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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소경 거짓 거지(막 10:45-52 )

주하인 2011. 4. 5. 08:46

제 10 장 ( Chapter 10, Mark )

 

 

주님

 

아직 흔들립니다

 

제대로 보게 하소서

 

눈 들어 똑바로 보게 하소서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주님

나는 보지 못하는 소경 같은 자였습니다.

 주님

나는 타인의 판단에 내 모든 가치를 맡기는 거지 같은 자였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까지 그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참으로 오랫동안 외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주님 더 깊이 저를 긍휼히 여기시길 소원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소리에도

저,

주님을 깊이 붙들 수 있길 원합니다.

 

내 영혼 심연에서

아직도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주님을 앎에도 남아 있는

좌절, 근심, 잘못된 인식.............부족한 긍휼........

이 , 제 눈을 가리는 어두움들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래서 온전히 눈뜰때까지 절 붙드시고 인도하소서.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주님.

절 부르소서.

주님

절 일으키소서.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제 원함 아시는 주님

이제는 절 일으키시어

눈 뜨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새 , '김병만'이라고 '달인'이란 코너를 진행하는 개그맨이 유명하다.

일본까지 진출하여 호평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주일 설교에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한 예화를 듣고 감명받았다.

그외에도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일화 중에

우리가 유독 감명을 받는 몇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위 두 분이 갑자기 생각 남은

저 분들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굳이 '예수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어도

공통되는 분모가 있다.

 신체적 단점이다.

김병만님은 '단신'이다.

루스벨트님은 다리를 심하게 절던 분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성공했다.

그 성공의 정도를 객관화 시켜서 소위 말하는 경제적, 명예.......이런 것보다는

자신의 분야에서 거의 정점에 이르고

더구나 '장기 집권'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긴 기간 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유이던가?

어떤 이유로 해서 그들이 그런 장기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

인기를 누리는 것이 성공이라고는 하기어려울지 몰라도

최소한 많은 분들에게 공통되는 지속적인 감동을 주는 것이있다는 점이

공통이라는 것이다.

그 지속되는 감동의 공통은

' 장애물'을 넘어서는 '원함'에 있다는 것이고

그 원함을 이루기 위해서 극기의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남들이 뭐라하든,

자신의 원함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고

원함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없는 부분 ,

예를 들어 김병만님은 '키'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루스벨트님은 다리저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함을 뚜렷이 하고

그 원함에 최선을 다함.

그리고 꾸준함..

 

 오늘 보는 소경은 원함이 뚜렷했다.

눈뜨기 원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길임을 철저히 알았다.

길가에 앉아있다가

예수께서 오시자 처절히 빌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막아서는 군중의 제지를 넘어섰다.

소리를 더 크게 질렀다.

 그리고는 부르시는 소리를 듣자 마자 벌떡 뛰어 일어났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온통 주님 예수님의 소리에 관심을 집중한 결과다.

주님이 물으셨다.

'넌 무엇을 원하느냐?'

그러자, 대답했다.

'저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

그리고는 '눈을 뜨게 되었다.'

 

조이스 마이어 목사님의 동영상을 보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 '나의 부족한 부분' 보다는 ' 나의 장점'에 눈돌려라'"

"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노력하여 결국 성공했더라도

 그 부분에 벌써 훨씬 프로페셔날한 사람들에 어찌 당할까?"

" 내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다. 

   특별한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 공감가지 않는가?

 

나를 돌아본다.

나.

주신 것이 많다.

달란트로 받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삶을 돌아보면 그리 힘있지는 않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유던가?

혹시, '원함' 이 뚜렷함은 아니지 않던가?

내 달란트를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하며

주신 것을 더 열심히 개발하기 보다는

내 부족한 것에 더 눈을 돌리고

'나는 왜 그래.. '하고 있어서는 아니던가?

그 안에는 혹시 '슈퍼맨' 혹은 '하나님' 역할을 하고 픈 자로서의 자신을 그리고 있지 않음이던가?

그리고는 '좌절'하여 포기하고 있어왔던 것은 아니던가?

비록, 그 잘못된 바램,

혹은 원함이 뚜렷하지 않음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고

오래 잘못 입력되어진 '거짓 자아'의 역할이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만일 그렇다면 난 어떠한 자였던가?

난 보되 보지 못하던

'거짓 소경'은 혹시 아니지 않던가?

혹은 그리 풍성히 주셔서 부자임에도

늘 결핍을 느끼던 '거짓 거지'는 아니던가?

왜 아니겠는가?

난, 원함도 뚜렷지 않고

늘 결핍된 마음이 있던 자 맞다.

그게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게 되던

허덕거림이기에 결과론 적으로는

아주 아주 선한 도구는 되었지만..

이제 앞으로도 그러하다.

소경의 눈뜨는 것은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한 도구'이었을 뿐이다.

소경이 겨우 눈만 뜨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결국 세상의 소경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의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 버리는 그에 지나지 않기에

하등의 이익은 없다.

하지만, 그 소경은 그 눈뜸을 통하여 예수님을 깊이 만났다.

나역시 마찬가지다.

눈을 떴지만 아직은 눈 앞이 아른거린다.

흔들리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원함'이 뚜렷해야 한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내 단점과 결점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주님이 인도하실 방향으로 날 쓰임받기 위해서는

원함이 주님이 원하시는 그 원할 것이 되어 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내 달란트가 온전히 이용되어야 함이

내 더욱의 원함이 되어야 한다.

 온전히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더욱 깊이 집중해야 한다.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 묵상해야 한다.

언젠가 부르실 주님의 부르심에

그 분의 물어 보심에 즉시 대답할 수 있도록

더욱 내 원함을 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주신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소경이 주님 따르듯

더욱 열심히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적용

 

1. 기도한다.

 

2. 말씀 세장 읽는다.

 

3. 부족한 것 주님 채우시도록 기도하고 기대한다.

  더욱 원하지는 않는다.

  기다린다.

 

4.  PI로서의 나를 원한다.

 내 잘하는 것..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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