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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 민20:14-29 )

주하인 2011. 5. 11. 13:43

제 20 장 ( Chapter 20, Numbers )  

  

주님

제게

 생명수를 부으소서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이 내 삶 다하여

주님 영광 드러내는

붉은 꽃 피워 내리다 

 

 

 

14.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의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기독교인은 이래야 한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자는 이렇게 된다.

 

 에돔왕.

대적.

불신자.

그들에게도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도 주님을 알아야 하는 것을

마음 속에 확신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 일을 분리 시키는 것.

이원론 적사고다.

 당연히도 삶과 영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일원론이 당연하다.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 될 것인가?

어찌 살아가는 현장에서는 주님이 안계신다는 말이던가?

이런.. 미련한 이원론 같으니라고....ㅎ

 

모세님을 보라.

'당신도 아시거니와' 했다.

당연하다는 투 아닌가?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주님을 부인하고

    
  
20.  그는 가로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 

타 종교와의 타협을 외치고 

마치 그것이 '깨이고 화합하는 자' 같은 유혹을 하고

그것이 옳은 태도인 줄 떠들어도...

자기 아버지가 없고

남들의 아버지도 내 아버지 일수 있다고 떠드는

'미친' 짓이다. 

죄송하고 강한 표현이지만

사실이지 않는가?

 천주교를 넘어서 개신교 협의 회 일부가

'부처 온 날에' 묘한 화합의 메시지를 보냈음을 신문에서 봤다.

끝까지 온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강한 손으로 막아서니

그러는 건가?

그게 강한 손인가?

진짜로 강한 손인가?

 마음이 흐려져

'밥이 거인으로 보이고  

스스로 메뚜기로 보임은 아닌가?'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

날로 날로 힘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게 '때'가 가까움의 징조 아니던가?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가라사대 
  모세에게

아론과 함께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아론의 옷을 벗겨라.

그는 죽을 것이다' 
아들에게 입히라....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 또 한번 힘들다고 소리가 나오게 하신다.

주님을 믿으면 매사에 축복만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 저런 저항과

이런 어려움이 있는지..

가끔은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다.

 

 외로운데 더 외롭게 한다.

세상으로 인한 외로움은

그들의 주님을 모름으로 치부한 다 해도

어찌 동역자인 사람 마져 이렇게..

 외로움에 외로움이 더해지는 듯하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가끔은 이런 혼란과 외로움으로 점철 되기도 한다.

자꾸 나만 혼자 도태되는 듯하기도 하다.

이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그들은 무리를 짓고

무리 속에서 세속화되어 간다.

 

알곡을 선정하시는 과정.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산에 오르니라 
  그래도 모세님은 주님의 명을 좇았다.

많은 생각이 교차 했으리라.

만감이 교차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을까?

그 없으면 그 세월을 어찌 보냈을까?

이제 아들로 새 피를 수혈했다지만

그가 어찌 모세의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겠는가?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주님의 하신 일이면 다 뜻이 있으실 것을...

그게 우리의 죄의 문제이든..

가장 선한 이유임에야..
  
 

 

 다른 사람도 그런가?

난  헷갈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니..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옳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옳은가?

계획을 세우고 주님께 요구하고 나서는 것이 옳은가?

'내려놓음' 이 맞는가?

내려 놓음이란 어디까지인가?

책임회피와 내려 놓음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그 구분을 위하여 더욱 철저히 기도하고 묵상하고 금식하고 ... 해야 함에도

가끔 부딪쳐 오는 인생의 문제들에 시달리다 보면

또 하루하루 .... 늦어지고 잊어진다.

이 문제 뿐이던가

아주 다양한 이유에서 주님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것의 빠름과 효율성과

그 후의 회개가 옳은지

무식하게 율법적으로 함이 옳은 것인지........이것 마져 헷갈리는 부분이 아니던가?

어디까지가 당당한 기독교인이고

어디까지가 '지혜로운 뱀' 같은 처신인지 구분이 힘든다.

.........

.........

 

 

 그러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마져도 '하나님의 뜻 ' 가운데서 익어가기 위한

허락된 흔들림 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며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으로 인한 흔들림 보다는

에너지를 분산시키면서 사는 듯하지만

세상의 것 만을 신경쓰는 불신자 들보다

세상의 것과 그 분의 뜻을 생각하는 것의 두배 이상의 에너지 소모가 되는 듯한

이 느린 듯하고 손해 보는 듯하고 어려운듯한 삶의 행태가

실은 돌아보면 훨씬 더 여유롭고 은혜롭고 빠르며 튼실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며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는 헛된 것이 없으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가장 선한 것임'을

감탄 하에 고백하듯 기도할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어느 때는 그러함에도 스치는 외로움이 있다.

나만 홀로... 라는 개념이 힘들게 할 때도 있다.

모세님의 리더로서 겪는 곤란과 더불어

그 분의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이 읽혀지는

요 며칠이다.

그게 다르다.

살아가는 것은 리더나 평범한 자나 다 똑같은 모양이다.

교회안의 장로님이나

장로님이 되지 못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신앙인이나

어제 대화를 나눈 돈 많으신 초보 신앙인 의사나

돈 없는 나이 많이들고 시간 지난 나 같은 자나

수천년 전의 사람이나

지금의 우리나

겪을 수 있는 근본적인 흔들림은 비슷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다행인 것은

이제는 흔들릴 때도 폭이 덜하다.

