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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주는 살고(눅11:14-26) 본문

신약 QT

나는 죽고 주는 살고(눅11:14-26)

주하인 2012. 2. 23. 10:04

(눅11:14-26)

 

세상 흔들리고

내 마음 온통 어두워도

 

그래도

 

내 살아가는 지표는

십자가 만이

 되게 하소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 만 살아나셔

나로

주님의 영광

드러내게 하소서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일주일

휴가내고 다녀온 영성 훈련에서

조용하고 묵상 위주의 영성 훈련을 기대하며 갔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3일을 모토로 계속

몸 두기 어려울 정도의 대우 - 어떤 분들은 여기에 감동하신다 ^^;- 와

쉴틈없는 찬양과 강의로 진행이 되었던 바

실은 , 이제는 어떤 형태의 프로그램이든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가는 내내 깊은 감기가 들어서 인지

하루 종일 앉혀놓고 끌고 다니며 하는 그 프로그램은

'은혜'보다는 '고문' 인듯 - 실은 어떤 프로그램도 다 그랬을 듯.. -  힘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돌아오니

'기대'와는 달리 시간 만 흘려 보낸 듯한 아쉬움 탓인가

마음이 '멍~' 했다.

집에서 내내 잠만 잤다.

그리고는 난 좀 '우울' 해졌다.

마치 작년, 말씀에 의거 ,

아무 결단 없이 흐름 가운데 '3일 금식' 다녀온 후

머리 아프고 며칠 혼란했던 경험처럼

요번 도 그랬다.

 

아프고 멍하고 둔하고 ...........

은혜를 방해하는 '귀신'들의 장난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다녀온 후의 며칠 - 어제까지-은 실은 특별한 자극과 증상은 없었지만

많은 혼란의 시간이 맞았다.

기도도 하기 싫고

말도 하기 싫고

그냥 일상 생활하는데는 어려움 없었고.......

 

그래도 난 그랬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혼자 나름의 '묵상' - 비밀글-을 하기는 했지만

거의 묵상에 대하여서도 머리를 놓고 있었다.

하나님 .....께 죄송했지만

기도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 불신앙적인 행동에는

나 나름 한가지 생각이 있었다.

 나.

이처럼 부족하고 엉터리 같은 자이지만

말씀대로 날 사랑하시면 날 그냥두시지 않을 것이시란

막연한 기대 ....말이다.

솔직히 억지로 억지로 힘내서

다시 말씀 앞에서고 기도하고 '회복'하는 것이 빠를 것임은 알았지만

'왜 나에게' 이런 좌절이 있는 지 우선 알고 싶었다.

그리고 부모에게 용인받는 '뗑깡'을 부리고 싶은 사춘기 자녀의 마음이 있었을 지 모른다 ㅜ.ㅜ;;

 

그러다 난 내 속상함의 한가지 이유를 알았다.

' 나는 왜 .......' 였다.

나름 열심히,

정말 내 수준에 맞추어 참......열심히 신앙생활을 균형잡히게 해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내 깊은 문제점,

주님도 틀림없이 아시고 나도 아는 ......... 문제점은

왜 아직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귀신' ?

정말 하루에 한번 슬쩍 하고 들여다 보았지만

매일매일 말씀 가운데 공통되이 나오는 이야기가 '저것'이다.

설령 그 문제라도 주님은 쉽게 해결해주시지 않는가?

더군다나, 왜 내 자식들,

정말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인생목적이 될 만큼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큰 이유를 차지하는 '자식'들의 문제에서도

난 왜.......

더구나 깨닫고 회복되어 가는 과정에서 있음에도

왜 이리도 변화가 없다는 말인가.......였다.

더구나 이처럼 영성을 사모하여 다녀오기 까지 했지만

득보다는 이처럼 심히 '좌절'을 하기를 허락하시었던가?

  물론 '알고 있었다.'

어떤 것도 다 '선'이고

그 무엇도 주님의 예정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은 없음을..

