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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지만[눅2:1-20]

주하인 2016. 1. 7. 10:17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요셉이 보았을 때 남의 애를 밴 여자와 약혼을 했으니

얼마나 심한 혼돈이 있었을까?

지금도 아랍은 그런 경우 자기 식구조차 죽이는 무서운 세상인데

그 옛날의 중동의 습관이야 말로 어찌 표현할까?

 그런데 요셉은 그러지 않았다 .

이게 미련해서 일까?

바보라서일까?

아니다.

마 1:19 보면 '가만히 처리하고자 했다'고 나온다 .

그는 '배려 ' 깊은 사람이다.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아니다.

배려 깊다는 말은 그의 '자아'가 인간적이다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위에서도 기술했지만 아랍이라는 상황, 고대 중동이라는 상황

인륜보다는 율법이 서슬이 퍼런시대의 저 즈음에

단순한 배려라는 차원으로 설명하기 힘든 무엇이 있다.

 보라.

'거기 있을 그 때'라 나온다.

 

거기 있어서

그녀, 약혼한 그 여인이

남의 아기를 가져서 배가 불러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의 심사가

보통이겠는가?

 하루에도 열두번씩

그의 심사를 드나드는 '죽이고 싶은 ' 마음이 어찌 없었을까?

단지 착함...

그것은 한두번 정도 슬쩍 지나가고 더 이상 보지 않을 때야 얘기가 가능하고

배려라는 도덕적 성품은 잠시 멋지게 들릴 상황에서 가능하지만

수개월을 배불러오는 불륜의 여자가

더더구나 마리아라 생각하면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

모든일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할 정도로

인간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을지 모를 여인이다.

 

거룩하고 성스럽고

너무 당당해서 그 불륜의 일이 자기의 잘못이 아닌듯

남편 요셉의 심사는 챙겨보아 살갑게 공감해주고 미안해 하는 ,

아니 그러한 배려를 결심한 그 요셉 남편에 대하여

정말 귀히 생각하는 태도를 지녔을 듯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 가족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의 흐름이 그들에게는 있었기에

저런 관계가 유지가 되는 것이란 이야기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이것보라.

남편 요셉의 입장이라면

이것 마져 '왕따'로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는 애써 배려하고 봐주고 살신 성인의 마음으로 '조용히 ' 해결하려 했으나

아내일 마리아는 너무 당당하고

주변 사람들은 자기는 신경도 안쓰고 애기와 마리아에게만 경배한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하면

배반 당한 느낌일 것일 수 있다 .

세상에 훌륭한 결심을 하고

하나님 보기에도 놀라운 선택을 했음에도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

 

여기에는 두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무감각한 정서를 가진 자 이거나 미쳤거나

하나님이신 아기 예수님의 존재를 그 , 요셉이 느껴서

더 이상의 혼란이 그에게 없었을 것....

은혜로 충만하여 세상이 온통 '천국'으로 보여

모든게 그냥 너울 너울 춤추고만 싶은 '착한 은혜 받은 ' 요셉 말이다.

 

 

나.

조금은 저 심사가 이해가 간다.

옛날.

참.. 부정적이고 나름 결단력있는 정의감있는 자가..

예수님 영접하고 은혜 받아 말씀대로 살려 결단하고

내 안에 부조리 하게 생각되던 것도

나름 말씀 안에서 '약한게 강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

배려하고 터치 잘하는 성숙한 결단을 했는데

나는 어디가고

자꾸 '더더더 ' 하는 상황처럼 되고

그렇게 변한 나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들만 높아지려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

 

이래서 '서운'한 마음이 들려 하는 것..

그래서 마음대로 떨쳐 버리고 싶은 것...........그 마음........

어쩌면 요셉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보여 주시는 듯하다.

 

"요셉의 그 상황을 알겠니?

예수님 믿는 것은 '자신'을 내려 놓아 십자가에 달게 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가 '살아서' 움직이며 '서운하게 ' , 속상하게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라 생각하면 달리 보일 것이다 .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사는 것이다 .

내가 약한 것이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강한 것이다.

너는 죽고 하나님이 살기 위하여.. 라는 개념이 옳은 것이다.

때로는 그 감성은 세상의 감성과 상치 될 수 있다 .

그러나 그게 .. .옳다 .. '

보라 결국은 요셉이 가장 옳은 '성자' 같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서 '마리아'와 '요셉' 중 누가 더 아름다울까?

 두 사람 다 믿음이란 차원에서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품성에서, 인내라는 차원에서는 어쩌면 더.............

그렇다.

주하인아.

눈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다시 돌리라.

생각을 말씀에 맞추어 생각하라.

성령이 책임지고 운행하리라.. "시는 듯하다 .

 

보라.

극도의 인내력도 '수개월'간 때가 될때까지 인내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아마 요셉을 사로 잡았으리라.

마치 '아내 수술할 때의 그 절절한 잡으심 ' 처럼......

그날을 감해주실 말씀 속에서의 약속처럼.. .

 

 

귀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요셉과 어찌 비교할 바있겠는가 마는

제 상황의 그것과 다름없는 상황에 그는 몰리어 있었습니다.

서운하지 않을 것.. .오히려 기쁠 것임은

성령이 주님 하나님의 원리 가운데 운행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자아'가 부인되는 훈련이 이루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숙한 성화를 이루어낼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자리 거기 있지만

그 안에서 열렬한 내적 투쟁과 승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내 주여.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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