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들의 잘못 (민13:21-33) 본문
제 13 장 ( Chapter 13, Numbers )
혼자 있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
홀로 있지 않았음을
이제는 압니다
이제 더이상
그런
그들의 잘못이
제 것이 아니길 원합니다
제 곁과
제 안에 계시고
제 위에도 계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언제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니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
'사실'을 누렸다.
25.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그것도 ' 충분히 ...'
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리고 그 누림이 사실임을
그들도 알고 모세도 알게 되었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심히 큰 것'.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문제는 여기 부터다.
'갈렙'은 '긍정적' 이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 이었다.
동일한 '사실'을 가지고 다른 '반응'이다.
그것은 다양한 '주관적'인 감정이 끼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이 잘못일까?
33절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스스로를 메뚜기'로 표현한 지독한 '열등감' .
낮은 자존감.
이것을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일까?
감정을 함부로 할 수 있던가?
태어날 때 부터 특성이거나
성장과정에서의 문제로 '상처' 깊어 생긴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가?
절대 다수 중 극 소수만이 '갈렙' 같은 용사로 키워지는 데
그 성장과정의 본인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이 뭐라시던가?
인간.. 그 원죄의 소산으로 인한 결점덩어리임을
주님이 아시는 데
아시면서 그리 '진노'하시는가?
이 구절 오면서
늘 ' 열등감 전문가' 주모는 ^^;
혼란을 겪으며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면서 ..
어쩌면 저렇게 '스스로를 메뚜기'라 표현하는 게
내 심사를 잘 표현하는가 하기도 한다.
그리고 앎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매일 부닥치는 그런 안타까움을
내가 저들과 같음을 잊고 지내기도 한다.
또한, 아는 내가 '믿음'과 기도를 함에도 불구하고
처절히 자신이 메뚜기 같음을 다시 또 느끼고 지나는
이 어쩔 수 없는 심리적 폭풍우에
좌절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게 ..
비단 '나 ' 뿐일까?
누구 하나 '온전하게 ' 자신이 옳고 하나님 시키면 백프로 다 순종할 사람이 있던가?
열등감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들은 '과대 망상 증'이 심하거나
혹은 종말의 세상을 구할
'선지자' 나 '성...누구' 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른자 아닐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부분에서 느끼는 영적 괴리감을
사람들은 어찌 해결할까?
눈치 못채고 지날까?
혹시 마음이 무겁지만 하나님의 뜻이겠지 .. 하면서 슬그머니 지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 그들의 신앙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의 '속'을 모르시는 분일까?
혹시 그러한 많은 분들의 갈등처리를 사단이 기뻐 물고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힘없는 신앙.
하나님이 두려워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겉으로 보기에 남들은 다 갈렙같고,
갈렙으로 살으라는 목회자님 들의 선언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함이 두려워
더 딱딱히 자기 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 앉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니던가?
그래서 '자유' 보다는 '율법'의 갑옷으로
자신을 똘똘 묶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지 않던가?
예수님은 세상에 자유를 주러 오셨다 하셨는데...
성령은 묶인 자를 풀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멍에를 풀고.. 하시는데
어찌 자신은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더불어
주님을 공포스러운 분으로 오인하고
지금도 힘들은 열등감 위에
더 무거운 무게를 더해 묶어 버리는가?
진짜로 ,그게 '믿음'의 결과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이던가?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문제에 어떤 것을 빠드리고 있는가?
신앙으로 치부하여 그냥 가장하고 묶여 버리는 것이 옳은가?
혹은 어렵고 두렵고 힘들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에 직면하는 것이 옳던가?
'자존감'이 낮음.
열등감... 은 분명코 해결해야할 영적 질환이 맞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메뚜기'로 행세케 하는 것도 맞다.
자신의 능력을 깎아 먹어 온 손발을 묶어 버리는
무서운 사단의 궤계임도 맞다.
코끼리 사육할 때 어려서 부터 가는 줄로 묶어 키우다가
점차로 줄을 굵게 하여 묶어두면
도저히 코끼리가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하게 된다 한다.
그리되면 커서도 가는 실 같은 것으로 묶어 두어도 도망을 못간다 한다.
새끼 세퍼트가 성견 치와와와 함께 자라면
커서도 치와와의 눈치를 살피며 대적 못하는 경우도 있다한다.
모든 이유는 ' 낮은 자존감'이다.
그게 묶어서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
이만큼 열등감은 모든 에너지를 깎아 자포자기 하게 만든다.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뚜기'로 자신을 인식하지 않던가?
하지만, 코끼리를 질타하고 혼내실 것인가?
두려워 하는 세퍼드를 때릴 것인가?
그것들은 '불쌍하지' 혼낼 상태가 아니지 않던가?
고쳐야지 저주할 대상은 아니지 않던가?
이 이스라엘 메뚜기들은 그런데 왜 혼나는가?
여기서 다시 한번 묵상을 돌아본다.
그들은 ' 리더 급'이다.
어제 분명히 그들을 '두령'이라 하셨다.
그렇게 그들을 각지파 중에서 뽑은 자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적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 '아는 자'들이란 이야기다.
그들도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불가항력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아니란 이야기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그들은 기도와 말씀으로 이겨낼 훈련이 되어 있는
잘 성장된 리더급들이다.
하나님은 '성장 상태'에 따라 대우가 다르시다.