이것은 오늘 말씀처럼 '하늘로 부터 오는 싸인'을 기다리는

믿음 약한 자의 그것일 것임도.......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내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시간에

내 약한 육신의 부분,

기대와 반하는 현상 들............은

'머리 속'의 생각과 현실이 다르지 않은가........하는

나름의 '불신'의 끝까지 오게 되었었다.

그게 바로 '사단'의 궤계는 아닐지........

'실족' 시킬...........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기다리며 가만히 머리 놓고 기대하고 있던 중

깨달음이 깊이 왔다.

난 '의식'하려 애쓴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다.

'어느 새 난 '내'가 다시 살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안들고

 내 생각대로 안되고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나.............나.....나......다.

  정말 말씀 대로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있었어야 하는 데

그게 없으니 이런 궁극의 벽에 막혔구나.

내 신앙생활의 문제 였구나......' 다.

 아니던가?

내 뜻대로 안되니, 난 속이 상했던 것이고

내 몸이 아프니 그 기회를 빌미로 앙탈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런 생각 만으로 변화가 가능할까?

나는 죽고 주님 만 살아나는 게

내 깨달음과 의지만으로 가능하면

무에

중들의 면벽과 다를 것인가?

그래서 가만히 그냥 있으려 했다.

 

 마침 어제 수요일.

전인치유 예배가 요새 참 은혜롭다 .

그래서 기왕에 수요예배를 빼먹던 것을

병원에서 드리고 간다.

전혀 아무 것도 하기 싫어 했던 마음에

어제 묵상 구절에 '기본을 회복함'이란 주제가

내 막힌 영혼에 각인되어있던 차다.

난.......

정말 여러 신앙적 신비체험은 잘 안되는 부족한 영성이지만

말씀을 통하여 '통합'하여 이해하는 능력은

달란트로 주신듯하다.

 나의 수요예배에 대한 느낌,

시기적으로 정확히 수요일인점,

말씀이 회복인 점,.. 은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채렸다.

 

 찬양은 여지없이 나의 마음을 누그러 뜨렸다.

가사 한구절 한구절이

내 가슴을 녹이는 듯했다.

돌아온 탕자........같은 드라마적 회개의 감동은 아니지만

가슴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위로처럼

하나하나 섬세히 날 기쁘게 하신다.

전혀 신파적이 아닐 가사에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이렇게 메말랐는데

내 이지랑 상관없는 눈물..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에게 느끼게 하심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난.. 다시 살아계신 주님을 느낀다.

 

  이어지시는 '목사님'의 설교.

'회개'

' 나를 부인하는 자의 아름다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임'에 대하여 절묘한 예화와 설교가 이어진다.

창세기의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 '에노스'의 이름 뜻이

'살아 있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고

그들이 구백년 넘게 살아 있었어도 결국은 '죽는다'..고 명쾌히 설교 하신다.

그러시면서 설교의 예화 중 당신이 미국 LA에 가셨을 때 사귀신 목사님의 간증을 드셨다.

 주일 설교 마친 후 목사 사모님의 설교에 대한 질타로 속이 상하신 그 분께서

낚시로 화를 달래려 가셔서는

풀리지 않는 화 때문에 

날카롭게 낚시를 휘젓다가 그만

'사람'을 낚아버렸다 .^^;

놀라서 돌아본 낚시 바늘 끝에 '한국에서 인종 편견'을 견디다 못해

그곳으로 재 이민 와 중국 집을 운영하던 '화교'의 코가 걸려 찢어졌음을 발견하고

급히 사과하고 병원 가자 하던 차,

그 화교의 말.......' 겨우 코인데요 . 뭘........' 이라는 말씀에

그 분의 한국인에 대한 고난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기 否認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얻어

그후 화날 때마다 자주 그 중국집을 방문해 교훈을 얻었다는 이야기시다.

 

그렇다.

그것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시다.

나.

아직도 어리게 '나......' 밖에 내 생각에 없었다 .

그토록 그것을 없애는 것이 '성화'임을 알고

그 과정을 인생에서 이루려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내 불편에 내가 성질을 내고

하나님에게 반항하였던 것이다.

 

다행이도 주님은 날 붙들어 주셨다.

