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러므로 생각해야할 것[엡2:11-22] 본문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라 신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신다.
그러므로.. 가 왜 그러므로인가?
무엇을 내가 잊고 있었던가?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당연히 해야 하는데 ' 그러지 못했던 것..
그러나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고
당연히 기억해야 하는 것인 '필수불가결'한 것이기에
그러므로..라 하신 것이다.
그 필수불가결한, 잊고 살기에 어쩌면 배은망덕한 나일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라'
그러므로 생각해볼 것.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해보아야 만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뒤에 계속나온다.
그때에는 육체로는 이방인이고
영적 할례자들에게 무시를 받아 마땅할 어이없는 존재였었다는 것이다.
불신자.
불신 자 중에서도 별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조차 없었던.. .
그때의 나.
돌아보면 자만감 덩어리, 포악덩어리 , 분노덩어리,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싶은
홀로 옳은 자....................가 맞는 것 같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할 꽁~꽁 자기 생각에 묶였던 자.
그냥 두면 홀로 몸부림 치고 이리 뒤틀 저리 뒤틀
뒹굴뒹굴 구르다가
온몸에, 온영혼에 상채기가 넘치고 남아
결국 그 움직임 마져 지쳐서 포기하고
축늘어져 지옥에 스러져 가버릴 수 밖에 없었던,
아니면 그 전에 뇌혈관 터져서 먼저 가버리던가...
세상의 유혹적인 것이란 것은 모두 섭렵하면서
자기 만족에 전횡을 휘두르다가
마침내 육신의 힘이 떨어지면
속절 없이 힘없는 골방 노인으로 쭈구려 앉아
세상을 온통 어두움으로 만 보고
시간만 때우면서 죽어갈 수 밖에 없는...
그게.. 내 과거의 모습의 미래였을 것이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 때에'
그때에 .. 그 불신의 암울한 시대에
그 생각하기 싫은 시간은 '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외인이 맞았다.
소망도 없엇고
하나님도 없음이 사실이다.
그것..
지금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고
지금도 외인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고
함부로 하는 자들이 불쌍하기 한량이 없고
답답하고 안타깝지,
그때에 그시절에는 전혀 그런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
그 안타까운 나....를 다시 기억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안타까운 나에서 행운의 나... 행복의 나로 바꾸어주시고
외인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약속, 비전이 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던 나에서 약속의 자녀로,
소망이 없던 어두움에서 소망으로 넘치는 나로 바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몸바쳐
날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탓이 아니시던가?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생각해보라.. 심은
그 당시의 그 처연한 상태를 기억해보라 하심이고
그 나에서
이제 약속의 자녀로
소망의 나.. .
천국 백성의 자격의 나..
매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회를 가진 나..
어이없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말씀 한마디로 소망이 넘치는 나.. 로 바뀌게 됨은
오직..
예수님의 날 피흘리고 살을 찢김을 각오하실 만큼
날 사랑하신
십자가 사랑 탓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난..
예수 보혈의 피로 거듭난 자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매일을 사는 자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는 자다.
온전한 화합으로
세상과 온 우주를 아우르는
그 큰 힘에 접속될 기회를 매일매일 가진 자다.
감사하다.
어제.
수요일.
전인치유 예배 시간인 오후 06:30 이 다되어서야 불현듯 깨닫고
지하 샘누리홀로 향했다.
솔직히 쓸 것 많고
정리할 여행기 있어 정신이 인터넷에 팔려 있었고
전인치유 찬양의 리더자들이 '영.. ' 이었어서
이전의 그 은혜를 기대하기 힘들어서
수요일 마다 영적 도전을 받는 상태이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 않던가?
다시금 하나님의 그 힘에 접속.. .그리고 주신 은혜...
회복..
이제 다시 작은 타협으로 메말라질까 두려워 얼른 손을 끊고 내려갔다.
역시나, 찬양은..
이럴 때 난.. 마음이 뒤죽박죽이다.
감성이 예민해서인가?
귀만 발달해서 인가?
이 수준에 대한 욕구는 '심리적 문제'이지 '영적 문제'는 아님을 구분해야 했다.
기도햇다.
'주님.
