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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가지 않아서(렘 29:15-32)

주하인 2010. 4. 12. 10:51

제 29 장 ( Chapter 29, Jeremiah )

 

 

 

주님

벗꽃이 만발하고

봄기운이 눈을 현혹해도

말씀 사모가 약해지고

주님 십자가가 흐려지지 않게 하소서

 

주여

도우소서 


  
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다윗의 위에 앉은 성'에 거한 백성들이

이 지경이 되어 징계를 받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이름과 자격이 부끄럽다.

 그나저나 남아 있는 백성에게 끌려간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덜 완악한 자에게

더 완악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계속 '말씀하신다..말씀하신다' 하신다.

그분 하나님의 어쩔 수없는 징계의 마음,

그 안타까움이 읽혀지는 듯하다.

 

 한편 ,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가?

죄가 없어서 안끌려 간것이 아니지 않는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난 '죄없는 자' 같은 어이 없는 영적 교만을 가지지 말아야 하겠다.

 

 

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한, 끌려간 자에 대하여 묵상 시키신다.

주님의 공의는 가차없으시기도 하다.

그러기에 어쩌면 그들의 자녀, 그 어린 영혼 들조차

부모들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겪고 있을 지도 모를 바.

만일 그 상황에 있어

그 들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쩌면 굉장한 반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도 사실인가?

  죄는 잊혀지고

반발만 남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원망.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때 우선 '회개'가 중요하다.

자신을 돌이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힘들수록 더 주님 앞으로 다가와야 한다.

나를 돌이켜야 한다.

그 길 만이 이 땅이 '종말'로 향하는 수순을 막는 지름길이다.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만이

그리고 '돌이키는 회개' 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주님을 원망함은 있을 수 없다.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니라 나는 아는 자요 증거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였더라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자다.

주님은 모든 증거를 가지신 분이시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죄악성이 우리의 죄를 분노로 가리고

그 분노를 하나님께 투사하는 어리석음을 유지하려 해도

그 분은 '내 죄를 다 아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 흔들리는

내 속의 살인 죄 , 형제를 미워하고

간음을 행하는 그 죄를 다 아시는 분이시다.

내가 모르는 내 교만과 내 태만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오늘 묵상은 길다.

아침의 게으름은 내 아침의 고요한 시간을 줄인다.

난, 자꾸 말씀의 감동으로 부터 멀어져 가는 듯 하다.

죄송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와 메마름과

충성과 게으름이 되풀이 되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말씀을 놓치면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한번 은혜가 떨어지면 회복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은혜가 넘쳐서

주위에 큰 일이 없어지고

설령 생겨도 주님의 평강 가운데서

하나하나 자연스러워 질 즈음

어느 순간 주님의 은혜가 없어도 할 수 있을 것 만 같으면서

나름 감사와 더불어 묘한 자신감이 밀고 들어오면서

자신감은 감사의 분량을 점차로 줄이면서

대신 어느 순간 교만함으로 차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전과 비슷히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은 버걱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물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지 참으로 오래되고

내 입에서 '평강'이니 '은혜'니 소리가

줄어들은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도 모르게 '원망' 섞인 눈초리가 되어 있을 때가 없지 않다.

 

 오늘 끌려간 백성들을 묵상하며

그들이 겪는 고통과 고난이 안스럽고

그들로 인하여 아이들, 그 순진한 영혼들까지 겪을 고난을 묵상하니

주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하여

자칫 들어있을 원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한편 그들의 죄악이 결코 현실과 떨어진 설화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든지 자신도 모르게

저렇게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 말씀에 집중하고 살려 노력하는 나와

선민으로 늘 이끌림 받고 살던 저희들이 무엇이 다른가?

저들도 하나님을 늘 감사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 감동 대신 '자만감'과 '자신감'으로 자신을

습관 비슷한 행위로 만족감을 삼고

회개란 단어 조차 잊어 버린 결과물이 아니던가?

 이제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볼 때다.

 난 '끌려간 자'와 '남아 있는 자' 중의 어느 부분에 속한 자 일까? 

아마도 끌려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을 듣는

남아 있는 자의 입장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자신들이 남아 있게 된것이 자신들은 잘못이 크지 않아서 일거라는..

그래서 자신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듣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그나마 아직 덜 완악하고

그나마 회개하고 개전의 가능성을 가진 자라는 의미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덕이다.

그러나, 그들은 폐허된 성터에서 살고 있다.

주님 앞에서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더욱 더 노력하고 집중해야 하는

그런 자일 뿐이란 이야기다.

 그렇다.

문제는 '회개'다.

 회개가 있음으로 혹 있을 '원망'이란 사단에 지지 않을 수 있고

회개가 있음으로 인하여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자'가 될 수 있으며

회개가 있음으로 인하여 '회복'이 빨라질 수 있다.

 

 하지만 회개가 그리 쉬운 정서적 감성인가?

이전의 난 전혀 불가능한 자였다.

주일.

3시 반, 찬양예배를 마치자 마자

옆 건물의 5층에 올라가면 주일마다 큐티나눔 방이 있다.

정말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

나이 든 남자 분들과 여성 분들이 20여명 내외가

매주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

지난 수년 전까지 풍성히 나누던 매일 아침의 큐티 이후

난 블로그를 통해서 혼자라도 열심히 주님과의 동행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힘이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적으로 주님만을 기뻐하는 자들,

세속의 것보다는 주님으로 인하여 같이 변화하는 일상을 나눔을 기뻐하는 자들이 모임...

그런 매일의 모임은 현실은 어렵다.

그런 모임을 만들어 보고 싶지만

난, 성품상 모임을 가지고 그들을 배려하는 것, 인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두달 전 부터

주일 마다라도 나가서 나눔을 가지기 시작하니 마음이 낫다.

