그게 왜 죄인지 모르고 나를 찔러댈 가시.

그러다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투사하며 원망하고 떨어져 나가버릴 도구가 될 가시.

그 가시가 내 영혼 속에 자라기 전에

산당 차원에서 미리미리 깨닫고 배제하지 않고는 안된다.

 

아사랴가 무슨 잘못이 그리 크기에 '문둥병'이란 말인가?

문둥병으로 살이 썩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그 호화로운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별궁에서 외토리로 살면서

주님께 버림 받았다는 의식으로 떨었을 그 몸부림이 더 비참했을 것 같다.

이 비참함은 마치 지옥의 고통이나 진배없었을 것이다.

 

 이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산당을 방치한 결과물이다.

 

 

의문들

 

1. 난 혹시 정직하다고 자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2.  나태하고 게으르고 매너리즘적인 신앙은 아닌가?

 

3. 성장은 필연인데 어찌하고 있는가?

  성장의 양분인 순종과 절제를 위해서 어찌할까?

 

4. 큐티는 감각적 만족과 본것 또 보고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아니하는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가?

  표현에 너무 지나친 자기 만족적 미사여구는 없는가?

 

5. 내 산당은 무엇인가?

   난 영적 문둥병자는 혹시 아닌가?

 

6.  내 깊은 외로움은 징벌의 결과인가... 주님이 주신 가시인가?

   혹시 이걸 통하여 나누라는 달란트인가?

   아니면 자중하라는 주님의 신호이신가?

   이걸 통하여 깨달아 나가는 과정이 주님이 보시는 인생의 정직한 길인가?

   정말인가?

   남들처럼 선교나 봉사나 구제를 안하고 못해도 괜찮은 건가?

  

7. 지금 누리는 평안이 평강인가? 아니면 마취인가?

 

8. 무엇을 해야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지치지 않고 꾸준한 열심을 할 수 있는가?

 

9. 내 주위에 오는 모든 분들에게 웃을 수 있는가?

  그들을 예수님으로 볼 수가 있는가?  과연?

 

10. 난 정직한가?

   주님도 그리 생각하실까?

 

 

 

기도

 

주여.

감사하나이다.

늘 깨우쳐 주셔서..

이제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는 정직함을 허락하소서.

내 산당을 깨닫게 하시고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그에 따르는 기쁨의 강도를 다시금 체험케 하소서.

그리하여

내 일생이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정직을 잊지 않고 행하는 그런 자가 되게 하소서.

남들의 입술의 말을 관심두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눈빛에 좌우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박수를 좇지 않게 하소서.

늘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 성령님

날 인도하시고 도우소서.

주위에 우리 하나님을 아는 향기를 날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늘게 하시옵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나의 생활에서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금수(禽獸)의 생활에 불과할 것이다.

- 레오 톨스토이  
 
 말한마디/ YM 찬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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