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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는 것은 쉐도우 댄싱이 아니었다(고전9:19-2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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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는 것은 쉐도우 댄싱이 아니었다(고전9:19-27)

주하인 2008. 7. 17. 10:24

 

 비록

지금 눈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이 개망초를 흔드는 존재는

분명코

바람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흔들리는 저 꽃을 보고서도 

아주 쉽게

알 수가 있다.

 

 복음이,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돌아가심이,

성령의 운행이,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함이라고

아무리 비웃어도

그 분은

온 우주에 가득하신

실재시다.

 

 이

엉터리 같은

불신의 세대들아 ~~!!

특별히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들아 ............    !!

 

 

아.....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

자신의 권리를 제한하고

남들에게 낮출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는

주권적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한 주권적인 선택을 할 힘이 있는 자유야 말로

진짜 자유다.

 외부와의 타협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어려운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원망, 속상함 등이다.

그러한 부대낌을 물리치고

남과 타협하고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것은

에너지를 더 필요로 한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놀라운 변화가 없이는

끝까지 유지하기 어렵다.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누구의 말대로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나.

약한 자들에게 약한 것은 이해하하나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은

배알이 없는 이중적인 사람으로 보여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성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목적이 뚜렷하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여러 모양으로 변하는 모습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속에서 올라올

자괴감

배알이 뒤틀림

속상함 등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오직

단지 몇 사람이라도

그의 모습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동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처럼 할 수 없는 것은

내 속에서 부대낌이 우선이다.

전기하여온 것 처럼..

또한

어디까지 어떤 모습으로 유지하여야 하는 가 하는 것이다.

분명코

이러한 배알 없는 듯한 모습을 보고

많은 제재와 비난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어제의 묵상 구절에서

힐문하는 자에게 답변할

확고 부동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나와있다.

그래 정말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그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했다.

그 복음을 위하여 행한다는

지상과제도

어떤 때는 영웅심리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어느 순간에

주저 앉는다.

나다.

내가 그렇다.

가끔 다가오는 이러한 혼란이

아직은 머리 속에서 도는

믿음의 연약함 탓이리라.

 그러기에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과의 온전하고 개별적인 만남이야 말로

세상의 어떠한 흔들림에도 흔들리지 않을

온전한 믿음을 허락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

 

 가끔

복잡한 심사를 가지고

기도원을 가거나

교회에 갈때

마치 오랜 방황 끝에 찾아든

본향에서 귀한 위로를 받는 듯

마음이 일순간에 녹아나는 듯할 때가 많았다.

그 평강의 기쁨 탓에

난 지금껏

주님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흔들어 댈 수 없는

엄청난 가슴의 뜨거움을 가진 자다.

그가 다메섹 도상의 눈꺼풀 사건이후

3년간의 주님과의 온전한 동거 후

완전 탈태 환골하여

그의 영혼은

살아계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자가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변하고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기적이다.

이 기적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변할 수 없는 증거다.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달음질 하는 목표.

 격투기 하는 상대.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하는 장면이 눈에 스쳐 지나간다.

연기를 마치 사람인양

손을 휘드르고 협객이 된양 착각하는

어린 아이의 공상이 생각난다.

이런 장난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진다.

날씨가 어둑해지고

그 놀던 공터에

어머니께서 '얘 밥먹어라'하는 소리에

지금껏 해오던 행동을 멈추고

얼른 집으로 들어간다.

그의 머리속에 그리도 환상을 그리던

그 수많은 멋있던 장면은

연기가 사라지듯

또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 빈 공터에

어둠이 짓게 깔리고

공허한 침묵만이 내려 앉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하는 행동이

그 아이들의 상상속의 영웅 흉내가 아님을

확실히 하고 있다.

 권투 선수 들이 혼자 쉐도우 댄싱하는 것 처럼

아무 고통없는 상상의 상대를 가지고 하는

운동이 아니고

실전 임을 그는 아는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다.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래서 복음에 참예하고 자 하는 목표는

절대로 쉐도우댄싱이 아니다.  

그 분이

그토록 자신을 배알없는 사람처럼

몸을 내치는 것이

잘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시적 자기 망상적 영웅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그는

자신의 몸을 쳤다.

그 자신도 

그 행동이 속은 상하고 당황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복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이고

자신의 선택이 옳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복종이다.

예수님의

그 엄청난 사랑앞에

자신의 별거 아닌 듯 낮아 보이는 행동의 겸허한 두려움이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기 까지 했다.

 

 부럽다.   

특별히

주님의 살아계심을 늘 알고

깨닫고 사랑하는 자로써

그 분의 대 명제를 알면서도

나는 '저처럼 대단한 자'가 아닐 거야

나는 끝까지 유지할 자신이 없어.. 라는 등

수없는 부정의 언사로

내 자신의 근육의 힘을 뽑고

틈만 나면 자기 연민에

빠져들어가는 내가 속상하다.

 

 

 

적용

 

1. 난 자유자다.

 그 사실을 확실 히 인식한다 .

 

2. 난 그래서 주권적으로 선택할 자격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특별히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한도에서

 

3. 그러나, 내 행동의 원칙은

 주님을 인식함이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괜찮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4. 배알이 꼴리는 일이 발생해도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라 하는 생각을 가슴깊이 가진다.

 참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5. 복음에 참예하게 됨을 감사한다.

 내 하는 일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주소서. . 주여.

 

 

6 . 성경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내 흔들리는 마음에 깨달음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안에서

난 자유자입니다.

단지 쉐도우 댄싱을 하다가 말

아니면 빈 공터에서 연기를 향해 발차기를 할

개구쟁이의 모습이 아님을 압니다.

주님 안에서 나의 삶이

점점 더 뚜렷해지기를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자존심을 낮아뜨리는 일이 생겨도

주안에서 주님 때문에 인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변함없도록 하소서.

비난에 차분해지도록 하소서.

주여

배알 틀려도

주님의 일이라면 참을 힘을 주소서.

아니..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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