또, 사십일 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보내졌던 자기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달리 다른 방향의 고민,
즉 두렵고 힘든게 정상적인 방향이 아님을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깨달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
더구나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그들의 입으로도 동일하게 고백하지 않던가?
더욱 문제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공연히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 자들이 아닌 두령들이...
그것은 어떠한 이유이던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
그들이 잘못된 적극적인 '행동'을 했음이다.
감정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개인적 문제로 끝내야 함에도
그들은 그것을 행동으로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문제는 낮은 자존감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메뚜기로 느끼는 자신이 잘못된 것을 생각하지도 않은 무지다.
거기에 그것을 '단체'나 군중의 힘을 빌어
무비판 적으로 소리를 크게 내는 '악한 행위'다.
자성을 했고 자숙을 했어야 한다.
기도하고 자제 했어야 할 것이 '리더'의 몫이다.
나.
어떤 위치인가?
리더급..?
누구도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충분한 시간을 거쳐 익어온 자로 인식된다.
시간은?
사십일이란 기간이 지났을까?
자존감을 건드리는,
과거의 상처를 타고 오는 거인 같은 존재들에 대하여
충분히 묵상하고 기도할 시간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 안에서 '어린 영혼'을 보듬어 주시던
그 꿀같고 단, 가나안의 사랑을 받은 사십일이 시간은 아니던가?
맞다.
그 전인적 치유의 시간을 통하여
난 분명코 많은 얻음을 얻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깨닫고
그 분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으며
말씀으로 매일 매일 양육을 받는
철저한 개인 교습 같은 '보호의 양육기간'인
영적 사십일을 보낸게 맞다.
그런데 난 지금 어떤가?
갈렙같은 완전한 용사로 거듭났는가?
솔직히.. 아니다.
아직도 횟수는 줄었지만
자주자주 내가 메뚜기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그렇다.
외적 조건은 안그렇다.
의사고
키크고
남자고
적당히 나이가 들어 세상을 경험한 자다.
..
누가 보아도 그렇지 않지만 그렇다.
그들 이스라엘 리더들도 그렇지 않지만 그렇지 않던가?
그렇다면 오늘 내가 겪어내야할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려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이신가?
레마가 무엇인가?
우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리더들도 그랬다.
그들도 열등감은 있었다.
그 감정은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한번 내려 놓자.
또, 지난 세월 날 지키시고 보호하신 가나안 사십일을 감사하자.
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분, 내 아버지 하나님은 날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 주셨다.
잘못된 감성도 웃음으로 인도하시고
꿀같이 마시게 하시고
포도 같이 먹게 하셨다.
일생을 책임지셨다.
간증거리로 ......
이제가 문제다.
'날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런 나를 솔직히 스스로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나 , 메뚜기처럼 느껴진다.
그게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자제해야 한다.
타인 앞에서 함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할 말은
자제해야 한다.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갈렙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한다.
그 분은 내가 나가야 할 모본이다.
세상의 뛰어난 신앙인들...
'안수현 의사', P원장님.....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없지 않는 결점이야 있겠지만..( 키가 적다?ㅎㅎ )..
하나님 앞에서의 그 당당함과 행동하는 순종은 본받아야 한다.
갈렙의 '열등감'없음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날 돌아다 보는 계기다.
그리고 더욱 긍정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난, 내가 영적 두령에 속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더욱 Professional identity를 길러야 한다.
내 속은 그래도
대중 앞에서는 난 갈렙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도우시기에 가능하다.
말씀이 있으시기에 가능하다.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원하시는 게.. 이제는.. 그러기에 가능하다.
그게 내 논리가 되어야 한다.
오늘은 조금더 힘을 내 보리라.
적용
1. CPE 그룹 이해한다.
최소한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는다.
이제 P. I로 대한다.
자제한다.
2. 열등감.
메뚜기?
묵상한다.
말씀을 가지고 매일을 산다.
더욱 더욱 그래야 한다.
3. 나의 정체를 다시한번 생각한다.
영적 두령이다.
사십일을 쉬게 하심을 받은 자다.
나를 보고 있는 지파들이 있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내 결점을 보고 혼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열등감과 그로 인한 세상의 좌절이나 스스로의 혼란은
주님 앞에 가져오면 된다.
주님은 그것을 불쌍히 여기시지
혼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 결점을 빌미로 아닌체 하며 만들어내는
가식적 행동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순종 안하려는
내 엉터리 심사를 뭐라 하시는 것이시다.
보라.
말씀을 통하여 매일매일 깨닫게 하시지 않는가?
주님은 자유시다.
5.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님.
매일 매일 부닥치는 내 삶의 문제에서
메뚜기 같은 내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메뚜기가 아님에도 메뚜기로 느끼는
이 오래된 결함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주님.
코끼리가 실을 끊지 못하듯
저도 끊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주님.
그러함에도 말씀으로 매일매일 깨닫게 하시고 힘을 주시니
이제 자꾸 힘이 들어감을 느낍니다.
주여.
때가 언제가 될지 몰라도
더욱 힘을 주소서.
빨리 회복되게 하소서.
주님.
입을 조심하게 하시고
특별히 내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하소서.
그래서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하시사
주님 영광가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갈렙 같은 훌륭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도우소서.
주님의 능력이시면 가능치 못할 것이 없음을 압니다.
주님. ..
지금은 그 마져 안될 것 같은,
나 같은 자가 어찌.. 하는 생각이 있지만
그마져도 깨어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주님이 제 안에 거하시면
전 가능합니다.
말씀이 계시기에 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 자식들도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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