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기본을 회복함(눅11:1-13) 본문
(눅11:1-13)
주님
제 마음에
단순함을 회복시키소서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함을 제거하시고
평강의 청명함으로만
절 사로잡으소서
날 드러내는
온갖 속삭임을 낮추시고
오직 내 안에는
십자가만 살아나게 하소서
정말
저 혼자서는
어찌하기 어려우니
성령의 불 밝히사
내 모든 삶
주님 말씀에
투영시켜 밝히소서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제자들이 요청하는 것이다.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러니, 그러신다.
'기도는 이렇게 하라'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
용서하시고 시험에 들지 마시게........
....... '
누구나 다 아는 기도 .
하지만 그 안에 모든 기도의 내용이 다 녹아 있는 기도.
'주 기도문'
또, 그 안에서 '회개'
그리고 '믿음'
11.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믿고 비는 자에게 무엇이든 주시지 않겠는가?
그리고 다 주신다............의 궁극에는 '성령' 을 주신다...가 있으시다.
나.
요 며칠.. 나 만의 묵상을 했다.
흔들렸다는 이야기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런데 그랬다.
그 흔들림 기간 중
난
' 상황에 따라 형편없이 부족한 내 믿음'과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내 '자아'를 발견했다.
조금의 시련이나 자극만 주어져도 여지없이 흔들려 버리는
내 믿음없음을 발견했다.
확 돌아서는 불신까지도 가능할 것 만 같다.........는게
내가 스스로 발견한 내 모습이었다.
수년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내가 누리던 그 놀라운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이 세상에 부르짖으려는 노력과
'매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냄이란게
얼마나 뿌리 얕은 모래성 같은 어이없음이었던 가를 발견하였다.
어쩌면, 나........
나름 머리만 높아져 교만 덩어리 였던 지 모른다.
그리고 아직 '나'를 전혀 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처절히 발견하였다.
지금 세상을 돌아본다.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
어린 아이 부터 정치가 , 최근엔 '판사' 들이
온통 '육두 문자'를 써가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가카 새끼.................'
'................................'
그들의 내용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옳다.
타인 들은 다 틀리고 부족하니, 찝어내고 조롱하고 고쳐야 한다.
어차피 결점이 없을 수 없는 원죄적 인간들의 사회니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나올까?
그러니 그들의 소리가 일견 옳을 수 밖에...........
그러나, 자신들에 대한 반성은 없다.
그게 문제다.
판사가 정말 무엇하는 위치인가?
그 나이에 육두문자를 트위터에 올리는 것은
옛날에는,
아니다... 솔직히 인터넷이나 모바일이 발전하고
세상에 '사단'의 장난인 '포스트 모더니즘'이 범람하기 전인
십여년 전만해도
저런 짓들은
'아이'들,
그중에서도 가정교육 받아보지 못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공무원 품위범이라는 법에 어긋나는 것은 둘째치고 말이다.
나를 돌아보면 '부끄러움' 뿐일 것을
나는 무엇을 해도 괜찮은 게 풍조 아니던가?
이... 사단의........궤계들...............
거기에 춤추는 이 세상의 대다수들.........
그렇다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가?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의 근간을 무시하며
'타협'이라는 그럴듯한 인간적 이유를 내세우며
종교간 화해.....를 시도한다.
이제는 개신교 목사들이 앞장을 선다.
미국에서는 종교간의 타협이라면 큰 행사가 얼마 전에 뉴욕에서 있었다.
우리나라 '큰' 목사님도 얼마전 교회에 '중'을 초청해서 법문을 들었다 한다.
마구 마구 .....회오리친다.
좋다.
모두 옳다.
틀린이유가 하나도 없다.
인간적으로.........
그러나, '성경'에는 어긋난다.
하나님 말씀에 틀리다.
그들은 '그들' 중의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본'을 무시하고
결국 그들을 목자로 오해 - 그게 이리지 목자인가 ?- 하고 좇는 대 다수의 교인들과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저렇게 똑똑한 자들도 저러는 데.......라는 이유로
믿을 기회를 박탈하는 너무나도 큰 죄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말씀하시자 하시는가?
'기본'이다.
기본을 회복해야 한다.
주 기도문은 '기도'의 기본이다.
제자들은 나름 오랫동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머리가 커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본에 대하여 물어보고
기본인 '주기도문'을 말씀하신다.
신앙의 기본은 '믿음'이다.
믿지 않고야 어찌 신앙이라는 단어에 어울리겠는가?
믿는 다면 무엇이고 달라지 못할까?
달라고 한다면 어찌 기대하지 못할까?
그것을 절절히도 예수님은 저리 표현하신다.
어찌.. 어찌...어찌..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심의 가장 궁극에
'성령'을 말씀하신다.
아.
수준 낮은 나는 실망할 뻔했었다.