주님은 날 '모으는 자'로서 서기를 바라시는 듯하다.

아직도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이 남아

내 것이외의 다른 이의 것,

다른 자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게다.

아직 날 사랑하시는 것이시다.

그래서 그냥 받아주시고

자연스레이 저리 말씀으로 깨닫고

깊은 회개의 눈물이 내 의도하지 않는 심령에서 솟아 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남들처럼 180도 회개하여 돌아서 일어나지는 못하지만

내 깊은 바닥을 이해하시고

인정하시고 여미어 주시는 하나님이 난 느껴진다.

그래서 그게 감동스럽다.

그리고는 말씀으로

또 날 두드리신다.

어제도 내 죽은 듯 메마른 심령에 '물기' 돌게 하신 하나님이

또 오늘도 이렇듯 말씀으로 인도하셔서

'모으기'를 기대하신다

내가 죽어 '주님' 위해 사는 삶을 기대하신다.

나는 죽고 주님의 원하심만 내 안에 남아

내 감정의 풍부하고 넉넉함을

말씀의 이루어짐과

말씀의 이루지 못해냄 만을

기뻐하고

아쉬워하고

감사하고

안타까워 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

쓰길 원하시는 듯 하다.

감사하다.

 

 

 

적용

 

1. 감사하자.

 . 주님은 살아계시다.

  어제도 그랬다.

  오늘도 그러시다.

. 깨달음 주셨다.

. 내 앙탈을 다 받아 주신다.

. 흐름을 깨달아 간다.

 

2.  나는 죽다.

 내가 죽는 것은 아주 고통 스럽다.

 자존심이 상해야 되고 찢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마져도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은 '주님'이 도우신다.

 지난 일주일, 깨닫는 시간이다.

 죄스럽고 속상한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또 깨닫게 하신다.

 주님은 자연스레이 나의 죽음을 인도하신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아나신다.

 내 안에 나의 뜻은 죽어가고

 주님의 뜻만 살아나길...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자.

 

3. 성경 세장 읽자.

 

4. 표지.

 기대하고 기도하되 모두 받아 들이자.

 어떤 결과도 주님이 다 하셨음을 인정하고 기쁘게 기다리자.

 열심히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들.............받아 들이자.

 표지보다 중요한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선하심을 인정함이 진정 귀중한 응답이다.

 그것을 얼마나 자연스레이 내가 인정하게 되었는가가 진정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신비적' 체험은 주시면 조금은 이 흔들림이 덜하지 않을까?

 

 

 

 

기도

 주님.

믿음의 길은 참.......험합니다.

어렵고 힘듭니다.

시간이 길어질 수록 바라는 내 욕심도 커지고

내 자아는 자꾸만 기승을 부리려 합니다.

주님의 뜻과 내 뜻,

주님이 원하심과 내 원함,

아직도 죽지 않는 나와 주님의 뜻 가운데 상치되는 부분이

절 많이도 힘들게 합니다.

주여.

알지만 하지못하는

이 의지 박약함의 괴로움을 아시는 주여.

그럴 때 일수록 더욱 응답의 폭과 강도를 넓히시어

나의 부족함을 막아주시거나

나를 더욱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의 기쁨이 너무도 감사해서

나의 자아가 빨리 빨리 죽어 나갔으면 합니다.

세상의 칭찬과

세상의 관심이 없어지고

오직 나 홀로 세상에 거하는 듯

외롭고 공허하는 듯하여도

그때,

더욱 더 커지는 하나님의 평강이

나 만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로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날 흔들 수 없을 것이란

이 깊은 기쁨이

자꾸만 커지고 커져

전혀 '의혹'이 날 흔들 여지 조차 주지 않을 때가 오길

진심으로 빕니다.

주여.

간절히 빌것은

그래도

제 자식들,

더욱 지키시고

제 바램과 실망,

조금은 더 달래 주소서.

저........주님 일 하기에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현실적으로 막히는 부분............

아시지요?

받아들이고 , 변화 시키시고..........

다 알아서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제 입에

더욱 큰 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쁨으로 채워지길 ...........

오늘 ........간절히 간절히 빕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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