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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좌절은 회복의 신호이다(요20:1-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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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좌절은 회복의 신호이다(요20:1-18)

주하인 2006. 3. 7. 12:10

(요20:1-18)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뭔가 착각이 생기지요? )

 

 

 아...

상처가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을 보고 체험하고 , 그 사랑이 그리워 견디지 못하는 여인.

그 여인이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 새벽같이 무덤에 왔다.

 

 그리고는 문이 열림을 보았다.

육신으로 지각했다는 얘기이다.

 

 사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부활의 엄청난 역사적 현장이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을 한번 돌아서 인식체계를 거쳐나온 후에는 '알지 못하겠다'로 걱정되는 감정으로 변화되어 나왔다.

 

전혀 반대의 현상 !

 

아~

사람은 한계가 있다.

아주 귀중한 증거다 .

 

 절대로 사실을 자신의 본대로 이해한 대로 판단하면 안된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 (아마도 요한이 아닌가 싶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힘껏 달려갔다.

아마도 베드로는 좀 통통한 사람이거나 다리가 짧은 사람이거나 운동신경이 둔하였던 사람일 가능성이 있어서 젊은 제자 보다 많이 쳐저서 따라갔다.

 이런 유추는 요한이 먼저 가서 들여다 보고 있는 사이에야 따라왔다고 표현 되어 있음을 통하여 그릴 수 있는 상상이고 그의 급한 성격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모습이 상상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 요한 보다 실행력과 결단이 빠르며 의리나 사랑이 좀 더 많은, 보스형의 인물이라서인지 늦게와도 먼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무덤 안으로 들어간 것을 상상할 때 성경의 비디오적 묘사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어쨋든 그의 눈에 처음 뵈는 것은 벗겨진 세마포와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The cloth was folded up by itself, separate from the linen.

  (표정이 놀랍지요?ㅎㅎ )

 

 더 놀라운 사실은 머리 쌓던 수건이 마치 영어표현 대로라면 살짝 빠져나와 둘러 쌓고 있던 옷감들이 순간 툭~하니 떨어져 서로 겹쳐져 있는 것 같은 형태로 놓여 있었다.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 갑자기 연기 처럼 툭하고 꺼지며 0.01-2초 정도 허공에 머물던 옷감들이 순간 털썩 아래로 떨어져 내려 있는 그대로 겹쳐져 내린 모습.

 

 이것도 기적이지 않은가?

 

아유.

부활 가지고도 놀라지 않는게 요즘 심사인데

이것 가지고야..ㅎㅎ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 아기들 빼고 성경은 누구나 여심히 읽어야 합니다 !!)

 

 

사람은 어리석은 결점을 가진 바는 위에서 잘 알수 있었다.

 

거기에다 '지식' 마져 부족하면 더더구나 큰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읽지 않아 부활에 대하여 전혀 모르면...

 더더구나 알아도 그 지식을 현 상황에 적용시킬 지혜가 없으면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도 많이 '지혜'에 대하여 언급하셨는가 보다.

 

 실은 이사장님의 엄명으로 8시 반 부터 아침 근무 시작하시라고 하셔서 9시 부터 시작하는 여성병원과 시간 차이로 큐티를 부득이 하게 못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원 큐티 7시 50분 타임에 '매일성경'으로 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거기에 '재림 주 '예수께서 오실 부분에 대한 내용이다. 

(4 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우리는 아직도 패배의식, 게으름 등의 이유로 주님 오실 그날을 , 아니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전혀 이해조차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베드로 같이 , 마리아 같이, 요한 같이 좋아하고 기뻐 대비할 일을 거꾸로 상심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

그래서 부활의 영광을 참여치 못하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보지 못할 위험 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늘 말씀으로

그 말씀을 일상에 적용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어제 ...

온누리 월요 큐티 집회에 다녀왔다.

목사님께서 지난 주 적용 부분을 잘 하였나 여쭈어 보시면서

성경속의 인물 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믿고 자신에게 적용하여

병이 나은 몇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

 

 아..

큐티를 하면서 깨어 있고 일상에 처절히 믿고 적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늘 깨어 있어라  )

 

 

 깨어 있지 못하면 이리 된다.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두 남자들...

 

나는?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이러한 눈물  )

 

 

 처음 부터 끝까지 마리아는 질기기도 하다.

 

그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가끔가끔 몸을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본다.

 

그 얼굴이 순간 상상이 된다.

