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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멍에 쇠멍에 (렘 28:1-16 ) 본문

구약 QT

나무 멍에 쇠멍에 (렘 28:1-16 )

주하인 2010. 4. 10. 09:57

제 28 장 ( Chapter 28, Jeremiah )

 

 

거짓은

때로는 아름다워 보이고

때로는 달콤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아하기도 하여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거기엔 생명력이 없고

어두움이 깃들어 있다

 

주님의 뜻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과도한 몸부림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위해

꺾여져

화분을 떠난

저 꽃의 순간 아름다움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내 생명은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안에

붙어 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하나냐의 말이다.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일까?

어찌 그럴까?

거짓인가?

잘못 들었던가?

거짓이라면 '야욕 ' 탓인가?

두려움이 없는 탓인가?

잘못 들었다면 왜일까?

 말씀 앞에 서있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함은 아니던가?

'욕심'이 화를 부름일 터... 
   
 
6.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 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오시기를 원하노라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하나냐는 위의 거짓 선언 만 멈춘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님의 목의 나무 멍에를 떼내어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여호와 전의 기구가 2년 내에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선언하자

예레미야는 '아멘..' 그대로 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과 더불어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며

약간은 어이 없다는 투의 말을 마친 후

다시 선언한다.

' 나무 멍에를 꺾었지만 대신 '쇠' 멍에를 메게 될 것이다.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 
  그 멍에가 자신에게만 국한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전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특별히 책임질 위치에 있는 자들이나

나이가 들어 행동거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에게는

더욱 행동에 책임을 져야할 부분으로 인식이 된다.

 

 

 묵상은 단순하다.

자신의 욕심이나 

혹은 무지한 탓이나

신비주의 혹은 잘못된 신앙관으로 인하여

그것이 옳을 듯한 잘못된 '확신'이나

과도한 인간적 '긍정적 신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미로 메꿀껏을 가래로도 못막는.. 그런 어려운 형국을 초래할 수 있다.

예레미야님은 뼈 있는 소리를 하신다.

' 그 긍정이 이루어진다면야 좋겠지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특별히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무엇이던가?

'好 不好' 가 너무 뚜렷하고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탓에

한편으로 그게 '효율성'이나 궤계에 빠질 위험성은 줄어들게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이 진심으로 원하시는 '연단'의 원리

조금 인내하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서 기다리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주님의 시간에

우리의 성화와 더불어 세상의 축복도 같이 허락하시는

그 원리에는 어긋나게 할 위험성이 종종있다.

 문제는

이것을 연단의 원리 가운데 기다리는 것이

가끔 나로 하여금

'무능한 자' 내지 '잘못된 판단'으로

시간을 놓치는 것은 아닌 가 하는 '헷갈림'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때 정말 내 결단이 필요하게 되는 것인지

어느때 기다리는 것이 옳은지 구분을 못할 때가 있다.

 

 아들 들.

조언이 필요하지만

그들이 받아 들이지 않으려 할 때

기도하고 기다리며

내 초조함 조차 다 맡기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권고만 한다는 의도로

'잔소리'가 시작이 되고

그것이 '분란'의 소지로 연결될 때......

어디까지 기다릴 까?

 

예를 들면 그렇다.

가끔, 정말 그럴 듯한 논리가 나에게 확신처럼 다가와

기다리고 참았던 수개월의 시간이

헛되이 되어 버리고 말던 경험들.

혹여... 이것이 나무멍에를 쇠멍에로 바꾸던 것은 아니던지.

 

그러나, 진실로 필요한 것은

시간이 초조한 듯하고

듣기 싫어도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고

기도나 말씀 묵상가운데

그것이 옳다 하면

내 경험적 기준에 어긋나더라도

그 어긋남이 '멍에'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냥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알지 모르지만

어쨋든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간다.

오늘 아버지 학교도 있어 그 곳에 가는 것이

내 이론상 내 속에 '분란'을 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고

피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 '멍에'가 나에겐 많기도 하다.

하지만, 가야만 할 자리.

가는 것이 '나무 멍에'인 듯 싶다.

그것을 피하는 내 편안한 논리는

나로 하여금

내 주위로 하여금

나 때문에 '쇠멍에'를 씌우는 격이지 않을 까 싶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비단 이것 뿐일까?

논리적으로 합당한 듯,

인간적으로 그럴 듯 한 듯,

그래서 가능하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유혹을 가져오는 것이

'나무 멍에 '일 수 있으며

그 나무 멍에는 '피할 경우' 더 큰 '멍에'로 씌워질 것이

예상이 되면 그것은 틀림없이 나무 멍에가 맞을 것이다.

 나무 멍에는

내 감성에 맞지 않을 것이지만

주님의 뜻 안에서 살펴보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쇠멍에는

더 질기고 강한 '회초리성' 고난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당신의 말씀에 따라

나무 멍에를 메기로 결정합니다.

주여.

수십년간 잘못 '하나냐'처럼 습관 들어온

이 짐승같이 우매무지한 인격의 소유자가

그 처럼 손을 내밀어 나무멍에를

나도 모르게 벗기려 할 시

주여..

성령으로 깨우치게 하소서.

더 낮추게 하소서 .

아뭇소리 하지 않고

나무 멍에의 뜻을 감내하게 하소서.

멍에의 버거움 동안

주님

저 가만히 인내하게 하소서.

아무렇지 않게 하소서.

남들을 위해

나 자신의 연단을 위해서도

그 나무 멍에를

기쁨으로 지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아무렇지 않게 하소서.

오늘은 연단의 시간,

오늘은 나무 멍에를 지는 시간,

그럼으로 승리하는 시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간절히 비옵건데

그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제 마음과 영혼을 지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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