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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계심을 아는 자의 감동(눅11:27-36)

주하인 2012. 2. 24. 18:11

(눅11:27-36)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이 고백이 혹시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가?

아니다.

감동이 수천년을 격하고 나에게 느껴진다.

'무리 ' 속의 '한 여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 무리 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느끼는 사람은 '그 여인' 하나 뿐이었다.

 

 나.

세상에 이름없는 자다.

누가 날 알아줄까?

솔직히 '알아 주길 바래서 소리 높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주길' '포기'하였다. ㅎ

연단 덕분일까?

나이탓인가?

아니다.

 내 속을 조용히 들여다 보면

무식하고 남들이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경탄하는 감성의 소리가

무리 중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그녀는 예수님을 감동한 자였다.

나도 그렇다.

이제 누가 안알아주어도 '하나님' 만으로 감동하여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슬그머니 .. 그렇다.

수일의 깊은 잔 수렁 을 디디고 일어섰지만

크게 죄스럽지도

크게 뜨겁지도 않다.

그러면서 '굉장히 바쁜' 오후의 한시간을 틈타

블로그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앉으니

예기치도 못했던

무리 속   여인의 소리가 괜히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여기 있다... 는 말씀이 아침에서 눈에 들어온다.

더 큰 이.......당연히도 예수님이시다.

그 분이 '내 곁에 계시다. '

세상 사람들은 인정핮든 안하든,

난,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있다.

나 뿐이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늘 하나님이 곁에서 소리를 내신다.

듣고 듣지 못함은

그의 영적 경건함 민감성과 외적 분주함의 결과로

차이가 날뿐이다. 

참 오랫동안..

주님이 '내 곁' 여기에 계셔서

저 여인의 감동을 지속적으로 주셨음에도

깨달아 매일 감동으로 살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노력과 크게 정직하게 비례하지는 않는

하나님의 '여기 있으신' 임재감이 느껴진다.

그리도 죄된 메마름 가운데서

그렇게도 뺀질하게 주님께 앙탈 부렸음 ㅜ.ㅜ;; 에도

주님은 이처럼 곁에 계셔서 

날 감동으로 모신다.

저 여인을 저렇게 감동으로 소리 치게 하신다.

 

무엇이신가?

왜 이런 어이없는 어리석은 자를 깨닫게 하시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시고

살아계셔서 동행하시는 것을 보이시는가?

 

나.

참으로 '자아'가 강하다.

아니........어쩌면 약하기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여왔다.

그러기에 '내.'''''' '내'.....' 나'........의 개념이 참 강했다.

약함이 강함임을

주님은 나의 평생토록 주시는 '레마' 이심에도

그 약함의 인생에 적용은 그렇듯 힘들었다.

참으로 아팠다.

아프다.

많이 부인했다고생각하면

벌써 어느샌가 더욱 강한 '나'...........

 

이제 주님은

그 분께 다 내려놓고 맡기고 흐르시기를 바라신다. .

그래서 잊어버릴 뻔 했던 ,

성령의 감동을

다시 한번 '예기치 못하게 ' 기억나게 하시고

그 처절한 감사의 느낌을 체험케 하신다.

강한 '부정' 사이를 뚫고

소롯이

영향 받지 않는 단정함,

차분한 기쁨

기쁨을 뚫고 가슴의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

그리고 '평화'의 개념이

날 ........고향에 온듯 지속적인 평안으로 잡아 가신다.

 

오늘,

늦게 다시 들여다보는 말씀 구절에서

주님은 '무리속 '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입술을 통하여

믿는 자, 동행 하는 자

그 중에서도 선택을 하는 , 선택받은 소수의 감동을 공유케 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살아계신 하나님.

성령님의 운행하심.

그렇다.

걱정할 게 무엇인가?

난... 이제 부터..

다시 마음을 정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 만으로 '감정'을 써야 한다.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을 기뻐하고

궁핍을 기뻐하고

타인을 긍휼히 하게 됨을 감사하고

겸손함이 내 모든 관심의 촛점이 되어야 한다.

...........

 

 

 

주님.

늦은 시간 하기오스 찬양대 참여  몇 십분 안남겨 놓고

이리도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

제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그리 인도하시니 그리 인도 받겠습니다.

내 감동과 동일한 감동으로

무리에서 소리지르는 여인의 그 심정과 동일하게

내 자리에서 손들어 찬양하리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들어나지 않게 하시되

그것을 슬퍼 못하게 하시고

약해지되 감사하게 하소서.

주여.

비교될 수록 감사하게 하소서.

아무렇지 않아짐이 진정 강해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내 감정 에너지 모두를

내 자아의 만족에서 관심 떼어 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음에 쓰이게 하소서.

주여.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온통 죽어나가게 하소서.

주님이 제 곁에 계신다면

어떻게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덜 두렵습니다.

주님.

인도하심 믿사오니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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