과거에........
'필요한 것은 저 대답 아닌데 주님은 슬그머니 또 옆으로 빠지신다...^^;'
나에게 얼마나 절박한 것이 많던가?
내눈에 걸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고
이 사회에 바꾸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내 식구들 중에
내 직장에
내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바꾸어야 할 자들이 많던가?
가슴이 터질듯한 부조리들..........
내가 받아야 할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필요한 것은 많은가?
그런데 , 성령이시라니................
지금은 '성령'을 주심이 가장 옳은 것임은
수긍하고 있다.
아니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있다.
그러나, 오늘 묵상의 '기본'이라는 관점에서
성령을 주시겠다 약속하심은
또 새삼 다른 느낌을 주신다.
'성령'
하나님의 영.
모든 능력의 원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흘러들어오는 통로.
그리하기에 '나 ' 뿐 아니라 '타인' , '모든 것'들에게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다.
성령을 주신다함은 그러기에 모든 것을 주신다 하심이기는 하다.
그러나, 위에 기술한 대로 실망의 이유는
직접적인 해결책
즉, 나 외의
나 밖에 있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어
타자, 타인을 변화 시켜 주신다는 즉각적이고 쉬운 응답이 아니고
어쩌면 '나 ' 까지 변화 시키는
조금은 우회적이고 시간이 걸리는 답이기 때문이기도 하시다.
그러나, 타인을 변화 시키려는 노력은
위에 기술한 세상의 혼란 처럼
나는 변화가 되지 않기에
또 다른 혼란스러운 '타인 '으로서 내가 그냥 남아 있기에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기독교를 믿는
혼란스러운
타인'
그게 '나' 일 수 있다.
예수님이 피 흘려 돌아가신 이유인
'나'가 변화 됨이
주님의 진정 나에게 원하심이 아니던가?
그게 '신앙'을 허락하신 '기본' 이유가 아닌가?
성령을 주신다하심은
나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내 눈을 넓게 하시고
나를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어
나는 죽고
내 속에 예수님만 계시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커져
어떤 것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안 주셔도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영적 성숙에 도달하는 것이고
나의 간절한 바램
현실적 필요성의 성령님의 주권적 허락하심에 따라
세상적인 것도 변화시키시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용
1. 기본을 회복하자.
. 나는 낮추고
남은 배려하고
기본의 가장 큰 기본은 '내'가 죽어야 한다.
'내 기분' , '내 자존심.'..........'나...가 죽어야 한다.
. 성령을 사모하자.
안된다.
참 열심히 내 서슬 퍼란 '자아'를 없애려 기도했지만
아직도 때가 되면 칼날을 드리민다.
성령께서 도우셔야 한다.
. 성령충만을 사모하자.
성령을 사모한다. 사모한다. ....... 하면서
진정한 성령의 체험은 .........?
. 기도의 내용을 다시한번 돌아보자.
2. 성령께 간구할 제목
. 아들 2.
학교 하나는 되었다.
더 좋은 학교가 마지막 추가 배정이 있는 날이다.
'타자' 에 대하여 하나님이 손을 쓰실 부분.
. 아들1
장래.
마음을 풀어주실 것.
. 아내.
건강
3.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여.
용서하소서.
자그마한 흔들림,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잠시 바닥치기하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 머물면서
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컸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차갑게 정죄하는........
나름의 오랫동안 많은 영적 싸움을 거쳤다 생각했음에도
이러한 변화없음은
저를 '무기력'에 빠드렸습니다.
주님.
조금만 더 강한 자극이면 여지없이 넘어져 버릴 것 같은
위기심이 절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난..................이란 생각이 또 날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이란 생각도 불경스럽게도 했습니다.
주님.
무조건 용서하라빌지도 못했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주님이 해결하여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기본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노력,
고생,
싸움...........
부담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주님.
깨달음이 있습니다.
'나'
아직도 진득히도 날 사로잡는
이 '나'에 대한 개념입니다.
사회가 그곳으로 몰려가며
저도 또 그리 '나'를 강화 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타인을 위해 나를 죽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게 '기본'인 줄 오늘 다시 깨달았습니다.
때가 되니 주님이 이리 말문을 열어주십니다.
저 노력으로 안되니
'성령'님.
당신의 그 특별한 '배려'로
저의 이 '나'를 쉽게 잊게 도우소서.
솔직히 저 혼자서는 되지 않으니
'타인',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남'을 위하여
나를 잊어 버리게 하소서.
자존심이 날 자극하지 못하게 만드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그게 기본이니 그렇게 하소서 .
그리고 간절히 더 욱 바랄 것은
'성령'을 더욱 깊이 사모하게 하시되
깊은 체험 허락하소서.
제 자식.
오늘 마지막 발표가 남았습니다.
기적 허락하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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