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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히 버티리라 (렘 44:15-30 )

주하인 2010. 5. 11. 11:56

제 44 장 ( Chapter 44, Jeremiah )

 

그래

어두움아 덤벼라

그래

세상아 눌러 보거라

 

네가 아무리 깊고

네가 아무리 무겁고

잠시 내 눈을 가리어

내 마음을 어둡게 하고

날 흔들수 있을 지언정

곧 다시 일어나리라 

굳건히 견디리라

주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 끝날

주님이 오실 그날

내 영혼이 온전한 성화될 그날까지

굳건히 버티리라

 

 

竹影掃階塵不動 (소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흔들려도 계단의 티끌하나 움직일 수 있으랴)

月輪穿沼水無痕( 밤하늘 달빛이 아무리 내리 꽂아도 연못에는 흔적하나 남길 수 없도다)

                               -  무명의 漢詩 (점심 식사 후 들은 한방원장님의 한시 강의에서... )

 


15.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래도 예레미야님에게 '큰'무리가 모이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하나님의 선지자의 이야기를 함부로 흘려 보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그럼에도 하는 말이 가관이다. 
'하늘 여신'에게 기도하지 않은 후 부터 멸망 당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고 다른 이유로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대치시켜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드디어는 '하나님'은 하늘의 여신이랑 동일한 존재로

착각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이랑 어찌 이리 유사한가?  
 

  
 
24.  예레미야가 다시 모든 백성과 모든 여인에게 말하되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예레미야는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인가?

애굽땅까지 쫓아와서 그들을 회개시키려 하거늘

그들의 소리가 극을 달린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외친다.

그 분의 말씀을 외친다.

하나님과 하늘의 여신을 구분하지도 못할 정도로 타락한

애굽의 유다 남은 자들에게 ...


   상황이 그려진다.

애굽으로 결국 도망간 '믿는 것 같은 자들' .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듯 하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만을 기대하고 살며

드디어는 하나님 조차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여신'으로 바꾸어 믿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반신반의 하면서

하나님의 사도인 예레미야의 말씀에 두려운 마음으로 ,

한편으로는  손해볼까 두려워 모여든 것이다.

 예레미야님...너무도 어이없는 그들의 고백에

큰 충격을 먹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결코 그 '큰' 왜곡된 유다의 남은 무리들에게

그나마 기대를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한다.

 

 무엇을 느끼는가?

 

 애굽에 도망간 남은 자.

기독교인이면서도 세상에 푹 빠진 자.

하나님을 기복적으로 만 믿는 자.

세상의 논리에 맞추어 자기 편의 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

혹시 내 믿음에는 그런 성향은 안 남아 있는가?

내 마음대로 그리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은 없는가?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예레미야의 마음 및 대응 태도.

그 분이 눈물의 선지자일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끝없는 타락에 대하여 아직도 기대를 놓치 못한다.

그것은 '사랑'이 넘침이기 때문이다.

 더더욱 배워야 할 것은

그들 , 어이없는 '사단적 '논리에 대하여

세상의 합리적 이해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이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들.

 물론, 아직은 초반이 넘어가는 시점이긴 하지만

남들 처럼 경쟁력 있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두놈 모두 그리 세상적으로 잘 키우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이 부담스럽다.

 어제는 당직을 서고는 피곤하여 싸우나 하고는

아버지 학교에 가지 않고 '기도원'예배로 향했다.

마음이 그랬다.

얻은 게 있으니 또 밀고 들어오는 자식에 대한 염려들.

주님의 응답처럼 두 아들 모두에 대한 내 관점을 바꾸는 생각이

insight처럼 들어오긴 했지만 '총론'과 '각론'은 늘 다르지 않던가?

이런 것이다.

 큰 아들.

아이에게 아버지로서 조금더 인내하고 겸손한 사회인으로 대하자.

그리고 권고하고 기다리자.

주님이 인도하실 것을 내가 앞서지 말자.

하지만..

권고하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매사에 하나하나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과거 역기능 아버지 주하인이 부닥치는 문제들이다.

권고하고 기도하고 내려 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의 충고나 책을 보면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권유한 후 혼은 내지 않되 실적은 체크하는 게 중요하다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또 '울컥'할지 모르는데..

나이든 자식의 아버지로서 또 체크도 어려운 것 같고

컴퓨터 게임 중독을 - 인지 아닌지 모른다.  다만 추정하고 걱정할 뿐 ㅜ.ㅜ;;-  그냥 두기도 그렇다.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 오래했다.

얼마나 더 기다리는가?

그게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

나 혼자 내 살아가는 데 부닥치는 생각들도 많은데

어찌 이리도 두배세배 고민이 늘어나는가?

............

 

 아침에 묵상은 예레미야님의 입장에서 시킨다.

적당히 세상의 물에 빠진 '큰 아들' 이 애굽에 남아 있는 유다 남아 있는 자로 대비된다.