제 귀를 가리우시고
저들의 입술과 목소리를 주장하시고
이곳에 계신 분들이 하나가 되게 하시어
하나님 홀로 영광 받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얼마전 유사한 수준의 교회 오후 찬양예배에서 깨달은 후
그 기도로 그들의 찬양과 상관없는 은혜를 회복한 바..
또 기도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잠시의 내 속에서 들끓는 비평의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행진곡 같은 그들의 찬양이 '은혜'로운 고백으로 바뀌는 듯하다.
어느때보다 깊은 은혜 가운데
난 예배를 마칠 수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 '예배'드리는 것임을
늘 정직하다고 자부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소리 안한다고 헛된 자부로 살아온 나에게
'정말 예배가 그리 좋더냐?
그것.. 오버 아니냐?
목숨 걸고 진실을 얘기할 수 있느냐?" 고 물어도
전혀 지체없이 '당연하지'라 말할 수 있는 상태로
난 내 기분이 날아갈 듯해짐을 느꼈다.
사도행전의 '보좌로 부터 내려오는 통쾌함'에 대한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당연히도 든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난. .. 이 너무도 당연하듯 얻어지는 '소망'이 기초가 된
이 놀라운 기쁨의 현상들이
왜 생겼는지 자주 잊어 버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내 기도 탓에 이 기쁨이 오는 것 아닌가.. '라는 착각이다.
기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주체가 나고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히 주어지는... 그런 오류.
아니다.
하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래서 그런 기초가 '쉽게 ' 나에게 되도록 마련해주심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깊이 감사해야 한다.
또,
나..
그토록 강한,
도저히 이론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했고
수많은 비판의 논거들을 가지고
내 감상에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의 기를 죽이는 논문을 수편 써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생각이 많은 내가
이처럼 예배하면 주시는 놀라운 은혜라는...
단순한 기쁨이
어떠한 거부할 논리적 근거도 생각나지 못하게 하는 자로 바뀌고
단순한 소망이 밀물듯이 밀려오는 자로 바뀌었는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전혀 다른 두 세계의 나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뀔 수 있는지... .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말씀은
'그때에'와 '이제는'으로 표현하신다.
얼마나 내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절묘히도 드러내 주시는지..
말씀은 성령이 타고 오시는 길이시다.
그래서 어느새 말씀은 하나님이 되신다.
그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매일 드러내 보이신다.
그게 '그리스도 십자가' 때문에 생긴 자격이다.
내가 할일은 감사할 일 뿐이다.
너무도 감사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이 나에게
아니 이 온 인류에게 행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어찌 나는..
어찌 세상은 그리도 쉽게 잊는지요?
세상을 지배하는 영적 세력들에 의하여 매일 공격을 받기에 그러함을
잘 알기에 이제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머리를 들이 밀었습니다.
주님은 여지없이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제 속을 울립니다.
어찌 그게 가능한지요?
생각하라 하셔서 생각하려는 이 작은 머리를
성령께서 운행하시며 막힘없이 생각을 정리하십니다.
그때에 그렇듯 어리석고 죽을 듯 답답하던 나..
동일한 오늘의 상황에서는
수도 없이 한숨만을 내쉬며 혈압을 올리고 두통과 담배의 답답함과... 버거움으로 죽을 수 밖에 없던 자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이제는 오히려 잠잠함과 기쁨으로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게 놀랍습니다.
그것을 다시 반추하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시 마주하게 되나이다.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그러므로
생각하게 되게 하시니
그것이 감사합니다.
내 주여.
내 주변의 소리들이 들립니다.
내 자식들의 어려움도 봅니다.
주님이 다스리소서.
아이들.. 주님을 놓치지 않고 있사오니
그들에게도 소망으로 다시 붙드실 줄 믿고
이 비밀을 그들도 나누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습니다.
제 작은 반경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주님 변명하고 있사오나
주님이 때가 되어
제 안에 큰 바윗돌을 완전히 치우시는 날..
주님의 뜻에 맞추어
세상의 이전의 '나' 같은 그들에게
'이제는' 외인이 아님을
두손들어 고백하고 눈물흘리며 감사하는
그런 도구가 될 날이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
감사하오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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