마음은 아프지만 아픈 가운데서도 아련한 뿌듯함이 있다.

힘들 때도 기대되는 바가 있다.

죽어도 부활의 기대가 있다.

이 짧은 인생의 폭풍우가 날 흔들어도

막연히 기대되는 그 후가 있다.

30일을 애곡한 그 아픔 속에서도

형을 잃고 의지하던 한팔을 잃는 그 허전함이 있어도

그는 그래도 당당함,

아니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음은

그러한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자의 공통점이 있으셔서 그렇다.

 

 그것을 난 느낀다.

그게 다행이다.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당당한 과정이다.

힘들지만 축복임을 의미한다.

그게 감사하다.

소롯이 솟아나는 내 안의 소망의 기쁨이 감사하다.

 

 

 

적용

 

1.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하자.

 

2. 일상에서 당당하게 주님의 이름을 언급하자.

 최소한 난 이 면에서는 일치한 신앙적 삶을 살고 있다.

 수술 전 기도해주고 수술한다.

 믿지 않는 자들 까지 끌어잡아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불신의 그들 입에서도 내 당당함에 '아멘'한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그런 자랑스러워함이 평생에 최근 뿐이다.

 난 회복되어가는 하나님 안에서의 나를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느낀다.

 그래서 그게 좋다.

  자식들에게도 물려줄 것이

 그것 뿐임을 '아주 당당히 선언한다. '

  다행이도 아이들... 믿음이 신실하다.

 흔들려도 깊다.

  주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

 

3.  외로움... 고독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 마져도 받아 들이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생이 다가와가는 면에서 오히려 '그 허전함'을 기뻐하자.

 이제 얼마 안있으면 주님 만나뵐 것 아닌가?

 한참을 지나면 그 마져 나에게 선이 었음을 다시 발견하게 될 거 아닌가?
  주님의 뜻 아닌 것이 하나도 있던가?

 

4. 종교 다원화의 이 사회를 불쌍히 여기자.

 주님 얼마나 한탄 하실 것인 가를 생각하자.

 흔들리지 말자.

 그들은 불쌍히 여기되 질타는 말자.

 

5. 성경 세장 읽자.

 

 

기도

 

주님 .

위대하신 주님.

온 우주를 만드시고

영원의 시간을 만드신 주님.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행복뿐입니다.

어떤 일에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만 하면

축복으로 옴을 압니다.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을 주소서.

불신자들에게도 당연한 하나님을 당연히 전도하게 하소서.

일생의 삶 속에서 그리하게 하소서.

굳이 찾아가도 좋지만

접점이 되는 분들에게 모세님이 그러셨듯

당연히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모르고 있느냐는 듯

하나님의 논리를 주장하게 하소서.

그들이 반발하여도 당당하게는 하시오되

말의 어투,

겸손한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실과 진리를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주여.

저 그러는 동안,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살다가 다가오는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들...

특별히 나이들며 찾아오는

주위에서 많이 바라뵈는 '외로움'과 '고독',

그 죽음의 흔적에 그리 당황하지 않게 하소서.

혹여, 모세님이 아론을 졸지에 잃듯

그런 어려움이 다가와도

결코 주님을 의지함에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슬퍼할 때는 슬퍼하는 왜곡되지 않은 감정의 흐름은 허락하시되

그것으로 인한 감상 ( 感傷) 은 생기지 않도록 붙잡으소서.

이 부디 상처 많은 영혼을 치유시키시사

주님의 종 모세님에게 그러하셨듯

모든 세상의 이치와 헛된 판단,

그럴듯한 통념들을 깨뜨리는

기적의 인물이 되게 하소서.

그게 '기독교인으로서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게 하소서.

저...

주님을 앎이

주님이 저로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허락하심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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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방 Y간호사 결혼 식장서 찍은 장미입니다.
열심히 주님 섬기는 자매와 형제의 결혼이라인지
그곳에 꽂혀 있던 한떨기 장미가 어찌 그리도 더 붉던지요?

산다는 것.
참 굴곡이 많음을 이 나이되니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함에도 점점 감사함이 넘치게 됨은
그 모두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됨입니다.

 의미.
인생을 살면서 '의미'없이 살다가 죽어감은
참으로 미물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가운데 '자신'이 하고 픈거 하다가 육신이 늙어 더 감각이 힘을 발휘 하지 못할 때
어떤 아름다움, 맛있음, 유혹이 유혹이 되겠고
누구의 칭찬
얼마만큼의 세상의 이룸이 더이상 의미가 생기겠습니까?

모세가  저런 불신 자 나라 에돔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당연히도 외칩니다.
당연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외침을 외치지 못함이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허약해지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뜻 가운데
삶속에서의 영성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결혼 식의 붉은 장미가 더욱 붉게 보임은
그 들 믿는 부부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 탓이려 느껴졌습니다.

장미 한송이는 '우리'
그 컵에 담긴 물은 ' 주님의 생명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모두 열심히 예수님 믿읍시다.
그리고 참 평안을 같이 누렸으면 합니다.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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