콧물이 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눈꼬리는 약간 쳐저 있을 것이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을 것이다.

눈은 빨개져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나사로와의 사별 경험이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보다 더 큰 진실한 사랑이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남겨 놓았던 이별의 고통이

아직 전혀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제 그도 부족하여

예수님 시체마져 없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니 이해할 수조차 없는 이 부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생의 이 거칠고 질기기도 한 질고도

체념하면서

겨우 겨우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 같이

이어왔건만

이제 겨우 다시 생의 의미를 불태우게 하시던

그분

예수님이

또다시 거친 인생의 횡포 속에 강제로 이별하게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그분과의 추억을 회억할 한 줌의 끈마저 없어지다니

이 어인 충격이란 말인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은 그녀의 영혼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같이 왔던 사도들이 가버려도

마치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안절부절

애절하게

그 무덤 곁에 서서 울며

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깊은 허탈 

깊은 상실

깊은 슬픔

 

과연 2천년 전 그녀 막달라에게만 보이는 증상인가?

 

오늘날도 주변에 아주 많은 분들이 이런 모습으로 허탈해 하고 있다 .

비록 마리아와는 다른 이유로 해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유는

 

처음부터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자신의 인식과 지혜의 문제에 있다.

 

주님께 고착되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성경의 지헤로

성령의 은혜로

이 세상이 주님의 뜻대로 운행되고 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실은

이 울음은

이 상실은

 

기쁨의 또다른 신호이다 !

 

 

 

 어찌되었든

마리아는 참으로 끈질기다.

순수하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

    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드디어 어떤 징조를 만난다.

 

갑자기 없었던 천사가 둘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반응이 어리둥절하다.

 

갑자기 이런 기이한 현상, 거기에다 사람이 아니고 천사인데

너무나도 당연히

놀라고

기대하고

웃고 하여야할 상황에

13절에서는 그냥 아무것도 못느끼는 사람처럼 천사의 물음에 대답한다.

 

이것 역시 이해할 만한 살아 있는 성경의 비디오적 묘사이다.

너무 지쳤을 때

너무 감정적 소요가 클때

사람들은 무감각 해진다.

 

 한계 상황, 임계상황에 다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노이로제 ,우울증 등은 별다른가?

 

 반응은 이렇다.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서 회복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경우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르다.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포기' 대신 천사로 '회복'을 종용하시는 것이시다.

 

 

하.........

희망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비록 깊은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

 

당신께서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천국 시민으로서의 체질 변화를 위하여

바닥까지 경험하였던 고통을

천사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로 우리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키시는 것이시다.

 

 

선을 위하여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제 때가 얼마 안남았다.

마리아가 곧 웃는다.

 

우리도 곧 웃는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 처럼...

 

문제는 너무 지침에, 고통에 , 우리 내면의 외침에 기울여 주님을 알아보는 시간이 늦어지게 되는 것이 문제지..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예수님이 부르신다.

곧..

 "하인아 !"

 

그럴 때

 " 예수님 " ~

하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르니라

그리고는

 

이 회복을

이 부흥을

나 혼자 향유하지 말고

남에게

전파하여

주님을 드높일 일만 남았다.

 

" 주님이 날 이렇게 부흥 시키셨다 "

 

 

 

 

 

적용

 

1. 인간은 결점이 있는 존재임을 명심하자

 너무 의지하고 기대하면 그 만큼 실망도 한다.

 인간은 사랑할 존재지 의지할 존재는 아니다.

 

2. 성경을 5장 읽겠다.

 

3. 끝까지 믿고 주님 의지하겠다.

 

4. 주님 부르실 때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

5. 전도한다.

  1명이상

 

 

 

 

 

기도

 

주님

암담한 마리아를 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깊은 실망과 좌절이 느껴져 가슴이 아파옵니다.

많이 겪었던

감정적 곤란을 2000년 지난 오늘에 제가

남일이 아닌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이도

 우리 주님께서

곧 끝날 것 처럼 괴로운 인생의 슬픔 속에

새로운 질서와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메시지를 보여 주시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어렵지만 지치지 않겠나이다.

마리아 처럼 사랑이신 예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뒤에

마치 오래전 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레이 오셔서

저를 불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전혀 새롭지 않다는 듯이

저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도우실 줄 믿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믿음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평강과 축복을

주님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끝까지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

 

주님 놓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는 항상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먼저 찾아오신다.

-필립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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