아니..

일 부분.

현재..

어찌되었든 젊은 나이에 친구와 술, 컴, ...애굽적 성향에 많이 접해 있다.

그러면서도 아들은 거리를 유지하지만 교회에 나가고는 있다.

그런 그가 대화를 해보면 '피상적 믿음' 처럼 보인다.

아이.

과거에 기도도 잘하고 나를 예수님 영접하도록 이끈 아이다.

 어제는 기도원에 다녀와서 나름으로 영적 무장을 하고

아이에게 차분한 - 윽박지르거나 어제의 묵상에서 고백한 것 처럼

겸손하지 못한 통제하려는 아버지가 아닌 -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화를 했다.

'앞으로 이러 이러해라.

 이렇게 하는 것이 네 나이에 합당하다.

 그래서.. ..

 나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이렇게................'

그래도 답답하다.

아이는 피상적으로 '예'는 하지만

그 생각에 변화가 없는 듯하다.

답답하다.

 

 그러다가 예레미야님은 더 답답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 그 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보니

내 하는 듯,  세상의 지식으로 조언을 짬봉하여

'성공'도 하고 '하나님'도 놓치지 않을 것을 다분하게 , 바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분은 그 엉터리 같은 '하늘의 여신' 을 되뇌이는

때려 주고 싶은 ㅜ.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침없이 증거한다.

어떤 변명이나 해설도 하지 않았다.

'너희가 여신이 무엇인가?

 어찌 그리 엉터리 같은 소리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너희가 하나님을 여신이라는 우상으로 대치했구나..................' 하고 일일히

따지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처음이나 지금까지나 변화없이

담대히 외친다.

 

 그렇다.

나도 아들을 대할 때 더 이상 내 경험과 생각과 세상의 성공서등으로 인한

짬봉 믹스된 지식으로 혼란하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고는 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계속 가르쳐야 겠다.

흔들릴 일이 없다.

잘되어서 이제 성공으로 가면 또 무엇하겠는가?

아이 돈 많이 벌어 무엇하겠는가?

하나님 믿음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한 게 최고가 아닌가?

하나님 주신 말씀대로 살면 그들이 두려워 하던 안전 문제는 해결될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의 겸허함

하나님 순종

하나님의 기쁨..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지도하고 권유해야 할 길이다.

 

 비단 아들 뿐인가?

일상에 살면서 순간순간 부딪치는 여러가지 문제 중에서

올바른 태도,

구원받고 중생한 자로서의 변화된 태도를 선택하기에

가끔은 부닥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럴 때 오직 하나님 ,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만 대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어떤때는 우스운 것 같고

비효율적인 일이 될지라도

주님 좋아하시면 그리하리라

 

 

적용

 

1. 아들과 대화할 때 ' 묵상'으로 그리하리라.

 

2. 기다린다.

 예레미야님의 눈물의 기다림은 인간적 해결책을 가능하면 배제하고

 인내를 의미했다

  서두름은 금물이다.

 서둘러서 될 일도 아니고 되어도 주님 뜻대로는 아니다.

 내 세상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할 일은

 하나님을 얼마나 올바로 이해하고 감동 하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지에 달렸지

 현세의 성공을 지표로 삼을 이유는 없다.

 알면서도 늘 자식들에 대하여서 만은 초조한게

 내 자아의 이그러진 바램이다.

 

3. 성경 세장 읽겠다.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읽자.   

 

 

기도

 

주님.

자주 헷갈립니다.

애굽적 성공과 하나님 말씀을 순전히 준행하는 사이에서요.

어떤 때는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것도 옳은 것 같기도 합니다.

특별히 자식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합니다.

마음이 분주하고 초조함은 주님의 뜻이나

주님의 평강이란 차원과는 거리가 먼 현상임을 볼 때

그것이 내 자아의 잘못된 해석 탓인지

진실로 세상은 무조건 '사단의 도구'여서 그런지 조차 헷갈립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아버지로서 배움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되고

올바른 롤모델로서 주님의 아버지 상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이 만큼 살아온 탓입니다.

제 잘못된 성품의 선택 탓도 있구요.

주여.

그러나 어찌합니까?

이제 제 자식들은 주님안에서 제가 아는 이 평강을

더 깊이 누리고 행복하게 살면서

세상에 영향을 선하게 끼치는

그래서 칭찬 받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바라면서도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 초조함을 요...

주여.

저로 지혜를 허락하시사

예레미야님의 그 끝없는 굳건한 하나님 말씀 순종과 선포와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으로 저를 닮게 하소서.

주여.

인내허락하시고

기도하게 하소서.

늘 영적으로 풍성하게 성령으로 충만히 잡으소서.

예수그리스도시여.

당신의 그 사랑으로 절 변하게 하소서.

우리 가정 성령으로 충만히 이끄사

변화되게 하소서.

더욱 중심잡히게 하소서.

속히 그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절 도우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그리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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