 나눔을 가지다가 깨달은 게 있다.

당연하지만, 말씀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은

그 분은 살아계심이다.

말씀을 나눔은 '감동'을 나눔이다.

감동을 나누기에 도덕책과는 다른 변화를 유발하시는 것이시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증거를 가지신 자' 이신 하나님이

말씀 중에 가끔 가끔 당신의 마음을 들추어 보이신다.

오늘 도 그러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말씀이니라'

어제는 그러셨다.

' 내가 나의 생각을 안다. '

흔들리는 나의 혼란을 이해하시고

그 분은 나같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시기 위해

'내가 말하니 잘들어라... 얘야..'

'내가 말하니.. '  알지?

' 나도 너처럼 생각이 많다.

 하지만 확실히 다시한번 내 변함없는 마음을 말한다.  들어라.........' 하시는

뉘앙스로 그 분은 다가오신다.

가끔은 사람들의 심사를 파 헤치셔서

나의 감성을 자극하신다.

그러시기에 말씀 묵상을 하는 중 나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현실 안에서 이루어진 '글'...' 사진'.... 등등 간증은 수도 없이 했다.

내면의 문제도 그렇다.

 

 이제 아직도 내 속에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

 .......       .......... 

이러한 어이없는 부분들을 남겨 놓고

주님 말씀 만을 열심히 붙잡고

내 할 수 있는 것 만 순종하고 회개하고 ..

그래.. 아예 못하고 원망 만 하다가 끌려가버린 '말씀'을 들었던 자들 보다는

조금은 나은 '남아 있는 자'이지만

그게 무엇이 그리 다른가?

내가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주님이 원하시는 '성화'와는 얼마나 가까운가?

나는 '선한 자'인가?

아니다.

'회개' 해야 한다.

 

 주일.

3부 예배 드리고 나서 12 반 - 1시 넘어서 까지 성가대 연습을 한다.

그리고는 점심식사하고  두시 부터 찬양예배를 하고

3시 반 부터 큐티 나눔을 하고 주일을 마무리하는 스케쥴로 움직인다.

우리 병원의 L님.

영어 예배 남성 찬양팀으로 와달란다.

부탁이지만 강요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리 느껴진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영성의 맑음'과 '영어 배울 필요성', ' 내 영성의 도움이 됨'.....을

장황한 이유로 들이댄다.

나.

내 식구와의 예배 시간도 필요하고

내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음도 있고

은혜도 나름 잘 받고 있다.

영어는 그리 안해도 다른 루트로 공부하고 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던가?

그래..

그럼에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지난 주 답사차 참석했었다.

하지만 찬양의 선곡도,

영어로 하는 생경함도 .....

무엇보다 위에 늘어 놓은 시간도 다 안맞는다.

그래서, 날 높게 보아주시고

봉사할 기회를 베푸신 하나님의 뜻 으로 인식하려 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싫음'에도 계속 문자가 온다.

'미워지려 한다. '

이 내 속의 오래된 걸림.

그럼에도 어제 나눔 방에서 나눔은

'용서'이다.

'회개'이다.

그렇다.

안다.

알지만 도덕책과의 다름이 또한번 느껴진다.

'하나님의 감동'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가 네번 되풀이 된다.

그래서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난 급하다.

분이 많다.

그리고는 얼른 후회한다.

후회함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로 깊이 들어가

주님 앞에 온전히 내려 놓으면 된다.

이전에는 안그랬다.

미움의 드라이브가 걸리면 '회개'가 어려웠었다.

이제

주님,

날 다 아시는 분이

내 변화의 증거를 ,

내 잘못의 증거를 다 가지시고 계신 분이

날마다 이렇게 말씀으로 ,

그리고 감동으로 권면하신다.

 나.

이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감동을 통하여

정말 돌리기 힘든 '원망'이나' 미움'의 감정을 내려놓고

주님께 해결 받기를 결심한다.

회개.

주님이 이미 부활로 이겨주신 싸움에서

내가 싸울 일이 없는 일.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고한다.

 

주님 .

날 도우소서.

날 깨우치게 하소서.

괜한 어리석음에 사로 잡히지 않게 하시고

주여

날 대적하고 힘들게 하는 자에 대한 미움을

없이 하소서.

이전에는 내가 싸워 이겨낸 후 주님께 칭찬 받으려 했으나

그럴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당신이 해결하소서.

저 이 속상함을 혼자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져왔으니

제 영혼에 붙으려는 사단의 발톱을 무디게 하시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

주님이 절 도우시면

나 미움대신 사랑으로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

이 어리석고 희한한 자를 끌려가지 않도록

그나마 주님 말씀 앞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늘 주님 말씀 앞에

주님의 감동 앞에 사로 잡혀 회개케 하소서.

그게 주님이 원하시는 이유이기에 그리하게 하소서.

주님 .

당신의 뜻대로 절 인도하소서.

성령으로 도우소서.

내 속을 성령으로 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회개하는 삶을 산다.

 성령의 열매가 아닌 모든 것은 회개할 것이다.

 

2. 아침에 더욱 일찍 일어난다.

 주님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한다.

 

3. 말씀을 나눌 자들을 보내주소서.

 묵상을 매일 같이 할 팀을 이끌게 하소서.

 저 , 게으르고 결단 없는 것 아시지요?

 말씀으로 기적을 체험하던 수년전의 기억을 새롭게 하소서.

 팀을 주소서.

 그때처럼 그리하소서.

 

4. 중보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버지 학교는 중보하는 기도의 기회다.

 훈련 장소다.

 가자.

 

 

5. 성경 여덟장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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